차라리 증오와 경멸의 눈빛이 더 견디기 쉬울 거라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미나미도 정리한다고 했잖아?’
그녀가 여자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민수는 갑자기 쑥스러워졌다.
‘그런데 왜 그런 건데?’
이럴 땐 침묵이 최고였다.
여자랑 싸워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응?’
‘왜?’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틸 수만도 없는 민수가 입을 열었다.
아니었다.
그리고 맞았다.
여자랑 싸워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총독이 되려면 주변이 깨끗해야지.’
완전 실수였다.
민수의 냉정한 대답에 난영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완전히 마음을 닫았다.
정말 상종해선 안 될 종자였다.
‘아 그러셔?’
민수가 일어났다.
분명 실수였다.
더 이상 있어봐야 본전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난영도 판단이 섰다.
박민수 개새끼!
하지만 그녀는 일어서지 못했다.
끝까지 퍼부었다.
‘그 잘난 출세를 하시려고 주변의 여자들까지 다 버리겠다?’
그런 그를 향해 난영이 비수를 날렸다.
‘자길 도와준 여자까지 배신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받은 열쇠와 편지도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걸 나보고 하라고?’
편지는 바람을 따라 어둠속으로 날아갔다.
열쇠는 열린 문을 맞고 현호의 앞에 떨어졌다.
문을 나가는 민수의 뒷모습에 대고 난영이 소리를 질렀다.
‘이 민족반역자 새끼!’
현호의 일행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난영을 쳐다봤다.
자기들을 부른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민족반역자 새끼들이 아니고 민족반역자 새끼였다.
그래서 난영도 지지 않고 그들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가 눈싸움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난영은 쏘아보며 자리를 떴다.
꽝!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난영이 사라졌다.
때를 기다리던 현호가 호텔 열쇠를 주웠다.
그리고 재빨리 술집을 나왔다.
민수는 총독부 청사로 들어가는 것이 확실했다.
어느 새 그를 미행한 현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손에 쥔 열쇠를 흔들어보았다.
민수도 난영도 현호의 일행도
모두가 자리를 비우자 술집을 썰렁해졌다.
그렇다고 텅 비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까부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떨어진 편지가 바람에 조금씩 굴러다녔다.
어둠 속에서 손이 나와 그 편지를 주웠다.
학규는 오래 전부터 총독부에 사람을 심으려고 애를 써왔다.
결코 쉽진 않겠지만 고위직일수록 좋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공안계통이면 더 좋았다.
하지만 청소부 하나까지도 소중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보고서를 들고 국장과 함께 총독실에 들어간 민수는 이야기가 길어졌다.
청소부로 잠입한 요원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도청장치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옆방에서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심각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처음 보고에는 민수가 주로 이야기를 했고
보고를 듣고 나서는 주로 총독이 말을 했다.
말소리만은 누구의 음성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게 다였다.
중요한 것은 이미 민수가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세 사람의 밀담은 오래 지속되었고 상호간에 많은 이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은 총독의 뜻대로 된 것 같았다.
총독은 열심히 설명했고 민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하이를 외쳐댔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바람직한 결론은 아니었다.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총독의 결론이 바람직할 리는 없었다.
아지트로 돌아온 난영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그런다는 것을 학규는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녀를 말릴 재간은 없었다.
아니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 때 다시 범석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난영에게 다가갔다.
술집에서 주운 편지를 다시 건넸다.
‘아니 이건?’
‘남자가 여자를 정리하는 목적이 뭐겠나?’
범석의 민수의 결정에 대한 생각은 난영과 달랐다.
‘하지만 그는’
난영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범석이 고개를 저으며 그걸 막았다.
‘진짜 총독을 원하면 어느 것이 좋겠는가? 주변이 깨끗하다는 인상? 아니면 전직 총리를 아버지로 둔 여인의 후원?’
난영이 눈물을 닦았다.
범석의 말에 의하면 청렴하다는 인물들은 총독부 전체에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수가’
이번에도 범석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확실히 남자가 보는 남자와 여자가 보는 남자는 달랐다.
범석의 눈에 민수는 난영을 위한 결정을 한 것이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난영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녀도 믿고 싶기는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범석은 믿을 수 있었다.
‘그래 나를 믿어.’
난영이 편지를 건네받았다.
이제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어났다.
범석은 혹시 하는 기우에 난영의 뒤통수에 소리를 질렀다.
‘열쇠가 필요하면 누구를 찾아야 할지 알지?’
그녀가 나가자 학규가 술잔을 내놓았다.
‘자네가 웬일로 오지랖인가?’
범석 스스로도 좀 의외였다.
그가 남의 일에 이렇게 관여하다니.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죽을 때가 됐나보지.’
하지만 그건 농담이 될 수 없었다.
모두가 그걸 깨달았다.
‘끝내 그는 그걸 넘겼군.’
‘그렇게 됐네.’
‘자넨 이제 만주로 가게’
학규는 지대장으로서 당연한 명령이었다.
‘아니 내가 여기서 자리를 피하면 어찌 되겠나?’
하지만 범석은 그 명령을 받을 수가 없었다.
‘총독부내의 모든 조선인이 취조 받게 될 거야.’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 중에 절반은 쫓겨날 거고’
절반이 넘으면 넘었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학규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 앞가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범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 책임은 나에게 있어.’
그는 이미 결심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거길 들어가면 자넨 어찌되는지 알아?’
범석이 차분하게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졌다.
‘그래도 가야 돼.’
범석이 술잔을 넘겼다.
비장함이 가득찬 술잔이었다.
학규는 알았다.
자신이 범석을 말릴 수 없음을.
드디어 지대장 생활에 가장 힘든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난영이 호텔방을 두드리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분명 사람은 안에 있었다.
인기척이 확실했다.
다시 더 크게 두드려보지만 여전히 응답은 없었다.
마침 범석이 말한 그 누구가 부르기도 전에 달려왔다.
그리고 그 호텔보이 복장의 대원은 난영의 지시를 기다리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아마도 오랜 경험 때문인 거 같았다.
오랜 경험이 가져온 직감.
난영의 눈에 들어온 호텔방의 장면은 정말 가관이었다.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모든 물건들은 흐트러져있었고 여자의 옷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이 때 들리는 방 안의 비명소리.
난영과 대원은 다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