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가 미나미를 겁탈하려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옷은 찢어져 나갔고
이성을 잃은 현호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감히 사령관의 처를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그도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어온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난영이 주변을 둘러보다 빗자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꾸로 들고 현호를 내려쳤다.
한번으로 안 되서 연거푸 내리쳤다.
그때서야 그들을 발견한 현호는 덮치는 걸 그만두고 일어났다.
대신 칼을 빼들었다.
난영을 향한 칼날이었다.
단도를 빼든 그가 또 다른 손으로 뒷덜미를 확인했다.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끄떡도 없었다.
현호가 단도를 다른 손으로 옮겨 잡았다.
난영도 한바탕을 각오한 듯 자세를 잡았다.
이 때 소란을 듣고 다른 종업원들이 달려왔다.
하나
둘
셋
거실에 이어 방안까지 꽉 채웠다.
그들은 사태를 직감했다.
각자가 무엇인가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현호를 잡으려 포위를 시작했다.
현호 역시 사태를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칼을 집어넣고 신분증을 내밀었다.
신분증을 본 종업원들은 갑자기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기세가 산 현호가 당장 꺼지라며 턱을 내밀었다.
종업원들은 눈치를 보며 하나씩 자리를 떴다.
이 때 들이닥치는 현호의 부하순사들.
자리를 뜨기 시작하는 종업원들을 내쫓고는 수갑을 꺼내 난영을 체포했다.
하지만 보고만 있던 미나미가 이를 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그녀가 나서는 꼴에 현호가 상대했다.
비열하고 능글맞은 본능이 그대로 표출됐다.
‘누구?’
‘뭐?’
‘사령관의 처란 건가? 아니면 그 누군가의 내연녀란 건가?’
‘뭐가 어째?’
현호가 부하들에게 빨리 나가라며 소리쳤다.
‘데려가라!’
부하들이 난영을 끌고 가려 하자 미나미가 다시 한 번 나서 보았다.
‘그녀를 체포할 수는 없다.’
‘이건 경무국의 소관입니다.’
갑자기 예의를 갖춘 현호가 단호하게 그녀를 막았다.
사실은 맞는 말이었다.
그 말에는 미나미도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현호가 다시 한 번 본능을 드러내며 미나미를 비웃었다.
‘사모니임.’
능글거리는 그의 비웃음에
미나미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난영이 수갑을 찬 채 품에서 민수의 편지를 꺼냈다.
미나미가 편지를 건네받자 현호의 부하들이 난영을 끌고 갔다.
호텔 보이 복장의 요원이 방문을 닫아주었다.
그 시간에 민수는 총독부 지하실에서 창훈을 심문하고 있었다.
청소부는 여기에서도 정보 수집을 위해 애를 썼다.
민수가 한참 설명을 하는 것은 포섭을 시도하는 것이 분명했다.
창훈은 민수를 쏘아볼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민수는 다시 설명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내용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창훈이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가 포섭을 당했단 것인가?
청소부는 경악했다.
그토록 처절한 고문을 버텨온 그가 민수의 감언이설에 이토록 쉽게 넘어가다니.
민수의 만족한 표정에서 그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민족반역자 새끼’
그에게 칼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처단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손에는 청소도구 밖에 들려있지 않았다.
뜻을 이룬 민수가 창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청소부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이 때 현호가 난영을 끌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청소부는 급히 몸을 숨겼다.
마침 심문을 마치고 나오는 민수와 그들이 마주쳤다.
민수는 체포되어 끌려오는 난영을 발견했다.
민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현호에게는 이 모습만큼 통쾌한 장면은 없었다.
그러한 민수를 마음껏 비웃었다.
현호의 비웃음 따위는 민수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난영의 그 눈초리만은 결코 지워지질 않았다.
그녀의 원망 가득한 눈초리.
자신은 항상 그녀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는 경멸과 원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천근만근 마음이 무거웠다.
청사를 나오는 민수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고 그 마음을 실은 발걸음 역시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는 청사 정문부터 계속 따라오는 승용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미나미는 오래 전부터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표정, 발걸음 푹 숙여진 고개 모든 것이 그의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미나미도 할 말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입을 열 수 없는 상황도 있는 법.
지금이 그러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돌리자니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민수가 그녀의 차를 발견했다.
미나미는 용기를 내어 창을 열었다.
그를 외면하고 길을 걷는 민수를 바라봤다.
그는 분명 지금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야속하지만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조용히 속삭였다.
‘한번만’
그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그녀 스스로 놀랐다.
자신이 누군가에 매달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민수가 뒤를 돌자 미나미는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꼭 한번만.’
민수는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른다.
보고 싶던 그녀가 마침 찾아준 것일까?
자존심 강한 여자가 애원하는 것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꼭 한번만 만나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는 말없이 차에 올랐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미나미가 차에 올랐다.
차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그녀의 집에 가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다음날 총독부 청사로 향하는 범석의 발걸음은 어제 민수의 발걸음보다도 훨씬 더 무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통과하던 정문의 경비들과 그들의 표정마저 신경이 쓰였다.
범석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길들이.
청사의 로비에도 대기하는 경찰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범석에게 던지는 인사 뒤에도 무언가 뒷말들이 많은 것만 같았다.
범석은 뒤통수가 뜨거워 뒤를 돌아보았지만 직원들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분명 그들은 범석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때 정복을 한 누군가가 범석을 부르며 달려왔다.
범석은 도망가 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때도 아니었다.
할 수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종로경찰서의 김 형사였다.
‘웬일이야?’
‘국장 특별지시로 지원 나왔어요. 총독부 내 첩자 얘기는 들으셨죠?’
범석은 대응할 기분이 아니었다.
범석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섰다.
그의 뒤통수에 김 형사가 소리 질렀다.
‘끝나고 한잔 어때요?’
하여튼 개새끼였다.
병신 새끼였다.
분위기 파악을 못해도 어찌 저리 못하는지.
저런 병신하고 무슨 술을...
범석이 근무하는 경무국 자체가 총독부 내의 첩자 이야기들로 온통 수근 거렸다.
문을 열고 자신의 자리에 앉기까지가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의자도 너무 바늘방석이었다.
이때 울리는 청사 내의 안내방송.
방송 안내음이 울리기도 전에 범석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직원회의가 있으니 전 직원은 대회의실로 모이라는 내용이었다.
올 게 온 것이다.
안내자가 총독께서 직접 주관하신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그보다 확실한 증거가 이디 있겠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맥박이 빨라졌다.
범석은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회의실로 향하는 현호가 그런 범석을 대놓고 비웃었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 역시 표정들이 거슬렸다.
현호가 회의장을 향하며 성민에게 지시했다.
‘심문실을 준비해.’
‘네 아마 7호실은 비어있을 겁니다.’
가던 길을 멈추는 현호.
긴장하는 부하들.
현호가 성민을 노려보았다.
성민도 분위기를 파악했다.
‘설마 그럼 1호실?’
성민이 놀라서 범석을 돌아보았다.
그제 서야 현호가 웃음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범석이 회의장을 향하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형사계 직원들이 일제히 범석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러는 것만 같았다.
앞서가는 범석을 보며 현호가 뭐라고 조롱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범석을 쳐다봤다.
그리고 큰소리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