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망한 쉬켄 수도원의 낡은 문이 열렸다. 빛바랜 튜닉에 낡고 거친 검은 스카풀라를 걸친 백발의 살리타가 나와 섰다. 작은 몸집이었으나, 옹골차 보이는 품새였다. 살리타는 일백 성상의 세월을 여기에서 견뎌냈다. 살리타가 해 저문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가 문밖 판석 위에 나와 서있는 모습을 보고 닮은 차림새의 후조도 뒤따라 문밖으로 나왔다.
“모쇼보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가?”
후조의 기척에 살리타가 중얼거렸다. 샬롯 일행과 맞닥뜨려 레이와 퐁을 잡아먹고 대가리가 잘려 죽은 날짐승이 모쇼보였다. 모쇼보는 살리타와 후조, 그리고 나타율이 창조한 열두 번째 생명체였다. 백 살 내외의 이 세 수도사는 쉬켄 수도원의 원로 수사들이자, 사의술(邪醫術)가들이었다. 그리고 후미진 석산 절벽의 험지에 세워진 쉬켄 수도원은 고대로부터 명맥을 이어온 봉쇄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이 위치한 지리적 조건이나, 지독한 폐쇄성 때문에 쉬켄이란 이름은 세상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그랬던 쉬켄의 문이 테러로 인해 열렸던 것이다.
“진즉에 지났다네. 그 아이가 북동쪽 해상에서 뭘 하느라 그러는지 꼼짝을 하지 않더군.”
후조는 걱정 어린 말투였다. 쉬켄에서 창조한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위치추적장치를 달아 놓았다. 그리고 쉬켄이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의 두루마리들 덕분이었다. 쉬켄 수도원의 서가에는 고대의 지식이 집약된 두루마리들이 무수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쉬켄의 수도사들은 대대로 만물의 조화 중에서도 각별히 유전학에 집착해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두루마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비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쉬켄의 선대 수도사들은 용과 스핑크스, 레비아탄과 라이칸스로프 같은 생명체들을 두루 창조해냈다. 그러나 현세에서는 금기시하여 쉬켄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더 이상 창조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테러로 흉흉해지자 살리타, 후조, 나타율, 이 세 수도사가 벌레 먹고 해진 두루마리의 먼지를 털어내고, 복구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어.”
살리타는 귀환 시간이 훌쩍 지나도 소식이 없는 모쇼보 걱정에 마음속이 영 뒤숭숭했다.
“강한 녀석일세. 너무 걱정 말게나 곧 돌아올 게야.”
후조는 살리타에게는 짐짓 안심하라고 말하면서도 분명 모쇼보에게 불미스런 일이 생겼을 거라고 확신했다. 새벽까지 모쇼보가 돌아오지 않으면 짐새들을 풀어 정찰을 내보낼 작정이었다.
“바람이 차네. 그만 들어가세.”
“어흠, 세상이 정말 망하려는가....... 이리 어수선해서야........”
후조가 살리타를 진정시켜 수도원 내실로 들어가려는데, 나타율이 혼비백산하여 안뜰로 달려 나왔다.
“두두리가 깨어났다! 두두리가 깨어났어!”
바깥에서 살리타와 후조를 만난 나타율이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두두리는 근래에 나타율이 공을 들여 창조하던 생명체였다.
“깨어났는가?”
“깨어났어. 어서, 어서 다들 좀 와서 도와주게나.”
“무엇을 말이나? 깨어났다며?”
“근데, 그게 말하자면.......”
“쿵, 쿵, 쿵, 쿵!”
삼 미터 장신의 거구가 지축을 흔들며 복도에서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두루마리에 적힌 대로 딱 귀신 부리는 나무도깨비의 형상이었다. 두두리는 늘어진 긴 고목 팔을 허우적대며, 제압하려고 달라붙은 젊은 수도사들을 떨쳐내며 질주하고 있었다.
“우왕, 우왕, 우왕!”
두두리는 나타율의 꽁무니를 뒤쫓아 왔다. 찾던 나타율이 다시 보이자 두두리는 잡아먹은 황소개구리가 목구멍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요상한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저것이 왜 저러는 게야? 불량품인 건가?”
“불량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나. 내가 언제 하자있는 물건을 내놓은 적이 있던가.”
후조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나타율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우왕, 우왕! 우왕, 우왕!”
“쿵, 쾅, 뿌지직! 쾅, 쿵, 빠지직!”
두두리는 세 노인이 서 있는 문밖의 마당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통에 그나마도 변변찮은 수도원의 세간붙이들이 남아나질 않았다. 두두리는 지나치는 곳에 있던 집기라는 물건은 죄다 투닥투닥 깨부수고 있었다.
“저 물건이 한 건 하네 그려. 자네 덕분에 우리 형제님들 고생이 말이 아닐세.”
살리타가 빈정거렸다.
“나타율 수사님! 제발, 서둘러요! 아악! 나 죽는다!”
두두리의 고목 같은 발을 잡아끌던 젊은 수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두두리는 이제는 아예 문틀을 부수고 나올 기세였다.
“어서 제발 도와주게나. 두두리를 서둘러 재워야겠어.”
“방금 깨어났는데 도로 재운다고?”
나타율의 간청에 살리타가 능청을 떨었다.
“아서 게. 저러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수사님들도 짐 싸서 탈교라도 하려 들면 어쩌려고 그러나. 얼른 저거나 어떻게 처리하세나.”
두두리의 도를 넘는 포악질에 마음이 급해진 호조가 밀실로 걸음걸이를 재촉했다.
호조는 수도원 복도의 포석을 지르밟고 자신의 밀실로 들어갔다. 큼직한 실험용 탁자 위에는 유리관들이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호조는 플라스크에 담겨 있던 노란 용액을 푸른 액체가 담긴 비커에 부었다. 그리고 혼합한 초록 빛깔 용액을 바늘이 꽤 큰 주사기에 채워 넣었다.
“한 방에 보내버리게나.”
호조는 뒤따라 들어온 젊은 수사에게 초록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쥐여 주었다. 젊은 수사는 전광석화처럼 달음박질쳐 나갔다. 자신의 팔뚝 굵기의 커다란 주사기를 부둥켜안고 복도를 전심전력으로 달렸다. 문전에 두두리가 보였다. 그것은 바깥으로 비집고 나가려다가 구부정한 자세로 문틀에 꽉 끼여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두두리를 보고 젊은 수사는 쾌재를 불렀다.
“비켜!”
젊은 수사는 주사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두리를 향해 질풍처럼 돌진했다. 그리고 그것의 옹이 같은 궁둥이에 커다란 바늘을 찔러 박았다.
“우오오오오옹!”
호조의 마취제는 효과 만점이었다. 두두리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돌바닥으로 쿵,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금세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쾅! 쾅! 쾅! 쾅!”
한바탕 두두리의 소동으로 고단했던 수사들이 깊이 잠든 그날 밤. 누군가 쉬켄 수도원의 육중하게 잠긴 대문을 시끄럽게 두드려댔다. 졸고 있다가 퍼뜩 놀란 불침번 수사는 아직 꿈결인 줄 알았다. 수년 동안 쉬켄을 찾은 방문객은 없었다. 더욱이 이런 한밤중에 험준한 바위산 비탈을 타고, 좁디좁은 벼랑길을 달려올 만큼 대담한 인사를 알지 못했다.
“쾅! 쾅! 쾅! 쾅!”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불침번 수사는 그제야 비척비척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방범용 미닫이창을 열고 넌지시 내다보았다. 이상한 손님이 서 있었다. 요새처럼 은밀한 쉬켄 수도원을 방문하는 부류 중에는 순례자로 위장한 좀도둑이나 도망치는 범죄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문 밖에 서 있는 남자는 이들 중 어디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다소 초라한 행색이었으나 야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불침번 수사는 후드 달린 잿빛 망토를 걸친 남자의 정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입니까?”
불침번 수사가 아리송한 남자에게 경계하는 말투로 물었다.
“쉬켄의 지혜를 얻고자 늦은 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홍안의 미소년 같은 남자의 억양은 제법 어른스러웠다.
“여기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망해 돌아가는 다급한 형편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원로 수사님께 말씀이라도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불침번 수사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전란의 한밤중에 어렵사리 수도원을 찾아온 어린 이방인이었다. 그런 그를 험난한 밤길로 되돌려 내치는 짓은 수도자로서의 마음 자세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임의로 규율을 어기고 함부로 외부인을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조금 있으면 새벽 기도 종이 울릴 터이니, 그때 원로 수사님께 알려는 보겠습니다. 누구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피오니온의 유도리라고 합니다.”
전란의 풍파가 유도리에게 무슨 완력을 행사했는지 그의 차림새가 무섭게 변모해 있었다. 이태 전, P타워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났던 어줍은 말단 기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음장 같은 살갗은 투명했고, 날카롭게 찢어진 가는 눈매는 형형했다. 도리가 걸친 누더기 망토는 허술했으나, 낯빛은 탈피한 독사처럼 서늘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일부러 자정이 넘은 시각에 맞춰 쉬켄으로 말을 달렸다. 쉬켄은 봉쇄수도원이라서 손님을 맞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래서 날이 밝은 때보다 어두울 때 문전박대 당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도리의 노림수였다. 몰락한 수도원이라도 명색이 수도자들 아닌가. 수도자들의 후한 인정이 도리를 수도원으로 들이게 될 참이었다.
“댕그랑! 댕그랑! 댕그랑!”
미명에 쉬켄 수도원의 종이 울렸다. 잠시 후, 두툼한 수도원의 대문이 열렸다. 대문을 열어 준 수사는 불침번 수사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선 수사는 한눈에도 수행을 갓 시작한 신참으로 보였다. 애티가 채 가시지 않은 수사의 눈꺼풀에는 여태 잠이 한 가득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요.”
입술을 비죽 내민 어린 수사가 도리를 안내했다. 어린 수사는 곁눈질로 연신 힐끔거리면서 낯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도리의 발걸음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게 하려고 잡은 등롱의 조절에 정성을 기울였다. 돌담으로 된 어두침침한 전실을 거치니 드넓은 안뜰이 나왔다. 꽃 울타리를 두른 채마밭에서 닭들과 양떼가 노닐고 있었다. 숙소 건물에서 나온 수도자들은 가깝게 인한 회랑으로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오던 길에 들른 마을도 큰 피해를 입었던데, 이곳에는 테러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습니까?”
앞서서 걷고 있는 어린 수사에게 도리가 운을 떼었다.
“네. 여기는 워낙에 외진 곳이 돼나서 다행스럽게도 세상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서고는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네?”
“쉬켄 수도원은 방대한 서적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수도원이 사라져도 서고는 온전할 것입니다.”
“쉬켄의 서고에는 얼마나 많은 고대의 장서들을 보관하고 있습니까?”
“얼마를 예상하시던지 그 이상이 될 겁니다.”
어린 수사는 수도원 본채의 현관 발판에다가 신발에 들러붙은 흙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도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도리도 신발 바닥을 발판에 비벼 흙을 털어냈다. 그제야 어린 수사는 본채의 내실로 도리를 다시 인도하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자 성상이 있는 벽감이 양쪽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어린 수사는 도리를 아치형 천장의 복도를 지나 오랜 세월 수많은 순례자들이 거쳐간 방으로 데려갔다. 까무룩한 촛불로 밝힌 순례자용 방구석에는 고독의 더께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원로 수사님이 곧 오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