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소가 쉬켄 수도원의 서가로 도리를 안내했다. 순례자의 방에서 나온 도리는 회랑에서 살리타와 헤어졌다. 드넓은 중정을 거쳐, 어두운 아치형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서가의 입구가 나타났다. 황금빛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처럼 으슥한 곳에 숨어있었다.
“무엇을 찾으세요?”
피소가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며 뒤적였다. 그는 서가 입구의 열쇠를 도저히 못 찾겠다는 투로 일부러 꾸물거렸다.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짓이 서툴렀다. 주근깨투성이 낯짝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지금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은 당신 같은데요?”
도리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고의로 늦장 부리는 피소와 한담이나 나누며 지체할 뜻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냉소적인 어투로 들렸다.
“무엇을 찾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예요.”
피소가 서가의 열쇠구멍에 맞지 않는 열쇠 꽂기를 일부러 반복했다. 자기 또래로 밖에 보이질 않는 놈이 너무 점잖을 떠는 것 같아 꼴사나웠다. 그러다가 도리가 무반응의 태도로 일관하자 못 이겨 서가의 문을 열어 주었다. 도리의 무반응은 나름의 관심 종자 대처법이었다.
“쉬켄의 서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낮고 좁은 입구로 들어가 보니 서가의 규모가 엄청나게 광대했다. 도리는 피소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철제 나선 계단은 깊숙한 지하로 끝없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계단 길은 미로 형태의 커다란 방들로 연결되었다. 개미굴 구조의 방들마다 책들이 한 가득이었다.
“모든 책들이 친절한 것은 아니에요.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빈말이 아니었다. 길을 잃어 굶어 죽은 어느 수사의 시체를 골목 어귀에서 만날 것만 같았다. 주먹구구로는 헤르쿨라네움의 라술을 결코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살리타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자면 이곳의 장서목록은 신뢰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도리는 피오니어가 지닌 이즈마의 육감을 발현했다. 카오스에도 나름대로 고유의 흐름이 있었다. 질서가 없는 책들의 창고였지만 완전한 혼돈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피오니어인 도리는 알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분서하려던 책들은 없었나요?”
잠시 눈을 감고 사유하던 도리가 피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피소는 장서목록 책자를 아무렇게 훑어보고 있었다.
“우리 수도원은 아무리 불경한 책이더라도 훼손하지 않아요.”
피소는 보던 책장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대답했다. 도리의 거만한 말투가 불쾌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말해주지 않으려다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셈치고 선심을 썼다.
“저주받은 책들을 따로 모아둔 방이 두 군데 있기는 해요. 가치 없는 책들을 모아둔 방이죠.”
피소가 저주받은 방이라고 안내한 곳은 최하층 끄트머리의 음습한 방이었다. 수도원이 책을 없애려고 수고하지 않아도 시간의 이빨에 갉아 먹혀 저절로 파괴될만한 곳이었다. 추저분한 책들이 잔뜩 울고 곰팡이 슬어 있었다. 피소도 간만에 다시 와보는 방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방에 들렀을 때는 이렇게 형편없지 않았다. 그는 건사하지 않은 책들의 방이 자신의 나태로 인해 망가진 것 같아 낯간지러웠다.
“귀하고 오래된 책들이 널린 방도 수두룩한데, 굳이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를 모르겠네요.”
피소가 괜스레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책 한권을 들었다. 책갈피를 쏠아 먹던 좀 벌레들이 오글오글 기어 달아났다. 피서는 집었던 책을 쓰레기처럼 쌓여있는 책의 더미 위로 내던졌다.
도리도 찾던 자료가 여기에 반드시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피오니어에 관련하여 실낱같은 단서라도 비치면 어디든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도리는 알려지지 않은 피오니어의 모든 게 궁금했다. 두고 보던 국희가 귀동냥으로 들었던 헤르쿨라네움의 피오니어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로 흘렸었다. 헤르쿨라네움은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매몰된 고대도시였다. 국희는 그곳에 살았던 라술이란 이름의 서정 시인이 피오니어 연대기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도리는 국희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지 않았다. 쉬켄까지 내처 달려온 것은 쉬켄의 유명한 서가에서 라술의 글귀를 한 줄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게다가 테러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쉬켄의 협력도 필요한 터였다. 국희와 루루, 그리고 도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피오니온 모체와의 접선에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셋이 팀을 이루고 피오니온 모체와 분리된 채 개별적으로 행동해왔었다. 테러를 진압하려면 쉬켄은 물론이고, 카라와 트래시모리의 협조도 중요하다는 게 셋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서 도리는 겸사겸사 자진해서 쉬켄으로 온 것이었다. 국희와 루루는 지금 카라의 동향을 살피고 있을 터였다. 트래시모리는 근래에 행적이 묘연하여 접촉하기가 어려웠다.
“위대한 걸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고대 시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에 관련된 자료를 찾는 중입니다.”
도리가 바닥에 들러붙은 썩은 양피지 조각을 들추며 말했다.
“시인요?”
“헤르쿨라네움에서 화산재에 매몰된 시인입니다.”
“그거 나폴리 만의 베수비오 화산 아닌가요?”
“네, 베수비오.”
“혹시, 그 시인 이름이 라술인가요?”
도리는 피소가 고대 시인의 이름을 말했을 때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라술을 아시나요?”
“미치광이 시인이잖아요.”
“라술을 알고 있군요? 지금 라술의 책은 어디에 있나요?”
도리는 평정심을 잃고 덤벼들듯이 물었다.
“아......, 그걸 어디에서 봤더라......, 기억이 날듯 말듯 가물가물 하네.......”
피소는 고상한 척하던 도리가 호들갑 떨며 반색을 하는 모양이 우스웠다. 그는 도리를 골탕 먹일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근데, 그런 허무맹랑한 책을 구하려고 이런 궁벽한 오지를 밤새 달려왔다는 건가요?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피소는 변수였다.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도리의 실수였다. 피소가 라술의 책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내용까지 품평하고 있었다. 더럽지만 도리는 피소의 똥구멍을 긁어줘야 했다.
“아무리 졸작이라도 폐기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쉬켄의 숭고한 정신은 유명하지요. 그 은혜로움을 몸소 체험하고 싶은 욕심에 죄송하게도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도리의 체면치레의 말에 명색이 수도자인 피소는 다소 머쓱해졌다.
“라술이란 작자는 불경한 책을 남겼어요.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될 책이에요.”
도리는 피소가 옹졸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외곬수이기도 한 답답한 군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로 반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희귀한 책을 한번 보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뿐이죠.”
피소는 처음부터 라술의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참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하더니 무릎을 탁, 치고 이제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이제야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났네. 내 방에 있어요. 그거.”
“당신의 방?”
“네, 그럴 걸요. 그거, 삽화가 아름다웠어요. 눈길을 확 잡아끄는 마력이 있더라고요. 겉만 보고 재미있는 우화인 줄 알았지 뭐예요.”
도리는 피소의 방에 있었다. 책보만한 채광창으로 나른한 햇빛이 비껴들고 있었다. 빛살이 피소의 낡은 책상 위로 떨어졌다. 도리는 책상에 앉아 말린 파피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술의 문서였다. 피소가 저주의 방을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 그곳에서 그림이 멋진 두루마리 너덧 개를 들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 틈에 라술의 책도 묻어 나왔다. 피소는 침대 아래를 뒤져 먼지투성이의 두루마리들을 끄집어내었다.
“보는 것은 자유지만, 당신의 눈은 더러워질 거예요.”
방문을 닫고 나가면서 피소는 악담을 토해놓았다. 도리가 혼자서 편한 마음으로 읽어보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피소가 자신의 깜냥으로 그래도 아량을 베풀었다. 도리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인류의 비극에 관한 논고라는 표제로 시작하는 라술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곰팡이 슬어 문드러지고, 갈라져 뜯겨나간 데가 여러 군데 있었다. 도리는 살아남은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더듬더듬 판독해 나갔다.
.......인류의 후대들이여,
가없는 하늘과 빛나는 별들 아래 목숨 가진 모든 종족들이여,
수태하는 요정들이 부드러운 입김을 금실처럼 흩뿌릴 때라면,
당신들에 의해 말해진 것들에 주의하기를 기억하라.
모든 말들은 필멸의 존재들을 찬란한 광휘로 휘감아 전부 드러났으니,
생명의 횃불을 치켜들고 행진하는 아홉의 무사(mousa) 여신들의 담대함을 보아라.
가시덤불을 헤매다가 뒤흔들리는 불길에 불태워질 비운의 정령들과 타락한 사도들이여,
뱀을 저주하는 종족들의 비참에 대해 노래하다 죽을 마지막 달빛을 쬐어라.......
라술의 저술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두루마리 한쪽에는 추상적인 삽화들이 대목마다 그려져 있었다. 피소의 눈길을 잡아끈 그림들이었다. 원색의 강렬한 색채와 원근을 무시한 입체 도형 무늬들은 그럴 만했다. 안료가 죄다 떨어져나간 삽화들 가운데 유난히 자주 보이는 도안이 눈에 띄었다. 정오각의 검은색 별 모양이었다. 그것의 크기는 천차만별이었는데, 두루마리의 여기저기에서 낙서처럼 보였다. 라술의 문장을 읽던 도리가 검은색 별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별의 중앙에 눈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의 눈동자는 도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어떤 것의 매서운 눈이었다. 훗날, 피오니어의 상징이 될 눈이었다. 후대의 피오니어에게 남긴 선대 피오니어인 라술이 남긴 메시지의 응축이었다. 검은 별 속의 전시안은 멸종의 어둠에 휘덮인 지구를 선각의 눈동자로 구원하려는 피오니어를 말해주고 있었다.
피오니어였던 라술은 피오니어의 연대를 말하면서, 예수와 석가모니, 마호메트와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도 피오니어였다고 진술하고 있었다. 피오니어는 인류에서 진화한 초인류의 새로운 종족이었지만, 언제나 인류의 편에서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해 왔다고 라술은 적고 있었다. 라술은 동족을 찾고 싶다면 인류를 위해 공헌하는 천재들 중에서 피오니어를 찾아보라고 했다. 피소가 라술의 저술을 읽고 분개한 것은 이 대목에서였다.
라술은 인류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었다. 다소 현학적으로 풀어서 말하고 있으나, 요지는 인류는 자신들도 억제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너무나 끔찍한 멸종을 초래한다는 거였다. 환경 파괴나 외계인 침략 같은 언급은 없었다. 라술은 인류 스스로의 본성으로 자폭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라술의 예언은 선대 피오니어답게 적중했다. 그리고 라술은 말했다.
.......이것은 손바닥 안의 십자손금이 아닐지니,
우리 모두는 엄밀한 육방(六方)의 작용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
압도하는 공허의 광장에서 도피하는 지성의 빛이여,
돌아보라, 공포에 마비되는 고통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도처에서 음울한 소등나팔이 울리면 황금날개 투구를 쓰고 깨어날지니,
정결한 심장을 오르쿠스의 무덤에서 파내어 태양 볕에 내다 말려라.
맹목적인 입맞춤으로 성난 야수들을 되돌아올 수 없는 강가로 몰아야 할지니,
이것이야말로 빛나는 성좌들을 헤아리는 정통 선각자(pioneer)로서의 총체이다.......
도리는 두루마리를 말았다. 훼손이 심하여 온전히 판독할 수 없었다. 채광창으로 비껴들던 햇살은 이제 방안으로 가득 퍼져있었다. 라술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도리는 곰곰이 생각했다. 도리에게 라술의 울림은 너무나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