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퍼진 따스한 열기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서 찬 공기에 얼어있던 몸을 기분좋게 녹여주며 잃었던 의식을 되찾게 만든다. 눈을 뜨게 되자 가장 먼저 마주친 낯선 천장. 이든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난로와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진 방 안은 썩 밝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앞을 보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고, 침대와 콘솔, 티 테이블과 쇼파 등 가구가 모두 진한 월넛색으로 통일되어 어두운 실내와 잘 어울린다. 방은 혼자 쓰기에는 꽤 넓은 편으로 이든의 작은 방보다 최소 두배는 더 클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넉넉함은 오히려 이든에게 있어 낯선 곳에 대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소가 되고 말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그리고 누가 날 데려왔을까? 이든은 떠오르는 의문에 대한 그 어떤 실마리도 얻을수가 없어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다.
"깨어났군."
불쑥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방문 근처에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왠 길쭉하니 키가 큰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건장한 체구를 온통 새카만 망토로 뒤덮은 그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둠에 파묻히고 싶어하는 듯한 제 옷차림과는 달리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머리가 매우 눈에 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이르게 새어버린 백발, 날카로운 눈매와 파란 눈동자는 마치 얼어붙은 겨울 호수처럼 보였으며, 각진 턱선은 꽤나 녹록치 않아보이는 성미를 대신 말하는 듯 하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얼굴에 저런 무서운 무표정이라니. 이든은 남자가 풍기는 경직된 분위기에 차마 누구냐는 질문조차 던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런 날씨에, 그것도 야밤에 산에 오르다니... 혹시 죽으려 하는것을 괜히 데려온건가?"
보기만큼 날가로운 언변에 이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얼굴만 보면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격함을 넘어 근엄함마저 느껴질듯한 꾸짖는 태도는 없던 불만까지 만들어 낼 듯 하다. 그러나 남자의 따끔한 쏘아붙임은 오히려 둔해진 이든의 사고 회로를 움직이게 만드는 훌륭한 자극이 되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게 된 이든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질문에 대답한다.
"저... 저는 동생을 찾으러 왔어요."
"동생?"
"혹시 제 동생 못 보셨어요? 이름은 유리이고 14살 남자앤데, 머리랑 눈은 검은 색이에요. 아마 저랑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을텐데..."
이든이 허겁지겁 유리에 대해 설명해보지만 의아하니 말끝을 치켜올렸던 남자의 표정은 좀처럼 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잠자코 이든을 바라보더니 그녀의 말이 끝나자 생각할 여지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일말의 망설임도 섞이지 않은 칼 같은 대답이 이든의 어깨를 축 처지게 만든다. 분명히 유리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든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자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분명 이 근처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여긴..."
이든은 그제서야 자신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러고보니 이 곳은 대체 어디일까? 우선 지금 자신이 있는 방만 보아도 결코 피난용 오두막 따위는 아닐 것임은 확실했고, 아무리 못해도 소위 저택이라고 부르는 그런 수준은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산중에 그런 것이 있었던가? 거의 매일같이 와키 산을 오르내렸지만 이든은 여태껏 이런 집에 대해서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말문이 막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낯선 여자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남자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한 번 대답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럴 때 산을 오르는 생각없는 사람이 또 있다면 그것도 매우 슬픈 일이군."
"유리는 생각없이 그런게 아니에요! 그 앤 제 팔 때문에..."
남자의 비꼬는 어조에 불쾌해진 이든이 발끈하며 제 소매를 걷어올린다. 그런데 어라, 막상 팔뚝을 걷어부쳤다가 놀란 것은 되려 이든 자신이었다. 놀랍게도 몇 주동안 지겹도록 낫지 않았던 팔의 상처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상처는 커녕 작은 흉터조차 없어서, 아마 옷에 남은 핏자국이 아니라면 이든 본인도 자신이 다친 적이 있었는지 아리송할 정도였다. 이든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방금 전 자신이 화가 났던 것조차 잊고 어리벙벙한 얼굴로 팔을 어루만져본다. 아무리 살펴보고 만져봐도 말끔하니 나아버린 상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러데 의외로 그에 대한 답은 이름 모를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
"상처는 없어졌지만 독성이 아직 몸에 남아있어 안정을 취해야 될 거다. 최소 눈보라가 그치기 전까지는 여기서 얌전히 있는게 좋을거야. 죽고싶지 않다면 말이다."
"네...?"
남자의 말에 이든이 큰 눈을 얼떨떨하니 껌뻑거렸다. 그러고보니 수시로 상처 근처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이든은 무심하게 돌아서는 남자를 다급히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어... 다, 당신은 누구세요? 이건 그쪽이 치료해주신 건가요?"
`아무리 봐도 의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속내는 차마 완전히 털어놓지 않았지만, 남자는 아마 이든의 목소리에 녹아있는 놀라움과 의심스러움을 읽어낸 것 같다.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려 흘겨보듯이 자신을 쳐다보자 괜히 어깨가 움찔하고 들썩인다.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하지만 아주 짧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쟝. 그게 내 이름이다."
"쟝...? 저... 여기는 어디죠? 와키 산은 맞는건가요? 전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곳을 본 적이..."
하지만 쟝은 그 밖의 다른 질문에는 그다지 답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는 잠시 아무말도 없이 이든을 바라보더니 그녀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돌려준다.
"죽고 싶지 않다면 절대 탑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식사는 때가 되면 갖다주겠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침대 옆의 벨을 당기도록."
반박은 전혀 허용하지 않을 엄격한 경고를 마지막으로, 쟝은 커다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쟝의 말처럼 정말 몸에 독성이 남아있던 것인지, 상처는 없어졌지만 막상 움직이려고 하자 현기증이 나서 이든은 결국 다시 잠을 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 정신이 들어보니 벽난로 옆 테이블에 아까는 없었던 쟁반과 그릇이 놓여있다. 그가 다녀간 것일까? 전혀 그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이든은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머뭇거렸지만 음식을 보자 급격히 느껴지는 허기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결 몸 상태가 나아지자 이든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곰곰히 되짚어본다. 유리는 대체 어디 있을까. 정신을 잃기 전 분명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 죽어가는 조그마한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 유리가 확실했다. 남매는 예전부터 우애가 좋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이든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에 어릴 적부터 동생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고, 유리는 그런 누나의 말이라면 군말없이 잘 따랐다. 몇 년 전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난 뒤 남매는 각자에게 유일한 가족이었기에 더더욱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런 동생의 목소리를 이든이 알아듣지 못할리가 없었지만, 정작 쟝은 유리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
쟝. 온몸을 어둠속에 꽁꽁 숨기다시피 한 그 남자.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그는 대체 누구일까. 그는 얼어죽을뻔한 자신을 구해주었고 상처를 치료해준데다가 눈이 그칠 때까지 머무를 수 있게 해주었으나, 무턱대고 고마워만 하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이 수상했다. 여지껏 본 적은 커녕 소문조차 들어본 적도 없는 산 속의 저택. 흉터조차 남지 않고 말끔히 사라진 상처. 그리고 절대 이 방을 벗어나지 말라는 밑도 끝도 없는 경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다.
막연한 불안감은 결국 불신과 억측을 낳는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든은 갈수록 불안해져서 잠자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저 남자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나를 잡아두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반대의 입장 역시 지지않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가 남의 선의를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과 양심의 쟁쟁한 힘겨루기가 이든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큰 결심을 한 듯, 이든이 조심스럽게 몸 위를 덮고있던 이불을 걷어내더니 두 다리를 바닥에 디뎠다. 이제 겨우 침대를 벗어났을 뿐인데 가슴은 벌써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다. 침대에서 문까지 걸어가는 길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소리없이 문 앞까지 다다르는데에 성공한 이든은 긴장된 표정으로 문고리에 손을 가져간다. 천천히 힘을 주어 문고리를 비틀자 방문은 순종적으로 틈을 벌려주었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진한 망설임이 엿보인다. 이든이 호기심과 두려움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그 때, 온 몸의 털을 거꾸로 세울듯한 찌릿함이 급격히 저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온다.
"누나..."
동상처럼 멈춰버린 이든의 모습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빗겨간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튀어나올듯이 커다랗게 확장된 눈에는 소스라치듯 놀란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그 놀라움의 일부가 반가움으로 모습을 바꾸더니 곧 이든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유리? 유리야?"
"살려줘..."
분명히 유리의 목소리다! 비록 그 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아까 들었던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가까이서 들려와 망설임을 말끔히 몰아내버린다. 이든은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문을 열어제꼈다. 방문은 방금 전 이든의 마음 속 저울질을 무색하게 만들정도로 쉽게 열리며 그녀를 허락되지 않은 구역으로 안내한다. 눈 앞에 펼쳐진 복도는 창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을 제외하면 아무 조명도 없어 어두웠고, 딱딱한 돌벽과 어두운 나뭇바닥에는 싸늘함이 가득했다. 이든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머뭇거렸지만, 그 때 마침 다시 들려오는 유리의 신음소리에 무작정 발을 내딛었다.
"유리! 어디야? 어디에 있어?"
좁은 통로를 돌면서 방문이란 방문은 죄다 열어봤지만 이든이 있던 곳을 제외한 다른 방들은 거의 다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사람은 커녕 개미 한마리도 보이지 않자, 이든은 결국 아래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탑의 모양을 따라 여러번 꺾인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방금 전 복도와는 달리 널찍한 홀과 커다란 현관이 나타난다. 아마 여기가 1층인 모양인데 역시나 무슨 장식이나 그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수수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지금 이 곳의 치장 상태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이든은 미친 사람처럼 사방을 헤매이며 유리의 목소리를 쫓고 있었다.
"추워..."
울먹이는 동생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등을 내리친다. 찰나의 머뭇거림도 견뎌낼 수 없는 조급함이 마음을 지배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발은 차마 생각처럼 날렵하게 움직이지를 못한다. 이든은 무작정 발닿는대로 나아가다 문득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기에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또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방향도 그쪽이 아니다. 피부를 뚫고 뼛속을 메울듯한 시린 느낌에 몸을 떨던 이든이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움직인다. 평소 같다면 피하기 바쁠 찬바람이지만 본능은 무슨 이유인지 그것을 쫓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홀 안쪽으로 뚫린 복도를 걷는 신중한 발걸음이 한발한발 보이지 않는 자취를 남기고, 직사각형으로 뚫린 입구를 지나자 거기에는 커다란 2개의 문이 마주보고 있다. 하나는 굳게 닫혀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살짝 열려 있어, 이든은 그 열린 틈새를 살펴보다가 인기척이 없자 슬며시 안으로 몸을 들여놓는다.
방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까지 닿을만큼 커다란 책장과 거기에 가득 찬 책들이었다. 두꺼운 가죽 커버의 서적들은 딱 봐도 비싸보였고 속에는 어려운 내용을 품고 있을듯하여 쉽사리 손을 대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책장 앞에는 커다란 원목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펜과 종이를 비롯한 필기구 몇 가지 놓여 있다. 깔끔하게 정리되었지만 오래된 손때가 묻은 것을 보니 아마 이 방은 아주 예전부터 누군가가 사용해 온 것 같다. 그 누군가란 바로 쟝일 것이다.
하지만 서재에는 쟝은 물론 유리도 보이지 않았고 또한 그리 춥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곳은 맞은편 문 뿐이다. 이든은 조용히 물러나온 뒤 방문을 닫았다. 서재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문 앞에 다가서는 순간, 이든은 곧 아까 느꼈던 그 얼어붙을듯한 냉기가 바로 이 뒤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얼마 안가서 또 나타나는 새로운 문. 그러나 그 문은 방금 전에 있었던 것보다 훨씬 작고 투박하게 생긴 철문이었다. 비록 그 크기는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만큼 작았지만 얼마나 두꺼운지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이든은 온 힘을 실어 한참을 끙끙댄 후 겨우 열 수 있었다.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아래가 먹이를 기다리는 하마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다. 땅 아래로 난 좁고 가파른 돌계단은 몹시 어두웠지만 저 끝에서 빛이 새어나와 겨우 그 모양을 분간할 수 있었다. 이 아래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 긴장감이 역력한 검은 눈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그 발을 뻗으려는 그 순간, 또 다시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나..."
그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확실히 더 가까이서 들려오자 이든은 무서움도 잊고 구르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그런 그녀를 널찍한 지하실이 양 팔을 활짝 벌리며 맞이한다. 1층의 홀만큼이나 커다란 지하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땅 위의 공간들보다 훨씬 더 밝아보였다. 그러나 그 빛은 횃불이나 다른 조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가득 새겨진 커다란 금색 문양. 무엇으로 그린건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원 안에 수많은 선과 도형,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가득찬 그것은 메우 복잡하고 정교해보였고, 잔잔하면서도 환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낯설지만 신기했고, 또한 아름다웠지만 선뜻 가까이 하기가 두렵다. 하지만 곧 그 위에 있는 존재를 발견하자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금새 그 힘을 잃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비명소리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
지하실 바닥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유리가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