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쟝의 뒤에 따라붙으며 방을 나서는 이든의 얼굴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엿보였다. 어제 워낙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보았던 터라 마치 처음 와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쟝을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런데... 방에서 나가도 괜찮아요?"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방에만 쳐박혀 있으라고 한 건 아니다."
두 사람은 나선형 계단을 돌아서 1층 홀을 지나 안쪽에 있는 두 개의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이든은 어제의 그 장소를 보고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단호하게 닫혀있는 왼쪽 문은 지하실로 연결되는 그것이었다. 저 아래에 유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몸 안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분이 든다. 그건 유리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어봐도 요동치는 마음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자꾸만 목이 졸리던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올라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쟝은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몇발짝 뒤에서 이든이 머뭇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괴로운 감정에 발이 묶여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던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잠시 입술을 벌리다가 곧 멈추었고, 말없이 이든에게 돌아가서 한 손으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쥔다. 이든은 움찔거리며 쟝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를 안으로 데려갈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쟝의 묵묵한 행동은 오히려 여러가지 말보다 훨씬 더 위안이 되었다. 이든은 다행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재 안으로 들어선다.
책으로 가득찬 서재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쟝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자 이든의 관심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린다. 그가 꺼낸 것은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나무 상자로 밋밋한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없어 매우 단촐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꺼내는 손길은 매우 귀중한 물건을 다루는 듯 아주 신중하다. 쟝은 상자 뚜껑을 열면서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고, 그걸 본 이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쟝은 그녀가 제 옆으로 오자 상자 안의 물건을 들어올려 붕대가 감긴 자신의 왼손 위에 걸치듯이 내려놓았고, 그녀는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물건을 보고 두 눈이 동그래져서 말한다.
"이건... 목걸이잖아요?"
가느다란 금색줄에 매달린 빨간 펜던트가 도발적으로 반짝인다. 화려한 세공이나 장식은 없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묵직하게 느껴지는 검붉은 광택.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듯한 그것은 어떠한 목석이래도 홀리고 말 것처럼 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보석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는 이든에게도 매우 값나가는 물건처럼 보였다.
"그건 마공석이다. 마법을 유형화시켜 보존하기 위해 만든 물건을 마공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보석의 형태를 한 것은 마공석이라고 하지. 거기에 담긴 결계마법이라면 어지간한 공격은 튕겨낼 수 있을거다."
"결계..."
이든은 '결계'라는 단어에서 오는 단절된 느낌에 괜히 긴장된 듯 얼굴이 굳었다가 불쑥 목걸이를 내미는 쟝의 행동에 표정을 무너뜨린다. 의외의 물건에 이어 의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있던 그녀는 얼떨떨하니 물었다.
"어... 이걸... 어떻게 하면 되죠?"
"...목걸이를 보통 어디에 쓴다고 생각하나?"
"목에 걸죠, 보통은..."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쟝이 핀잔을 주듯이 대답하자 이든이 엉거주춤하니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탑은 마력으로 가득찬 곳이라 마법사가 아닌 보통 사람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2층의 그 방은 마력을 침투하지 못하게 결계를 쳐두었지만 악령에게서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더군. 그래서 더 강한 것을 쓰려는거다."
그제서야 이 목걸이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게 된 이든이 고개를 끄덕인다. 범상치 않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고작 이런 작은 것에 그런 마법이 담겨있다니. 이든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들어 잠금 고리를 풀고 목 뒤로 가져간다. 하지만 뭔가 여의치 않은 듯 한참을 불편한 자세로 꿈틀거리다가 결국 슬그머니 쟝을 올려다본다.
"저... 이거 좀..."
"뭐지?"
눈치껏 알아들어주면 좋으련만 이 남자에게 그런 센스는 없는 것 같다. 이든은 민망한 미소와 함께 조심스레 부탁했다.
"이것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평소에 이런걸 해본적이 없어서..."
나름 큰 맘 먹고 한 부탁인데 가자미 눈이 되어 쳐다보니 더욱 면목이 없다. 그렇지만 더욱 황당한 것은 사실 쟝이었다.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을 들어보인다.
"본인이 해놓고 잊은건 아니겠지?"
"아..."
이든은 헛점을 쿡 찌르는 질문을 받고 얼버무렸지만 이미 두 사람 다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쟝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한숨과 함께 이든의 손에서 목걸이를 도로 가져와서는 가볍게 턱을 옆으로 움직였다. 이든이 얼른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후다닥 뒤돌아서자 긴 오른팔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녀의 얼굴을 돌아 목 뒤로 왔다. 쟝은 용케 불편한 손으로 금방 고리를 채운 뒤 투덜댄다.
"참 손이 많이 가는군."
"하하..."
괜히 쇄골 근처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이든이 멋쩍게 웃더니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쟝의 얼굴이 확 굳더니 그 표정을 감추려는 듯 후다닥 고개를 돌린다. 그는 매정하게도 당황스러워 하는 이든의 시선을 외면한 채 툭 던지듯이 말한다.
"...그럼 이제 나가봐."
**
요리에 취미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쟝이 가져다주는 식사는 하나도 나무랄데가 없었다. 빵은 따뜻했고 계란은 부드러웠으며, 베이컨은 적당하게 익어서 맛도 모양도 딱 좋았다. 이든이 플레이팅마저 그럴듯한 아침식사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쟝은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의 흥을 깨뜨렸다.
"오늘 밤이다."
무엇이 오늘 밤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든의 경직된 얼굴은 그녀가 쟝의 말 뜻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보름달이 뜨는 밤. 그리고 유리에게 씌인 악령을 없애는 날이 바로 오늘 밤이었다. 이든은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제가 도울만한게 없을까요?"
"얌전히 있는게 도와주는거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에 차마 반박(?)할 여지조차 없다. 하긴 마법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자신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든은 뒷목을 짓누르는 무력감에 고개를 떨귔다가 문득 쟝의 손에 대해서 떠올리고는 아차해서 다시 물었다.
"그러고보니 손은 어때요?"
"괜찮다."
"좀 보여주세요. 약을 새로 발라야 될 거에요."
"신경쓸 거 없다."
"상처가 그렇게 컸는데 무슨 소리에요? 그리고 제 때 소독하지 않으면 덧날수도 있단 말이에요."
이든이 하도 성화를 부리며 쟝의 소매를 붙들자 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엿보인다. 마법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왼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그러자 검은 장갑과 대비되는 길고 하얀 손등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어제 감아두었던 붕대는 찾아볼수가 없자, 그것을 본 이든의 눈꼬리가 매섭게 위로 치켜올라갔다.
"벌써 풀었어요? 그러다가 벌어질수도 있..."
걱정스러운 질책은 그녀가 쟝의 손바닥을 뒤집어 보는 순간 홀연히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분명 어제 손을 두동강 낼듯한 자상이 있었는데 오늘은 온데간데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길게 남겨진 진한 흉터만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이든은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어리둥절해서 쟝의 손을 어루만져본다. 아무리 좋은 약을 발랐다고 하더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나을 수는 없었다. 쟝은 이든의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 그제서야 진상을 털어놓았다.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독기때문에 흉터는 남았지만."
이든은 자신의 팔을 낫게한 것이 바로 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민망함에 할 말을 잃었다. '괜찮다'는 쟝의 말은 예의상의 거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든은 어물쩡 쟝의 손을 놓더니 한숨과 함께 사과를 건넨다.
"미안해요. 괜히 제가 귀찮게..."
"지혈에 도움은 되었으니 미안해할건 없다."
괜찮다는 대답은 들었지만 밀려오는 허탈함은 쉽게 없어지지를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유리를 쟝에게만 떠넘긴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쓸모없는 오지랖이었다는 것을 알고나자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든은 짐짓 괜찮은 척 웃어보였다.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그렇게 치료와 관련된 해프닝은 잘 마무리되는듯 했으나 둘 사이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껄끄러웠다. 쟝은 짐짓 모른척 갑자기 화제를 돌린다.
"식당과 부엌은 1층 왼쪽 복도를 따라가면 있고, 그 반대쪽 복도로 나가면 정원이 있다."
"네?"
"약초나 몇가지 심어두고 말았지만 잠시 바람이라도 쐬기엔 나쁘지 않을거다."
느닷없이 탑의 지리를 설명하는 쟝을 보는 이든의 시선에는 의아함만 가득하다. 쟝은 그제서야 뜬금없이 탑의 구조를 설명했던 이유를 밝혔다.
"오늘은 너 혼자 지내야 하니 미리 탑의 지리를 알려주는거다."
"저 혼자요? 그럼 쟝은요?"
"오늘은 하루종일 서재 아니면 지하실에 있을거야. 정 필요한게 있다면 불러도 좋다만, 해가 지고나서는 지하실에 있을거라 아마 불러도 못 들을거다."
쟝은 귀찮아하는듯 하면서도 차근차근 대답해주었지만 이든의 얼굴에는 아까부터 자리잡은 실망감 같은 것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 깐깐한 남자는 차마 그런 풀이 죽은 표정을 외면할만한 성미가 못 된다. 동정심이나 안타까움은 둘째치고 왜 그녀가 이런 얼굴을 하는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라도, 쟝은 이든에게 왜 그러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하지만 이든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입을 꾹 다문채 말이 없다. 방금 전 상처를 살펴보자며 손을 요구하던 당찬 기색은 온데간데 없이 그녀는 수줍음이라도 타는 마냥 바닥만 쳐다보더니, 슬슬 쟝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도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뭐?"
반사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 이든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든은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걱정돼서요. 유리도 그렇고, 쟝도..."
겨우 말을 꺼내긴 했지만 스스로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잘 알기에 면목이 없다. 자신이 곁에 있는다고 해서 유리에게는 물론 쟝에게도 도움이 안 될 것임은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황당하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쟝의 표정을 보자 이든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괜히 쓸데없는 소릴..."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라리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면 덜 민망할 것 같은데 되려 아무 말도 없는 쟝의 침묵은 이든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난처한 기색이 가득한 갈색 눈이 어딜 봐야할지 모르고 방황하다가 결국 바닥으로 추락하던 순간, 아주 무심하게 툭 건네오는 뒤늦은 대답이 힘없이 땅으로 향하던 그녀의 턱을 위로 끌어당겼다.
"자정 전 서재로 내려와라."
"네...?"
생각지도 못했던 쟝의 반응에 깜짝 놀란 입술이 다물어질줄을 모른다. 그러나 이든과는 달리 쟝은 매우 덤덤해보였다. 화는 커녕 평화롭게 보일 정도로 무덤덤한 그의 표정은 정적이다 못해 아예 감정을 완전히 죽인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틈도 없이, 쟝은 또 한 번의 무심한 당부와 함께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이든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하실은 추울테니 외투를 입고 오는게 좋을거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