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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Black Magician
작가 : 박티티
작품등록일 :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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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악령(7)
작성일 : 18-12-01     조회 : 289     추천 : 0     분량 : 7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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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한 시간이 되어 지하실에 들어선 순간, 이든은 왜 쟝이 외투를 권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해가 닿지 않는 지하실이라고 해도 숨을 내쉬면 허옇게 입김이 서릴 정도라니.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절로 목과 어깨가 움츠러들고 두 손을 팔 아래로 숨기게 되는 이 차가운 냉골은 차라리 바깥이 더 따뜻하게 여겨질 정도로 추웠다. 그러나 그 추위에 놀라는 것도 잠시, 저 안쪽에서 흰 천에 덮인채 누워있는 유리를 보자 열이 오르는 듯 볼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쟝은 유리에게로 다가가 천의 귀퉁이를 잡아들었다가 잠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든을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가슴 한 쪽을 꾹 누르고 있었다.

 ​

 "볼 자신이 없다면 지금 돌아가라."

 ​

 쟝의 말에 이든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오는가 싶었지만 곧 다시 차분히 가라앉는다. 고작 겁이 난다는 이유로 유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차분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괜찮아요."

 ​

 이든을 쳐다보던 파란 눈이 잠시 그녀에게 좀 더 머물다가 다시 앞으로 되돌아간다. 쟝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서서히 천을 걷어내자 가려져있던 유리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이든은 쟝이 말했던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의 뜻을 그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사흘 전 이미 생기를 잃었던 피부색은 이제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눈과 볼은 움푹 패여서 뼈만 남은 수준이었으며, 가뜩이나 마른 몸뚱아리는 더더욱 말라 비틀어져 툭하고 건드리면 그대로 바스라질듯이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든은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쟝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

 "​악령을 소멸시키기 전 녀석을 네 동생의 몸에서 떼어낼거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 때 절대로 끼어들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너까지 위험할수도 있어."

 ​

 엄중한 당부에 이든이 긴장감을 실어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물러나자, 마법사는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는 양 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두 손을 앞으로 들어올려 손바닥이 바닥을 향하게 한다. 잠시간 이어지는 어두운 정적. 그러나 아래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금색 빛이 지하의 적막함을 밀어낸다. 아무것도 없던 돌바닥 위에 쟝을 중심으로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나타난 그 선들은 느릿한 등장과는 달리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그려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마법진이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으로 셀 수 있을 것 같았던 선들이 수십개로 나눠지고 분열하여 동시에 다양한 도형과 자잘한 글씨로 변화하는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마법진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적은 없었던 이든은 그 신비로운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여태껏 살면서 접할 일이 없어 마법이라는 건 다른 세상 이야기겠거니 생긱했던 탓인가. 이렇게 두 눈으로 실제로 보고 있는데도 도통 믿기지를 않는다.

 ​

 이든이 감탄하는 사이 마법진은 빠르게 완성되자 쟝이 서서히 눈을 뜬다. 마법진이 완성된 것을 확인하자 그의 손이 망토 안의 허리춤으로 사라졌고, 그것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든의 두 뺨이 경직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지난번에 쟝이 스스로 자신의 손을 그었던 그 단도였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번개처럼 스쳐지나간 순간, 안타깝게도 그 예감은 현실이 된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날카로운 칼날은 아주 당연하게 쟝의 손바닥을 갈랐고, 그 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붉은 피가 살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하지만 쟝은 이미 이런 일이 익숙한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피가 차오르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손바닥 안에 피가 어느정도 고이자 쟝은 앞으로 발을 내딛어 유리에게 다가갔다.

 ​

 생기가 없는 몸뚱아리 위에 뜨끈한 생명이 떨어져 빨갛게 수놓이고, 뭐에 홀린듯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든의 흐릿한 눈빛에 갑자기 번쩍하는 광채가 빛났다. 방금 분명 유리의 손 끝이 꿈틀거렸다! 헛것을 본 것인가 싶어 고개를 부르르 떨고 눈을 비벼보지만 다시 한 번 꿈틀.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좀 더 크게 움직였다. 두 눈은 무섭게 부릅뜨여 있었지만 초점이 없는 것을 보니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듯 했고, 바짝 말라붙은 거무죽죽한 입술이 위태롭게 달싹인다.

 ​

 "몸... 몸을... 몸을 돌려줘..."

 ​

 살아있는 자의 피냄새가 그를 깨웠다. 생명에 목말라하는 쩍쩍 갈라진 목소리는 안타까우면서도 기괴했다.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채 오로지 본능과 욕구만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혀를 낼름거리는 탐욕스러운 모습. 끔찍하다 못해 위협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쟝은 물러서기는 커녕 한 술 더 떠 상처입은 손을 꾹 움켜쥐어 출혈을 더욱 심하게 만든다. 주먹쥔 손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피가 유리의 혀에 닿는 순간, 그의 몸뚱이가 더욱 역동적으로 반응했다.

 ​

 "일어나라. 네가 원하는 몸이 여기 있다."

 ​

 쟝의 중얼거림에 흐린 동공이 천천히 자신을 깨운 남자를 발견하자 급격히 커지며 번뜩거린다. 두 팔이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쟝이 그의 목덜미를 콱 잡아 눌렀다.

 ​

 "큭...!"

 ​

 유리가 눈을 희번덕하니 치켜뜨고 거칠게 몸부림친다. 그의 탁한 흰자에는 까만 핏줄이 잔뜩 서 있었고, 쟝의 손을 할퀴려는 손톱은 다 부서져 그 끝이 엉망이다. 그는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몸을 구걸한다.

 ​

 "몸을 줘...! 새 몸을...!"

 ​

 유리가 비명을 지르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의 팔은 마치 땅에 박힌 말뚝처럼 단단해보였고, 유리를 노려보는 눈빛은 그 무엇보다 단호했다. 유리의 반항이 심해질수록 쟝 역시 더더욱 그의 목을 무겁게 짓눌러서, 마치 도망치려는 산짐승의 발을 점점 더 파고드는 덫처럼 보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격렬하던 몸부림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육체를 구걸하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끔찍한 저주와 욕지거리로 변해 있었다. 이든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처참하게 망가진 유리를 더 이상 지켜볼수가 없었던 것이다. 쟝은 유리의 저항이 어느정도 가라앉자 낮은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러자 바닥에서 잔잔하게 빛나던 마법진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

 "빌어먹을... 죽일거야... 죽여버릴거야...!"

 ​

 악에 받친 목소리는 쟝을 향해 있었지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이든의 마음이다. 마음이 아프다. 아니, 아프다는 말로 이 기분을 완전히 표현이나 할 수 있을까. 이든은 그저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법진은 이제는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동시에 유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같은 것이 슬금슬금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쟝의 얼굴에는 옅게 화색이 스쳐 지나간다. 드디어 악령이 유리의 몸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깊고 끈질긴 욕망만큼 악령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울먹이며 사정하고 있었다.

 ​

 "제발... 살려줘... 죽기 싫어..."

 ​

 유리의 목소리가 흐느끼자 이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저건 유리가 아냐. 저건 유리가 아니야! 마치 저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같은 다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만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유리의 목소리가 자꾸만 귀를 지나 가슴을 후벼파고 들어온다.

 ​

 "누나..."

 ​

 그 때 안타깝게 흐려지는 목소리가 누이의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든은 반사적으로 번쩍 뜨이는 두 눈을 붙잡을수가 없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축 늘어진 유리가 이든을 보고 있다.

 ​

 "살려줘..."

 "유리...?"

 "누나..."

 ​

 그가 한 번 더 자신을 부르자 이든이 저도 모르게 한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그러자 쟝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외쳤다.

 ​

 "속지 마라. 이건 진짜 네 동생이 아니야!"

 "살려줘... 누나... 너무 아파..."

 ​

 머리로는 쟝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슴은 유리의 목소리를 따라가려 한다. 이든은 망설임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불안하게 디뎠던 발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왔다. 그렇지만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자신을 부르는 유리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끊임없이 멤돌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유리는 철이 일찍 들어서 어느 정도 자란 후부터는 어지간해서는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등의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유리가 저렇게까지 괴로워하고 아파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니. 머릿속이 멍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든은 서서히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

 "아파... 너무 아파..."

 ​

 유리가 아파할때마다 날카로운 칼이 제 몸에 푹푹 날아와 꽃히는 것 같다. 안 돼. 더 이상 유리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이든의 머릿속이 급격히 혼란스럽게 뒤엉킨다. 이게 과연 정말 유리를 위한 일일까? 쟝은 그가 겉모습만 유리일 뿐 속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는 했지만 지금 유리는 저렇게 자신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 유리를 눈 앞에서 놓치는 실수를 또 다시 저지르고 있는게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의 그녀 안의 의구심을 점점 키워 커다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쟝은 그녀의 갈등을 알아챈 듯 마법의 시전에 속도를 올렸다. 그가 방금 전에 비해 조급함이 눈에 띄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유리가 다시 고통스러운 소리를 있는대로 내질렀다.

 ​

 "아아아악-!"

 ​

 무시무시한 비명이 끊이지 않더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무언가가 점점 또렷해진다. 처음에는 연기처럼 보이는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진해지며 질감 역시 걸쭉하게 변해갔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끈적한 늪처럼 보이는 그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이 가득 전해져온다. 쟝은 꽉 다문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가 애쓰는만큼 악령 역시 어떻게든 유리의 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허공의 검은 덩어리가 커질수록 그가 지배하는 유리의 움직임도 점점 둔해졌고, 결국 힘을 잃은 고개가 툭하고 바닥에 널부러지며 이든을 본다. 이든은 자신을 향한 유리의 눈동자에 흠칫거렸다. 공허한 검은 동공. 그 눈을 보게되자 이든은 그제서야 유리와의 이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유리는 정말 죽는 것이다. 이게 진짜 유리의 마지막이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내 동생. 이런 모습으로 작별을 고해야하다니. 아아,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

 "누...나..."

 ​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걸까?

 ​

 "싫... 어..."

 ​

 다 죽어가는 눈가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며 흘러내린다.

 ​

 "살려줘..."

 "그만둬요!"

 ​

 눈 앞이 핑그르르 도는 듯한 어지러움과 함께 갑자기 무언가와 부딫히는 듯한 둔탁한 충격이 팔끝에서부터 시작해 상체에 묵직하게 전해져온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이든은 불현듯 선명해진 시야에 깜짝 놀라 겨우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든에게 밀쳐진 쟝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움과 분노가 점철된 파란 시선이 이글거리고, 뒤늦게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성대가 파르르 떨면서 움직인다.

 ​

 "너, 지금 무슨 짓을...!"

 ​

 그리고 그의 말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새카만 악령이 이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이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두 눈을 질끈 감는것뿐, 그 외에는 이제 닥쳐올 고통이나 끔찍한 죽음따위를 상상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덮쳐온 것은 아픔도, 죽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는 포근함이 느껴져 당황스러움에 절로 눈이 뜨였지만, 눈을 뜬 이든에게 보이는 것은 더더욱 의외의 것이었다. 이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망토로 감싼 쟝의 이름을 입술에서 흘리고 말았다.

 ​

 "쟝...?"

 ​

 이든의 팔뚝을 붙잡은 커다란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아귀힘은 단단하다 못해 아플 정도였만 지금 그런 아픔따위에 관심을 줄 틈은 없다. 반대쪽 팔을 허공에 뻗은 쟝의 턱선에서 굵은 구슬땀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이를 악문채 자신의 손 끝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를 따라 눈을 돌려보니, 거기에는 아까 이든을 덮치려던 검은 악령이 울컥울컥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다름아닌 쟝의 상처 속으로.

 ​

 "싫... 싫어어-!"

 ​

 악령은 마치 개미지옥에 빨려들어가는 짐승처럼 잔뜩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숙히 삼켜질 뿐이다. 쟝은 이미 꽤 많은 부분을 흡수한 듯 악령은 아까보다 훨씬 줄어든 상태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 크기가 손아귀 안에 들어올만큼 작아졌을 때, 쟝은 마침내 왼손을 움켜쥐며 악령을 제 안에 완전히 우겨넣었다.

 ​

 "큭...!"

 "쟝!"

 ​

 이든이 허겁지겁 부축했지만 쟝은 쓰러지듯이 주저 앉고 말았다. 악령이 사라짐과 함께 마법진이 사라진 지하는 아까에 비해서 어두웠지만 그 안을 맴도는 공기는 매우 차분하고 고요해서 오히려 아늑하게 느껴진다. 자연스레 안도감이 감돌았지만 반면에 쟝은 한참을 헐떡대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그의 힘겨운 호흡. 이든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쟝을 지켜보다가 피투성이가 된 그의 왼손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자기 손을 가져간다. 그러나 그 손 끝이 닿는 순간, 쟝은 갑자기 거칠게 이든을 밀어내버렸다.

 ​

 "꺅!"

 ​

 느닷없이 밀쳐진 탓에 이든은 딱딱한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듯 넘어진다. 깜짝 놀란 갈색 눈이 한가득 쟝을 담아냈지만 막상 쟝은 그녀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이든에게 등을 돌린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한 숨소리와 함께 들썩이는 어깨. 이든은 알싸한 무릎의 통증마저 알아채지 못하고 쟝의 뒤만 바라본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낮게 끓어오르는 목소리에 실린 엄중한 경고였다.

 ​

 "떨어져..."

 "쟝?"

 "나한테 손대지 마..."

 "네? 하, 하지만..."

 "꺼지라고!"

 ​

 버럭 내지르는 거친 목소리에 이든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평소 상냥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함부로 대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든은 충격이 컸는지 멍하니 쟝을 쳐다본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다 끝났다..."

 "네...?"

 "다 끝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 곳을 떠나라... 네 동생을 데리고..."

 ​

 쟝은 위태롭게 떨리는 손으로 유리를 가리킨다. 그는 아까 짐승처럼 울부짖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조용히 잠들어있었다. 까맣던 피부는 어느새 다시 살구빛을 되찾았고 두 눈은 편안하게 감긴 것이, 어쩌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깊은 잠에 빠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든은 놀란 눈으로 유리를 쳐다보다가 다시 쟝에게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돌렸다. 평온을 되찾은 유리와 달리 그는 지금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의 불안정한 몸짓만으로도 이든은 쟝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

 "장, 괜찮아요?"

 "가..."

 "하지만 쟝이..."

 "네 걱정따윈 필요없으니 제발 꺼져!"

 ​

 듣고서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소리였지만 이든은 차마 거기에 대고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쟝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자신은 한번도 쟝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묵직한 현실에 얻어맞은 그녀는 말을 잃은채 거친 숨을 고르는 쟝을 지켜볼 뿐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

 "다시는...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마라..."

 ​

 마지막 인사라기에는 너무나도 냉랭한 말을 끝으로, 쟝은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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