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든은 쟝이 지하실에서 사라진 뒤 탑을 헤메이고 다녔지만 결국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길 잃은 미아처럼 밤을 새운 후, 그녀는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이제 남은 선택지란 스스로 떠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의 시신을 등에 지고 나서는 귀가길은 몸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이든은 산을 내려오면서 한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몇 번을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도 이든의 머릿속에는 오직 쟝에 대한 것 밖에는 없었다. 쟝은 괜찮은걸까?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진짜 그를 혼자 두고와도 되는걸까? 그러나 이든은 이제 쟝을 걱정할 염치조차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그의 말을 두 번이나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한 탓이다. 만약 그가 시키는대로 잠자코 있었다면, 아니, 처음부터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이든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과 쟝에 대한 미안함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이고, 이든 아니냐!"
마을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놀라서 맨발로 뒤어나왔다. 집을 비웠던 것은 고작 며칠뿐인데 왜 이렇게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걸까. 이든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린은 그런 이든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가야... 이든, 괜찮은거지?"
"네, 괜찮아요..."
아뇨, 할아버지. 괜찮지 않아요.
"이 못난 것아, 며칠이나 안 돌아오길래 우리는 네가 죽은줄만 알았다. 어디 다친데는 없지?"
아니요, 엄청나게 아파요. 그의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어요. 그것도 엄청 많이...
"네... 저는 괜찮아요..."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누구와 있어도 무슨 말을 들어도 이든의 머릿속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왜 그랬을까. 쟝은 왜 그런 짓을 한걸까. 이렇게 된 건 모두 내 탓인데, 어째서 쟝은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목에 감긴 죄책감이라는 사슬이 자꾸만 단단하게 얽혀들어 목소리를 내기가 죽을만큼 힘들다. 목구멍에 매달린 슬픔이라는 추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저 아래로 끌고 내려간다.
"그나저나 이건 뭐냐, 이든? 왠 커다란 짐이..."
살아돌아온 이든을 반기느라 여념이 없었던 사람들이 뒤늦게 그녀가 지고 온 유리를 발견한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든에게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는 않았다. 이든은 자꾸만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으며 유리를 고이 내려놓았다. 엉망으로 뒤섞인 감정과 긴장감, 피로가 한데 몰려와 그녀를 자꾸만 쓰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든의 상태를 알아차린 여인들 몇몇이 그녀를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다준다. 며칠 만에 그새 어색해진 침대에 몸을 누였지만 당장 곯아떨어질것 같으면서도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다. 여인네들은 그런 이든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든, 배는 안 고프니? 먹을 것좀 가져올까?"
"아뇨..."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너라도 무사히 돌아와서 천만 다행이야..."
무사해야할텐데.
자신을 걱정하는 다른 이들의 말에도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그 하나뿐이다.
이든은 쟝의 걱정만 되뇌이다가 결국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눈꺼풀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떠보니 익숙한 공기가 코 끝에 와닿는다. 오래된 책과 해묵은 잉크가 냄새가 가득한 서재는 쟝이 여지껏 수없이 많은 낮과 밤을 보냈던 장소였지만, 이번만큼은 왜 자신이 서재 한복판에 이렇게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과 납덩이 같은 머리. 쟝은 최악의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더듬어 겨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냈다. 이든을 노리던 악령을 막아냈고, 녀석은 피 냄새를 맡고 그것을 쫓아 제 몸 안으로 들어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저지른 짓은 아니었지만 무슨 결과가 따라올지 알면서도 강행했던 일은 맞다. 그는 악령을 스스로 받아들여 함께 죽을 작정으로 제 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이렇게 깨어날 수가 있지? 쟝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자연스레 가장 먼저 살펴보게 되는 왼손의 상처는 처참하다. 더 이상 피는 나지 않았지만 까맣게 변색된 상처는 검고 찐득해보이는 무언가로 덮여 있었고, 거기서 뻗어나온 검은 핏줄같은 것이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스물스물 뻗어나가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도 결코 낙관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고작 이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되었다. 악령이 자신의 몸을 취한지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으면 이미 전신이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아니, 그보다 우선 이렇게 스스로의 자아를 유지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쟝은 어리둥절해서 제 팔뚝만 멍하니 내려다본다. 그는 얼마 전 이것과 똑같은 모양을 본 적이 있었다. 가녀린 목을 물어뜯을듯이 퍼져있던 검은 그물. 이틀 전 하마터면 독기에 먹힐뻔했던 이든이 생각난다. 쟝은 그제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는다.
"설마...!"
쟝은 짧은 외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 책상으로 다가가 펜을 집어들었다. 아직 새 것인지 예리하게 반짝이던 펜촉이었지만, 곧 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에 무지막지하게 쑤셔박는 바람에 금새 피로 물들고 만다. 그러나 쟝은 신음은 커녕 아프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는다. 그는 되려 살에 파묻힌 펜촉에 힘을 주어 더욱 깊숙히 박아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펜촉과 살의 틈바구니에서 검붉은 것이 스물스물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몸 안의 독기가 피와 섞여 나오고 있었다.
"이건..."
펜을 뽑아내고 뻥 뚫린 상처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던 그는 난데없이 서재를 뛰쳐나간다. 마음은 이미 지하실에 있었지만 몸 상태가 순간이동을 구사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긴 다리가 휘청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에 닿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남아있던 것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자신의 단도와 유리가 누워있던 자리의 흔적 뿐, 그 곳에는 산 자도 죽은 자도 그 누구도 없었다. 쟝은 한동안 멍하니 입구에 서서 빈 지하실을 바라보았다.
"이럴수가... 이럴리가 없는데..."
혼란스러움으로 흐트러진 목소리가 진득한 피와 함께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멍하니 선 그의 발치에 핏방울이 고여 아주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려고 할 즈음, 창백했던 쟝의 얼굴이 서서히 흙빛으로 변하더니 분함이 가득한 주먹으로 벽을 때린다.
"젠장... 빌어먹을...!"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터져나오는 분노가 지하실의 돌벽에 차갑게 튕겨나온다. 쟝은 입술을 꽉 깨물며 지하실을 나섰다. 대실패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악령은 도망쳤다. 그것은 분명 이든을 따라갔을 것이다. 쟝은 이제서야 자신이 왜 이든을 대신해 악령을 막아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만은 그런 꼴을 당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만큼은 제 자신을 잃고 썩어 문드러져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 이든을 찾아야했다. 그녀가 위험하다!
"제발..."
가늘게 떨리는 간절한 바람이 쟝의 뒤에 남아 흐드러진다.
**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집 안은 어둡고 조용하다. 창 밖을 보니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해는 모습을 감춘지 오래인 것 같다. 이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때라면 저녁 식사를 하거나 따뜻한 불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도란도란하니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겠지만, 지금 그녀는 배도 고프지 않았고 같이 시간을 보낼 가족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는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할 동생을 부른다.
"유리..."
유리의 이름이 한숨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유리가 없는 집을 보니 동생의 죽음이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이제 완전히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가족을 잃었고, 더 이상 의지할만한,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가 마음에 뻥 뚫린 구멍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 속이 차갑고 시리다. 이제 무엇으로 이 공허함을 메울 수 있을까. 문득 뇌리에 파란 눈동자가 떠올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외로워질 뿐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겠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떨구고 있던 고개를 억지로 위로 끌어올린다. 지금은 유리가 우선이었다. 이제 겨우 안식을 찾은 동생의 마지막 길을 잘 챙겨주고 싶었다. 이든은 억지로 기운을 내어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제 진짜 안녕을 고해야했다.
이든은 대충 옷을 걸친 뒤 집을 나섰다. 유리의 시신은 아마 마을 회관에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예배를 보거나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곳이다. 마음이 허한 탓인지 오늘따라 어두운 마을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하필 거리에도 인적이 하나도 없다. 왠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든은 곧 쓸데없는 의심을 지웠다. 이 시간이라면 다들 집에서 저녁식사 중일테니 길에 사람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회관에 도착해서 문을 열어보니 소리를 내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가 엄습한다. 인기척은 커녕 촛불조차 없는 실내였지만, 이든은 저 안쪽에 놓여진 크고 길쭉한 물건을 용케도 알아보았다.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마주하려니 마음이 더욱 착잡해진다. 이든은 무거운 발길을 옮겨 유리의 관으로 다가간다. 저 안에 누워있을 동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목구멍에 뭔가 커다란 것이 걸린 듯한 기분이 든다.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이든이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뚜껑 없이 열린 관은 계절 탓에 꽃장식도 없어 더욱 외로워보인다. 이든은 몇발짝 남기고 서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관에 누운 유리를 보면 이제 정말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관 안쪽을 들여다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두 개의 갈색 눈동자가 있는대로 크게 팽창한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 뭐지...?"
멍하니 눈을 껌뻑이던 이든은 뭔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벼보지만 아무리 봐도 관은 텅 비어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질문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관을 붙잡은 손가락이 충격으로 파르르 떨리고, 멍하니 벌어져있던 입술에도 그 떨림이 전해진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회관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그 어디에도 유리는 없었다. 그 때 끼익하고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회관 문이 열리며 그녀의 예민한 귓가를 자극한다. 이든이 깜짝 놀라 보니 달빛을 후광처럼 두른 누군가가 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이든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누나?"
유리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제 발로 서서 이든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