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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문
작가 : 이길조
작품등록일 : 201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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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화
작성일 : 16-08-23     조회 : 564     추천 : 0     분량 : 6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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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연연은 이세척과의 미래를 생각하면 화려한 미래가 상상되었다. 사천당가, 청성파, 아미파 등 쟁쟁한 문파들이 즐비한 사천지방에서 하나의 세력을 당당히 이루고 있는 이씨세가였다.

 그리고 그 이씨세가에서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이세척이다. 이씨세가 문주의 아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아랫사람을 부리며 화려하게 사는 자신의 미래가 상상되었다.

 그에 비해 만약 양진위와 혼인을 한다면? 아주 공기 좋은 이곳 산골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게 되겠지. 하지만 임연연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고 자존심도 강했다. 절대 평범한 아낙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처음, 임연연이 양진위를 마음에서 지우고 이세척과 혼인을 하리라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올해가 처음 시작되는 1월에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올해 정월 숭인문에서 작은 경사가 있었다.

 그것은 숭인문의 사형제 중 아홉째인 구대헌이 20세 약관의 나이에 소성(小成)을 달성한 것이었다. 사형제 중 대사형인 탁진형, 그리고 넷째인 양진위, 그리고 일곱째인 장초인 다음으로 구대헌이 소성을 달성한 것이다.

 사문에서 하도 소성을 달성한 것을 대단한 것처럼 축하해주었기 때문에 임연연은 자기보다 세 살 어린 사제가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성을 달성한 구대헌이 보름 뒤에 밖에서 큰 부상을 입고 사문으로 돌아왔다. 청성파의 후기지수 중 하나인 오인해라는 검수와의 비무 중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임연연은 그 대단하다던 소성을 이룬 구대헌이 청성파의 제자에게 당한 것을 보고 처음 실망했다. 소성을 이루어도 결국은 비무를 이기지 못하는 거군.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건 구대헌이 배를 검에 찔려서 두 달이나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다치고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사문인 숭인문에서 구대헌에게 부상을 입힌 청성파의 오인해에게 치죄는커녕 아예 불평조차 한마디 안 하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간 것이었다.

 임연연이 보기에는 너무나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청성파라는 명문대파의 제자에게 당하고 돌아왔으니, 산골에 처박혀 있는 숭인문에서 감히 따지지도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너무나 치욕적인 느낌이었다.

 만약 자신이 밖에서 웬 놈에게 따귀를 맞고 돌아오더라도 사문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즉 약소문파의 설움인 것이다.

 구대헌과 비무해서 이긴 청성파의 오인해가 남긴 말이 사천지방을 떠돌았다.

 ‘숭인문이라는 문파는 처음 들었는데 그 제자가 생각보다 강해서 놀랐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임연연은 더욱 수치심을 느꼈다. 사천지방에서 조롱거리가 되다니. 차라리 숭인문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만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보름이 지났다. 그리고 임연연의 귀에 새로운 소문이 들어왔다. 구대헌에게 비무에서 이긴 오인해가 이씨세가의 이세척에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구대헌에게 이긴 오인해를 이긴 이세척.’ 임연연은 단 한 번 듣고 이세척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이세척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제 혼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까지 발전했다.

 이세척을 만나는 자리는 사천지방의 유명한 명문대파나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그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초라한 숭인문이라는 간판을 달고 나가는 임연연은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감이 있었으며 온갖 수치스러운 경험을 했다. 하지만 꿋꿋이 그 수모를 참고 이세척을 만났다.

 이세척은 그다지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다. 외모만 따지면 준수한 수준인 양진위가 훨씬 나았다.

 하지만 이세척은 화려한 미모의 임연연을 만나면서 은연중에 명문세가의 후기지수인 내가 별 볼일 없는 숭인문의 제자인 너와 사귀어 준다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임연연은 그런 것도 다 참았다. 이씨세가의 안방을 차지하고 나면 그동안 당했던 수치를 모두 씻고 활개를 펼칠 생각이었다.

 다음날 저녁 숭인문에 양진위와 종염방이 도착했다. 종염방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하였고 양진위는 마치 40대 중년의 남자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형제들은 모두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였다.

 이처럼 싱글벙글하고 있는 종염방이 조금만 무슨 일이 생기면 금세 감정이 격해져서 징징거리며 흐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지금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양진위는 화가 치밀어 오르면 사제들에게 상스러운 욕을 마구 내뱉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형제들은 모두 만나서 서로의 변한 얼굴을 확인하며 즐거워했다. 그 와중에 일곱째 장초인은 잠시 얼굴을 비추고 금방 자리를 떴고 다섯째 임연연은 아예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해가 질 무렵에 양진위는 임연연의 거처를 찾아갔다. 방문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매, 나 양사형이다. 밖으로 나와라. 얼굴 좀 보자.”

 방안에서 대답이 없자 양진위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할 말이 있다. 얘기 좀 하자.”

 “저는 사형과 할 말이 없어요. 보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세요.”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이냐. 왜 나를 기피하느냐. 나와서 얘기해다오.”

 방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양사형이 나를 연인으로 대하는 것이라면 전 사형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전 이미 혼처가 정해진 몸이에요. 만약 양사형이 저를 연인이 아니라 사매로 대하신다면 제가 나가도록 하지요.”

 양진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얼굴이 벌게지며 목울대가 몇 번 오르락내리락했다. 양진위가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를 버리고 이세척이라는 놈과 혼인을 하려고 하는 것이냐. 이유를 말해다오.”

 “그 이유는 이미 장사제에게 얘기했으니 알고 싶으면 장사제에게 물어보도록 하세요.”

 “왜 그 이유를 장사제에게 얘기한단 말이냐. 당연히 나한테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

 방문이 확 열렸다. 그리고 임연연의 상기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요. 전 양사형을 사랑하지 않고 이세척을 사랑합니다. 이공자와 혼인할 것이구요. 양사형이 절 연인으로 대한다면 저는 양사형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연인이 아니라 사매로 대할 결심이 서면 그때 다시 오세요. 사형과 얘기를 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뭐라 해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돌아가세요. 전 자야겠습니다.”

 임연연의 얼굴이 방 안쪽으로 사라지더니 문이 ‘탁’하고 닫혔다. 양진위는 ‘탁’하고 닫힌 방문을 원망이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문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이 지고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그 캄캄한 어둠은 사위를 가득 채우고 양진위의 가슴 속까지 몰려왔다.

 양진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임연연과 함께 반질반질한, 두 사람이 꼭 붙어 앉을 공간이 있는 바위에 나란히 앉아 별을 감상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바위는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임연연의 거처 앞뜰에 있었는데 임연연의 마음은 바위와 같이 단단하지 못하여 변하여 버렸다.

 저쪽에서 두 사람의 인영이 등장했다. 고채란과 종염방이었다. 두 사자매는 원래 친하게 지냈고 이제 오래간만에 만나서 밤늦도록 정자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종염방은 지생고 기간 동안 겪은 고생을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았고 고채란은 언제나 누구를 대해도 그렇듯이 종염방의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종염방이 여문도들의 거처로 돌아오다가 넷째 사형 양진위가 사저 임연연의 거처 앞에 밤늦은 시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양진위를 향해 뛰어가려고 했다.

 그런 종염방의 손을 고채란이 재빨리 잡았다. 종염방이 고채란을 돌아보자 고채란은 식지(食指)를 들어 입술에 붙이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 종염방의 손을 끌어 종염방의 방으로 같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사저?”

 종염방의 물음에 고채란이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죽여서 작게 말해라. 임사저가 이씨세가의 이세척이라는 사람과 혼인하기로 했다.”

 종염방이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임사저는 양사형과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우리들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뭐 무슨 일이 있었나 보지. 우리가 어찌 알겠니. 어쨌든 양사형이 엄청 상심할 것이 당연하니 넌 경망스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종염방이 입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겠다는 듯이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숨죽이느라 큰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진짜 도대체 왜…….”

 고채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양사형이 너무 오랫동안 사문을 떠나 있었던 거 같아. 3년 가까이 사문을 떠나 있었으니 임사저가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한 거겠지.”

 종염방이 고채란의 말을 듣고 갑자기 눈을 빛냈다. 양미간을 좁혀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저, 혹시…….”

 “혹시 뭐?”

 “혹시… 양사형이 제가 지생고를 하는 동안 쭉 혼자서 절 지켜봐 주고 있었던 거예요?”

 고채란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을 들어보니 종염방은 그 사실을 몰랐던 거 같았다. 그렇다면 양사형이 말을 안 했다는 것인데, 그럼 어쩌면 말실수를 한 것이다. 고채란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

 “그… 그럼 저 때문에… 저는 사형들이 돌아가며 저를 보고 있었던 건 줄 알았어요… 양사형이… 양사형이 저를 지켜보고 있느라 너무 오랫동안 사문을 떠나서… 저 때문에 임사저하고 혼인을 못하게 된 거군요.”

 고채란은 완전히 당황해서 뭐라고 말을 못했다.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너 때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생고를 시킬 것인가는 사문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사형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양사형은 사형이 판단해서 네 곁에 오랫동안 있었던 거야. 그러니 너 때문이 아니다.”

 “그… 그래도. 난…….”

 종염방은 아까까지 싱글벙글하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흑흑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고채란은 종염방의 어깨를 껴안고는 등을 쓰다듬으며 ‘너 때문이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양진위는 밤새도록 임연연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별이 지고 달이 졌다. 양진위는 끝없이 생각했다.

 ‘나는 임사매를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 단순한 사매로 대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동녘 하늘이 희붐해지고 이제 곧 해가 떠오를 듯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의 꺽쇠 꼴의 능선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무렵에 임연연의 방문이 열렸다. 임연연의 머리가 밖으로 나오다가 양진위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방문이 ‘탁’하고 닫혔다. 양진위가 목소리를 쥐어짜듯이 내었다.

 “사매…….”

 “…….”

 “사매, 나는 마음을 결정했다. 사매를 더 이상 연인으로 대하지 않겠다. 그냥 숭인문의 사매로 대하겠으니 밖으로 나와라.”

 잠시 후에 방문이 열리더니 임연연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양진위의 한 걸음 앞에 섰다.

 “사형. 사문으로 돌아오셔서 반갑습니다.”

 “혼인을 축하한다.”

 “…….”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서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혼인 날짜는 언제냐.”

 “열이틀 뒤에요.”

 “그래. 그렇구나. 이씨세가에 시집을 가더라도 숭인문의 긍지를 잃지 말고 당당히 살도록 해라.”

 “예.”

 양진위는 임연연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것이 임연연을 이처럼 가까이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임연연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 시키려는 듯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만 가보겠다.”

 임연연은 양진위의 얼굴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진짜 이세척과 혼인하는 게 옳은 일일까?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들자 임연연은 단호하게 그 생각을 눌렀다. 난 후회하지 않아. 오히려 양사형과 혼인을 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그런데 막상 양진위가 몸을 돌려 걸어가자 문득, 양진위가 한 말, 이씨세가에 시집을 가더라도 숭인문의 긍지를 잃지 말고 당당히 살도록 하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숭인문의 긍지? 그게 뭔데. 이씨세가에 내세울 만한 긍지가 숭인문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문득 장초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형.”

 양진위는 임연연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응?”

 “여쭤볼 것이 있어요.”

 “뭘 말이냐.”

 “어제 장사제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양사형이 사문으로 돌아오면 물어보라구… 만약 이씨세가와 숭인문이 사돈을 맺게 되면 사돈의 덕을 보는 것이 이씨세가인지 숭인문인지 양사형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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