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위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하지만 임연연이 질문을 했으니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잠시 생각한 후 대답을 했다.
“원래 혼인이라는 것이 남녀가 만나 인연을 맺는 것인데, 혼인 당사자인 남녀가 모두 서로에게 기대어 행복해지는 것이지. 뿐만 아니라 혼인은 가문의 연을 맺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씨세가와 우리 숭인문이 혼인의 연을 맺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임연연은 양진위의 말이 끝나지 않고 이어질 듯하자 잠자코 기다렸다.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다.
양진위는 말을 끝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착 가라앉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니라 당당한 기개가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씨세가와 숭인문이 인연을 맺는다면 덕을 보는 것은 당연히 이씨세가 쪽이다. 숭인문이 이씨세가에게 덕을 보는 일도 종종 있겠지만, 큰 사건이 일어나면 아무래도 이씨세가가 숭인문의 덕을 보겠지.”
‘이씨세가가 숭인문의 덕을 본다고?’
임연연은 뜻밖의 대답에, 또 그 뜻밖의 대답을 너무나 자신 있게 말하는 양진위의 어투에 놀라서 몸을 경직시켰다.
“큰일이라니요?”
양진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 숭인문이야 이곳 사천지방에서도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타 문파와 갈등이 있을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이씨세가는 사천지방에서 세력을 얻고 있는 세가이다. 그런데 사천에는 세력이 큰 문파들이 즐비하다. 당문, 청성파 등 대부분의 거대세가나 문파는 이씨세가가 상대하기는 약간씩 힘이 달리는 세력들이다. 세가와 문파 사이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타협해가며 공존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결국은 큰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이씨세가가 사천지방의 거대세력과 알력이 생겨 위기에 몰리면, 어찌 숭인문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 당연히 이씨세가를 도울 것이다.”
“숭인문이 이씨세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당연하지.”
“그럼 만약에 숭인문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요. 그럼 이씨세가의 덕을 볼 것 아닌가요.”
양진위는 피식 웃었다. 임연연이 보기에 그 피식 웃는 웃음이 전날 장초인이 피식 웃었던 것과 완전히 같았다.
“글쎄다. 만약에 숭인문이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이씨세가가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하지만 숭인문은 그다지 이씨세가의 힘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숭인문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사형의 말은 이씨세가는 스스로 지킬 힘이 없고 숭인문은 스스로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이군요.”
“흠… 너무 자존자대하는 것 같기는 하다만 사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임연연은 너무나 단호하게 말하는 양진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실이 그러하니, 넌 자랑스런 숭인문의 문도이다. 이점을 잊지 말고 시집가서도 당당히 행동하도록 해라.”
“무슨 말을 그렇게…….”
임연연이 말끝을 흐리자 양진위는 임연연이 도대체 왜 뚱딴지같은 것을 물어보고 또 숭인문의 문도로서 당당히 행동하라고 하는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상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한 사형과 답답한 사저로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초인이었다. 장초인은 양진위와 임연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형 정말 답답하네. 사저가 사형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 제가 대신 한마디 하고 가죠. 사저, 제가 사저가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이씨세가가 숭인문에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질러서 숭인문이 이씨세가를 제거해버려야겠다고 결단을 내리면, 숭인문은 하루 안에 이씨세가를 강호에서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임연연은 장초인의 말에 바보 같은 표정이 돼서 말했다.
“뭐라구? 누가 어떻게…….”
“누가 어떻게 라구요? 아마 숭인문에서는 이씨세가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저나 양사형 중 한 사람을 이씨세가로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저나 양사형은 하루 안에 이씨세가를 없애버릴 수 있구요.”
임연연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양미간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 소리를 다 듣는군. 사제 허풍이 대단해 정말. 그처럼 숭인문이 강하다면 왜 구사제가 청성의 오인해에게 당했을 때 복수하지 않았지?”
“아, 그 일 말이군요. 그 일 때문에 사부와 사숙들의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를 복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그때 구사제가 오인해에게 부상을 입은 것은 음해나 기습을 당해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고 정정당당한 비무의 결과로 부상을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비무를 통해 문도가 부상을 당했다면 상대 문파에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숭인문의 원칙입니다. 만약 그때 구사제가 죽임을 당했다면 대응방법이 좀 달랐겠지만 말이죠.”
“하, 그랬었군. 사제의 말에 의하면 숭인문이 소림파를 제거해버리는 것도 문제가 아니겠군.”
장초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양진위에게 물었다.
“사형,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진위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소림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어찌 소림을 쉽게 제거할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소림 정도의 문파는 좀 그렇죠? 그렇답니다. 사저.”
임연연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차라리 소림 역시 무슨 문제냐 소림도 하루 만에 없애버릴 수 있다고 말하면 더 이상 상대를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림은 너무 강해서 제거해버리는 것이 어렵다고 대답하니, 그럼 소림이 아니라 이씨세가는 정말로 하루 만에 없애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임연연은 물론 숭인문의 무공을 대성까지 돌파한 장초인이나 양진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형제들 대부분의 무공수준은 잘 알고 있었다. 열 명이 넘는 사형제들의 무공은 대부분 이류문파, 삼류문파의 인물을 감당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씨세가를 운운하고 소림을 운운하다니 기가 막혀서. 만약 그렇다면 왜 숭인문은 사천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왜 이씨세가만한 세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임연연은 한마디로 말해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두 사형제가 허풍이 정말 대단했다. 더 이상 상대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임연연은 몸을 홱 돌려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이 탁 닫히자 양진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사형, 사형제들과 오순도순 사는 꿈을 꾸다가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기분이 어떠신가요?”
장초인은 냉소적인 말을 던진 후 양진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숭인문과 이씨세가의 혼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양쪽의 어른들이 회동하여 인사를 나누었고 예물이 오고 갔다.
그 와중에서 이씨세가는 다소 고압적인 태도로, 즉, 원래 세가의 혼인은 서로 어울리는 문파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숭인문에게 이씨세가의 후기지수를 장가보내다니 좀… 이라는 태도를 보여 숭인문 인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나 숭인문의 문주 임군척은 그저 사람 좋은 호인인 냥 허허 웃으며 대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임연연은 즐거운 혼담 와중에서도 또다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혼담이 진행되는 동안 양진위는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맥이 풀려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객잔을 자주 찾아 술을 마셨다.
어느 날 청승맞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12살 아래의 귀여운 사매인 종염방이 냉큼 양진위의 앞자리에 앉았다. 양진위가 눈썹을 꿈틀하더니 말했다.
“아니, 이게, 어린애가 왜 술집을 드나드느냐. 네가 지생고를 하는 동안 아예 술 맛을 안 것이구나.”
종염방이 혀를 쏙 내밀더니 말했다.
“사부가 양사형을 찾아오라고 해서 제가 온 것이라구요.”
“왜 하필이면 네가 왔냐는 것이다. 사문에서 여기까지 오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어쩌려구.”
“무슨 일을 당하긴 무슨 일을 당해요. 전 아직 어린애인데.”
“어린애를 납치해다가 기녀로 키우는 기방이 있다는 것도 모르느냐.”
“헤~ 사문에서 쫓아내서 혼자 살도록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때 덩치가 산만한 청년이 쭈뼛쭈뼛 걸어왔다. 양진위가 취한 눈으로 보니 바로 아홉째인 구대헌이었다. 종염방이 양진위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 구대헌이 사부의 명을 받고 양진위를 데리러 오는데 종염방이 따라온 것이었다.
“음. 구사제 아니야. 이리와 앉아라.”
“사형, 사부께서 찾습니다.”
“사부님이 찾는다고? 뭐 있다가 가지 뭐. 일단 앉아서 술 한잔 같이하자. 안 그래도 혼자서 마시느라 적적했었다.”
“사부는 사형을 빨리 데려오라고…….”
“뭐? 급한 일이 있는 것이냐? 누가 쳐들어왔냐? 뭐 그런 게 아니면 급할 거 없다. 아니, 누가 쳐들어왔다 해도 장초인 그놈이 있지 않냐. 이리 와서 한잔 마시고 가라.”
순박한 구대헌이 뻔뻔스럽게 사부의 명을 우습게 아는 사형의 말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데 종염방이 옆에서 끼어들어 조잘거렸다.
“그래요, 구사형. 뭐 급할 게 어딨어요. 술 한잔 마시고 가요.”
양진위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 또 술 얻어먹을 생각하고 있지? 꿈도 꾸지 마라.”
종염방이 다시 혀를 내밀었다. 구대헌은 어쩔 줄 모르다가 종염방이 이끄는 터에 결국 탁자에 앉고 말았다.
종염방은 술잔을 가져오는 점소이를 채근해서 술잔 하나를 자기 몫으로 더 가져오게 했다. 그 와중에 점소이더러 점소이의 기본이 안 되었다고 타박을 했다.
‘자고로 점소이란…’으로 시작해서 술잔을 가져오는 점소이에게 한바탕 교육을 시키는 것을 양진위와 구대헌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종염방은 온갖 아부와 애원을 다해서 결국 양진위에게 술을 한 잔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양진위와 구대헌이 건배를 하는 틈을 타서 스리슬쩍 두 번째 잔을 받았다. 양진위가 술잔을 놓고는 말했다.
“이놈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야겠군. 더 이상 있다가는 사매 하나를 완전 술꾼으로 만들겠어.”
“사매는 사형을 따라가는 법. 호쾌하게 술을 마시는 사형이 있으니 호쾌하게 술을 마시는 사매도 있어야 하잖아요? 헤헤.”
사실 사부가 빨리 들어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양진위라고 해서 오래 술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종염방을 핑계 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형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점을 나와 숭인문을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구대헌이 우물우물하다가 말을 꺼냈다.
“뭐라구? 남자답게 시원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뭐라고 우물대는 것이냐.”
사실 구대헌은 소성을 달성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형인 장초인이나 양진위의 대단함을 알지 못했다. 그냥 약간은 무섭지만 어려서부터 한솥밥을 먹은 친근한 사형일 뿐이었다.
그런데 소성을 달성하고 나자 장초인과 양진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허물없이 다가서지 못하고 어렵게 대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소성 근처에도 가지 못한 사형제들은 장초인과 양진위의 본모습을 모르고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가끔 화가 나서 대들기도 하는 형편이었다.
“사형, 임사저 때문에 많이 괴로우신지, 괜찮으신지 여쭈었습니다.”
구대헌이 말하자 옆에서 종염방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양진위를 같이 바라보았다.
“임사매는 이제 내 마음속에 자랑스런 사매일 뿐이다.”
“…….”
“솔직히 속이 쓰리지. 사랑했던 여자를 다른 놈에게 뺏기고 속이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가 어딨겠느냐. 하지만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을 사지에 버리고 나 혼자 도망 나왔을 때에 비하면 지금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동료들을 다 죽게 버려두고 혼자서 살았을 때도 삼 일이 지나자 죄책감이라든가 슬픈 감정 같은 걸 모두 잊었다. 이제 임사매도 그러한 것이다.”
“…….”
“너는 어떠냐, 청성의 애송이한테 패한 것 때문에 의기소침한 것은 아니냐?”
구대헌은 안 그래도 넓은 가슴을 당당히 펴고 말했다.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전 오인해에게 패한 그 순간에도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너무나 안일했던 제 자신에게 화가 나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정신을 차렸을 뿐입니다.”
“그래? 그럼 다시 오인해와 붙으면 이길 수 있겠느냐?”
“당연히 이길 수 있습니다.”
“좋다. 하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