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리한 부탁인 거 알고.. 만나기 싫은 거.. 다 아는데.. 하나씨. 부탁 좀 합시다. 범인 잡아야 할 거 아닙니까”
“…”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자리에 두지 않는 것이 불문율임에도 김형사는 하나를 용의자가 보이는 유리벽 앞에 세워둔 채, 동생을 죽인 살인범을 만나 달라 요청하고 있었다.
범인을 찾고 싶은 욕망은 하나가 더 강했고, 살인범과 1:1로 만나는 것도 두렵지 않았지만, 잘못된 길을 선택할 순 없었다.
“저 새끼 거짓말이에요”
“??”
“이나는 그 때 거의 밖을 안 나갔어요. 우울증이랑 불면증이 심해서 한 달에 한 번 병원 갈 때만 나갔는데.. 항상 나랑 같이 나갔어요. 슈퍼도 내가 가거나 배달을 시키지 이나가 혼자 운직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 새끼가 누구든.. 이나랑 친했다느니, 초대받았다느니 하는 건 다 구라란 거죠.”
“하나씨가 출근했을 때 나갔을 수도 있죠.”
“그런 일 없다니까요!” 하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이나 얼마나 아세요? 이나 살아있을 때 본 적 있어요? 없죠? 걔 상태도 모르면서 저 새끼랑 친했다느니 어쩌니 그런 말 말라구요. 이나는.. 절대 저 새끼 따로 안 만났어요. 절대로! ”
“그러니까 더 만나봐 달라는 겁니다. 저 놈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아야죠”
“지금.. 경찰이 할 일을 피해자 가족한테 미루는 거예요? 범인 잡는 게 내 일 인줄은 진짜 몰랐네요?”
“…”
안다.
김형사는 형사로써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의문을 가져야 하는 부분에 의문을 가졌을 뿐이며, 하나에게도 수사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가 출근한 후 집을 나섰다가, 그녀가 퇴근하기 전 돌아왔을 수도 있다는 것.
하나가 아는 이나보다, 하나가 모르는 이나가 더 많다는 것.
그러니, 지금 하나는 김형사 말대로 ‘잠정 용의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
머리로는 100% 이해되는 사실이지만, 하나의 몸이, 가슴이 자꾸 하나의 발목을 잡았다.
8년 전 서울로 이사한 후, 이나는 오랫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서울에 온지 1년이 지나서야 첫 외출을 했고, 2년째가 돼서야 한 달에 한번 정도 하나와 함께 짧은 외출을 했다. 사건 1년 전-서울생활 3년차-부터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돈을 조금씩 벌기 시작했다. 조금씩 햇빛 속으로 나오던 이나가 갑자기 8년 전 어둠으로 돌아가 버린 건, 사건 3개월 전이었다.
갑자기 이나는 하나 없이 혼자 절대 집을 나서려 하지 않았고, 혼자 있을 때는 전화도, 택배도 받지 않았다. 낮 동안 잘 먹지도 않는지, 퇴근한 하나가 밥통을 열면 전날 밥이 그대로 남아있기 일쑤였다.
히키코모리 같은 삶을 살던 이나가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고,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 친하게 지나다가 살해당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부탁하는 거 아닙니다”
“…”
흥분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진 하나와 달리 김형사의 어조는 처음과 똑같이 낮았다.
“이나씨가 두문불출했다는 거 잘 압니다. 그래서 그 때 범인 못 잡았던 거 아닙니까. 용의자로 꼽을 사람이 전혀 없어서. 가족 분들도 그거 때문에 고생 많이 했구요.”
이나의 사회관계가 전멸한 탓에 하나와 엄마 박부진까지 용의자 선에 올랐고, 한동안 심문과 허황된 소문에 시달렸던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4년 만에 처음 나타난 용의자예요. 저 놈이 진짜 범인이면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야 하고, 아니라면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알아내야죠.”
“…”
“우리 하나만 생각합시다. 이나씨 죽인 범인 잡는 거. 어떻게든 범인은 잡아야죠”
완벽한 K.O 패 였다.
하나가 다른 반론을 펴면, 범인을 잡을 생각이 없는 유가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김형사는 벌써 심문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었다.
살인범을 만나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문실 문 앞에 선 하나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범인을 잡았다는 흥분 때문일까?
남자가 범인이 아니란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하나는 주먹을 꼭 쥐어 떨리는 손을 감춘 채 심문실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4.
짙은 남색의 반듯한 셔츠. 카멜색 면바지와 갈색 워커, 약간 흐트러지긴 했지만 2:8로 정돈된 짧은 헤어스타일.
살인범 보다는 주민센터 옆자리에 앉은 지루한 동료 같은 느낌이었다.
175cm의 키. 날렵한 몸은 4년 전 어둠속에서 스친 남자와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뭔가 뒤틀려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고, 알 수 없는 그 느낌 때문에 두려웠다.
하나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음에도 남자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말하자, 남자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하나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끝만 바라봤다.
짝사랑하던 여자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언니를 못 알아봤다? 그런데 이름은 안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왜 죽였어?”
“…”
“나 왜 보자고 했어?”
3~4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였지만, 하나는 말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나 알지? 그 날 우리 마주쳤잖아. 계단에서”
머뭇대는 남자 대신 하나가 말을 이었다.
“1층 올라가는 계단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눈이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나랑 어깨 부딪힌 건 기억해? 모자 들고 있다가 떨어뜨렸잖아.”
잠깐 머뭇대는 듯 했지만, 남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감싼 공기가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
남자를 마주친 건 2층에서 3층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남자는 하나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이며 몸을 벽으로 붙였고, 어두운 계단 안에서도 검은 모자와 머플러를 꼼꼼히 두르고 있었다.
4년 전 일이라 남자의 기억이 틀어진 걸까? 아니면 하나의 기억이 틀어진 걸까?
하나는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옷은 왜 벗겼어?”
놀랐는지 처음으로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하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부검했을 때 성폭행 흔적은 안 나왔다던데.. 죽인 다음에.. 혼자 자위한 거야? 그런 취향이야? 죽은 사람 보면 막 흥분하고 그래?”
“… 그런 적 없는데요”
“있어”
“기사에는..”
“여기 기사보고 왔니?”
“…”
“기사에 나가는 건 일부야.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거. 결정적 증거 같은 건 당연히 차단하지. 그래야 범인을 잡으니까.”
“…”
“말해봐. 왜 옷 벗겼어? 정액은 안 나왔다던데.. 다 처리하고 간 거야... 그냥 옷만 벗긴 거야?”
“…”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대답대신 물을 마셨고, 하나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너머에는 김형사와 동료들이 서 있을 것이고, 지금의 대화를 들었다면, 남자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5.
“무슨 일 있지?”
퇴근하자마자, 손발을 씻지도 않고, 식탁으로 달려오던 사람이, 평소보다 1시간 늦게 집에 도착했으면서, 저녁도 거부한 채 침대에 드러누워 있으니 호진이 이상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아니야 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려 봤지만, 통할 호진이 아니었다.
“또 공무원들이 지랄했구나!”
동기지만 고졸에다 나이가 6살 어리다는 이유로 하나를 번번이 무시하던 최주무관을 내사과에 고발한 것이 두 달 전이었다. 고발할 때의 감정은 사적이었지만, 고발 내용은 공적이었다. 6시 땡 하면 퇴근해서 저녁 야근 식대로 밥을 먹고, 영어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거나, 놀다가 9시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퇴근 체크를 하는 것이 최주무관과 팀장의 평일 일정이었다. 야근을 하지 않고도 야근 수당을 받았으니 하나의 고발은 정당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녀의 고발을 정당하다고 보는 사람은 주민센터 내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최주무관과 팀장이 징계를 먹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면서 내사는 끝이 났고, 그 날 이후 주민센터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 가장 힘든 일은 모두 하나 차지가 됐다.
“그런 거 아냐”
“그럼 뭔데?”
“…”
“정하나. 우리 서로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조건 공유하자며”
“…”
“야. 힘든 일일수록 나눠야지. 혼자 꽁하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어. 빨리 말해봐. 뭐야. 오빠가 다 해결해 줄게!”
따스하게 바라보는 호진의 눈빛을 보자, 하나의 가슴에 찌르르한 떨림이 느껴졌다.
호진을 알게 된지 4년, 함께 살게 된지 2년.
호진이 없었다면 지금 하나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나의 피가 묻은 벽을 홀로 닦고, 그녀의 소지품을 불에 태우던 날.
하나는 몇 개의 번개탄과 크고 넓은 테이프를 여러 개 샀었다. 이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이나가 죽은 곳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창문 틈을 테이프로 꼼꼼하게 막고 있던 찰라,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환한 미소를 띤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1층 우편함 그림을 그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나가 1층 우편함에 그려놓은 동물모양의 캐리커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출판사 직원으로, 지금 기획중인 책 표지를 그려줄 사람을 찾던 중 그림을 봤고,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고 했다. 이나가 그린 캐리커쳐를 칭찬하는 남자의 말을 듣다가 하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진정되기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렸다.
다음날 하나는 남자가 ‘언제든 연락하세요’라며 건넨 ‘김호진’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날 우는 하나를 한 시간 넘게 달래줬을 뿐 아니라, 죽까지 사와서 억지로 먹였던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 호진은 하나가 걱정된다는 핑계로 다시 옥탑을 찾아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일주일 내내 호진이 찾아오는 바람에 하나는 자살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결국 자살을 포기하게 되었다.
친구를 제안한 건 하나가 먼저 였다. 동갑내기 친구로 6개월을 지낸 후 연인이 되었고, 다시 2년 후에 같은 지붕 아래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가 되었다.
호진은 그녀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걸 호진에게 드러냈지만, 이나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입을 닫았다.
‘쌍둥이 동생이 사고로 죽었어’ 라는 하나의 말을 호진은 ‘교통사고’로 인식했고, 그녀는 그의 오해를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차마 ‘살해당한 동생을 내가 발견했고, 범인은 못 잡았어’라는 말을 할 순 없기도 했지만, 그 날을 떠올리면 자신이 편의점을 들리는 바람에, 계단에서 마주친 남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범인을 놓쳤다는 생각이 자꾸 떠올라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짜 자백’을 한 범인이 나타났고, 수사가 일부 재개된 이상, 계속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밝혀질 진실이라면 하나 스스로 말하는 게 나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녀가 원한 일이었다. 오늘의 고통을 나누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이에게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그녀의 입을 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