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엄마의 꿈은 어쩜 그렇게 틀린 적이 없을까.
오천읍 파출소 마당에 세워진 차를 본 순간 하나는 ‘꿈자리가 사나웠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렸다.
이틀 연속 반차를 내는 것 때문에 20분 가까이 팀장의 잔소리를 듣고,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겨우 경기도 끝자락에 도착한 하나가 맞닥뜨린 것은 앞 범퍼가 찌그러지고, 빨간 핏자국이 묻은 그녀의 아반떼였다.
차는 17번국도 근처 숲 속에 세워져 있었다고 했다.
최초 발견자는 버섯을 따러 가던 인근 주민이었다. 범퍼가 망가진 것 때문에 경찰들은 교통사고 일 거라 생각했지만, 최근 2~3일 사이 신고 된 교통사고는 전혀 없었다. CCTV도 없고,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에서 차가 발견된 터라, 누가, 왜 그곳에 차를 버렸는지 경찰도 알아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본인 차 맞습니까? 누가 타고 있었습니까?”
신고를 처음 접수받았다는 윤형식 경장은 이 지역 출신인지 하나와 대화하는 중에도 파출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연신 손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피는 뭐예요?”
“… 그거야..” 윤경장이 말을 얼버무렸다. “알아봐야지.. 블랙박스 있죠? 그거 한번 봅시다.”
차 문을 강제로 열었지만, 블랙박스는 보이지 않았다.
“블랙박스 설치 안 했어요?”
“했어요. 여기 붙어 있던 흔적 있잖아요.”
전면 유리 중앙 상단에 썬팅이 뜯어진 흔적이 있었고, 유리에 약간의 기스가 생겨 있었다. 누군가 블랙박스를 강제로 떼다가 남은 흔적이었다. 심지어 대시보드 위에 있던 내비게이션도 사라진 채 거치대만 달랑 남아 있었다.
누군가 블랙박스와 내비게이션을 떼어 냈다. 왜?
불길한 생각을 애써 누르며, 하나는 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꺼졌는지 바로 통화 대기 안내 멘트로 넘어갔고, 하나의 심장 박동수도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경장님! 차에 남자친구가 타고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 연락이 안 돼요. 사고난거 같은데.. 여기서 실종신고 되죠?”
“언제부터 안 됐습니까.”
다급한 하나와는 달리, 윤경장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어젯밤이요. 어제 이 차 타고 나갔는데 그 뒤로 계속 연락이 안 돼요. 차가 이렇게 된 거 보면.. 그 사람한테 무슨 일 생긴 게 틀림없어요.”
“하루도 안 됐네... 그럼 좀 더 기다려 보다가..”
“전화를 안 받는다니까요!”
“남자친구가 몇 살인데요? 성인 아닙니까?”
“…”
“아가씨. 우리도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없어졌다고 바로 찾고 이러진 못해요. 성인이면 갑자기 연락이 안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애인사이라면서요? 원래 연인끼리는 싸우고 전화 안 받고 하잖아요.”
“안 싸웠어요! 그리고, 아무리 성인이라도 범죄에 관련된 거면 찾아야 되잖아요. 차에 피 묻은 거 안 보이세요!”
“하.. 참. 그래서 교통사고랑 병원 다 확인해봤다니까요. 24시간 동안 이 인근에서 접수된 교통사고도 없고, 병원에 온 사람도 없어요. 피는 동물 피일 수도 있어요. 여기 로드킬 당하는 동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죠?”
하나도 튀어나온 개를 친 적이 있었다. 한적한 산 속이니 경찰 말처럼 차가 멧돼지나 사슴과 부딪혔고, 그들의 피가 묻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차가 길이 아닌 숲 속에서 발견됐을까? 왜 블랙박스와 내비게이션이 사라졌을까? 여러모로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사고가 났을 수도 있는데.. 성인이라서 수사 못하겠다. 이거죠? 교통사고 신고 없었으니까 저 피는 동물 피인 거고”
“…”
“그 얘기가 제 귀에는 사람 죽고 나야 수사하겠다.. 이렇게 들리는데 맞아요?”
“…”
“수사해주세요. 아니면 다른 경찰서에 물어볼까요?”
“…”
결국 먼저 꼬리를 내린 건 경찰이었다.
“그 사람 연락처가 어떻게 되요?”
윤경장이 깊은 한숨과 함께 호진의 신원정보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생일이요?”
윤경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고, 하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26살 먹은 성인 남자의 실종신고를 받지 않는다고, 약간의 피가 묻고 찌그러진 차를 범죄 현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언성을 높이며 진상을 부렸으면서, 정작 실종신고하려는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는커녕 가족 연락처도 모르고, 그의 생일과 핸드폰 번호만 안다고 했으니, 어이없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핸드폰 번호로는 안 될까요? 그걸로 본인확인하고 하잖아요.”
“…”
윤경장은 직계 가족도 아닌 여자 친구 요청으로 신원조회를 할 수는 없다며 하나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좀 더 매달려 보고 싶었지만, 경찰의 말이 백퍼센트 맞는 것이고 이미 충분히 진상 짓을 한 것이어서 하나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9.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는 호진의 주민등록번호를 찾기 시작했지만,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은 지갑에 있기 마련이고, 호진이 집을 나갈 때 지갑을 챙겼을 테니 두 가지가 없는 건 당연했다. 여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호진은 해외에 간 적이 없으니 여권을 만든 적도 없었다. 함께 살긴 했지만, 법적인 부부가 아니니 호진의 주민등록 등본을 뗄 수도 없었다. 가족이 있다면, 가족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호진의 부모님은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친척들과도 왕래가 없던 터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호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쓸수록, 하나는 호진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생각보다 많은 것이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어서 더 놀라웠다.
호진이 쓰는 카드나 통장 뿐 아니라, 전기, 수도, 가스 고지서, 단골식당 적립카드 역시 모두 하나 명의로 되어 있었고, 호진이 쓰는 웹소설도 하나 ID로 업로드 되고 있었고, 계약서도 하나 이름으로, 수익금도 하나 명의의 통장으로 입금되고 있었다.
호진은 출판사에서 근무할 때 쓴 첫 웹소설을 하나 ID로 등록했고, 이는 하나도 동의한 일이었다. 회사에도 웹소설팀이 있기에, 본인의 ID를 쓰면 회사에서 알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고, 본인이 쓴 웹소설이 지금처럼 잘 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첫 작품이 인기를 끈 덕에 호진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지만 그 후에도 계속 하나의 ID로 작품을 올렸다. ID에 누적된 이전 작품 조회수를 버릴 수 없기도 했지만, 여자가 쓰는 무협소설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호진의 생각이었다.
함께 살게 된 이후로는 경제권을 한사람이 쥐는 게 편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하나의 명의로 했고, 그 과정에서 의심되거나 뭔가를 숨긴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하나를 위하는 행동으로만 보였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호진의 흔적이라고는 자켓 주머니에서 나온 편의점 영수증이 전부였고, 하나는 다시 벽에 부딪혔다. 주민등록번호를 찾지 못하면, 호진의 실종신고는 낼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위험에 빠졌을 지도 모르는데,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4년 전 이나가 죽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사랑 밖에 줄 게 없는 한없이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 정하나.
끝없는 자책이 시작되려는 찰라, 호진의 책상 앞에 놓인 작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오늘은 4월 8일 금요일이었다.
- 금요일?? 정하나. 이 멍청이.
하나는 자신의 멍청함에 혀가 내둘러졌다. 호진의 글은 매주 화요일, 금요일에 업로드 되고 업로드 전 담당 편집자와 통화를 하는 것이 기본 절차였다. 오늘 글이 올라갔다면, 당연히 편집자와 통화했을 것이고, 이를 확인하면 최소한 호진의 안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씨! 어떻게 된 거예요?” 전화를 받은 편집자는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네?”
“호진씨 그렇게 몸이 안 좋아요? 전화도 안 받고.. 입원한 건 아니죠?”
- 호진이 아프다고?
“호진이가.. 연락했어요?”
“아우.. 아까 문자 보냈더라구.. 하나씨한테 연락할까 하다가 내가 너무 설레발치는 건가 싶어서 연락 안했지”
초등학생 딸을 둔 30대 후반의 워킹맘 편집자는 처음부터 호진을 담당한 편집자여서, 하나와 호진 관계를 잘 알고 종종 연락도 주고받는 사이였다.
“뭐라고 보냈어요?”
“응?”
“저도 출장 때문에 지방에 왔거든요. 별 거 아니라는데.. 괜히 걱정할까봐 제대로 말 안하는 거 같아서요.” 차마 어젯밤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일주일 휴재를 했으면 좋겠다고 왔던데? 휴재 안내문도 대신 올려 달라고 하더라구. 얼마나 아프면 휴재 안내문도 못쓰나.. 싶어서 전화했더니 전화도 안 받고, 일단 내가 안내문은 올렸는데.. 걱정이 돼서 말이지”
안내문이란 말을 듣자마자 하나는 인터넷에 들어가 호진의 웹소설이 등록된 사이트에 접속했다. 편집자 말대로, ‘작가의 건강상 문제로 1주일 휴재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신 팬 분들의 양해 바랍니다.’ 라는 안내문이 올라와 있었고, 등록된 시간은 오후 1시였다.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은 하나는 호진이 진짜 위험에 빠졌다는 확신과 함께 더욱 공권력이 간절해졌다. 위험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건 사랑 따위가 아닌 진짜 힘이었기 때문이다. 공권력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든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했지만, 어떻게 찾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자책감과 불안감이 폭발하려는 순간, 자켓에 들어있던 편의점 영수증이 하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수요일 오후 4시. 2000원짜리 음료 1병이 찍힌 CU편의점 영수증.
영수증에 찍힌 편의점 주소를 네이버 지도에 찍어보니 신림역 3번 출구 바로 앞으로 나왔다.
수요일은 호진이 허리디스크 치료를 위해 한의원을 방문하는 날이고, 한의원은 신림동에 있었다. 수요일 오후 4시라면, 한의원을 나온 후 편의점에 들른 시간일 것이다.
호진이 다녔던 한의원 이름은 몰랐지만, 결제된 편의점 근처 한의원을 뒤지면 그가 다닌 한의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해당 병원에 그의 주민등록번호가 남아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의원에서 순순히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진 않겠지만, 가만히 방안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병원에 가서 진상 짓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나는 신림역으로 향했다.
신림역 3번 출구 앞 CU편의점과 가장 가까운 한의원은 길 건너 SK텔레콤 매장 2층에 있는 다이어트 전문 한의원이었다. ‘다이어트’ 전문이란 것도 걸렸지만, 호진이 음료수 하나를 사기 위해 굳이 길을 건넜을 것 같지는 않아서 하나는 길을 건너지 않은 채 3번 출구와 가까운 한의원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하나는 3번 출구 위쪽에 위치한 맑은샘 한의원으로 들어가 매주 수요일 오후 추나 치료를 받기 위해 오는 ‘김호진’ 환자의 진료영수증을 뽑고 싶다고 말했다.
“보험사에 제출할 거예요. 부인인데 대신 받아달라고 해서요.”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해당 한의원이 맞으면 그 때부터 주민등록번호를 알려 달라 생떼를 쓰거나, 안면이 있는 김형사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김호진이란 환자는 없었다.
이후 7개의 한의원을 더 방문했지만, 26살 ‘김호진’이란 남자 환자는 아무 곳에도 없었고, 겨우 호진의 흔적을 찾은 것이 저녁 6시 40분. 한의원을 찾아 헤맨 지 1시간이 넘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