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유현수씨네요?”
핸드폰 속 사진을 본 간호조무사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1분 전,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방문한 김호진에 대해 물었을 때, 볼이 통통하고, 솜털이 뽀송한 조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매주 그 시간에 오는 분은 있지만.. 김호진님은 아니세요’라고.
돌아서는 하나를 붙잡은 건, 창밖으로 보이는 목련나무였다. 호진은 한의원의 가장 나쁜 점으로 치료실에서 보이는 목련나무를 꼽았다.
“부모님 화장했던 곳에 목련나무가 많았거든. 그래선지.. 목련꽃을 보면 기분이 좀 그래.. 괜히 부모님 생각도 나고.. ” 치료 받을 때마다 목련나무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다는 호진의 말이 떠올라서, 하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 핸드폰을 꺼내 조무사에게 호진의 사진을 보여줬다. 혹시 이 남자를 아냐고 물으면서.
놀랍게도 그녀는 호진을 알아봤다. 하나가 말한 것처럼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방문한 추나치료 환자로, 이름은 유현수라고 했다.
“유현수? 그 이름으로 치료 받았어요?”
“네..” 높아진 하나 목소리에 조금 놀랐는지 솜털 조무사가 슬쩍 몸을 젖혔다.
호진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치료를 받았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괜찮으세요?”
하나 얼굴이 꽤 하얗게 질렸는지, 솜털 조무사 옆에서 한약팩을 포장하던 중년의 여자 직원도 하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저 물 한잔만 주실래요?”
하나의 손이 닿는 곳에 정수기가 있었지만, 허민지란 이름표를 단 솜털 조무사는 군말 없이 물을 따라서 건넸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하나는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호진..” 잠깐 숨을 들이쉬고 하나가 다시 말했다. “유현수가.. 접수할 때 주민등록번호 냈어요?”
“네..”
“그걸로 건강보험 적용 받았고요?”
“네”
하나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았다면, 호진의 본명이 유현수란 뜻이다. 호진은 왜 가짜 이름으로 살았던 걸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도 주민등록번호는 반드시 필요했다.
“주민등록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네?”
“솔직히 말할게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
“네??”
“??”
걱정과 의구심이 가득했던 허민지 조무사 얼굴에 경악에 가까운 놀람이 퍼졌다. 놀라기는 화장이 짙은 중년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자연스럽지 않은 반응이었다.
“왜 그러세요?”
하나의 물음에 데스크 뒤에 서 있는 두 여자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하나가 모르는 일이.
그들이 입을 닫기 전, 하나가 치고 들어가야만 했다.
“이 사람 실종됐어요.”
“!!”
“어제부터 계속 연락이 안 돼요. 사고가 생긴 것 같은데.. 주민번호를 알아야 신고하잖아요. 근데 집에 신분증도 없고, 민번을 알만한 게 전혀 없더라구요. 그래서 찾아다닌 건데.. 황당하게.. 조무사분은 이 사람이 유현수라면서요. 전 그런 이름 들은 적 없고, 김호진으로 알고 있거든요.”
“…”
“진짜 유현수라면 제가 속은 거고, 아니면.. 신원도용을 한 거잖아요. 둘 다 범죄에 해당하니까 경찰에 신고하게 주민번호 좀 알려주세요. 네?”
“…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허민지 조무사가 어렵게 입을 뗐다. 하나가 치고 들어가기 전, 중년 직원이 동료의 말에 힘을 실었다.
“환자 정보를 그냥 드릴 순 없거든요. 개인정보보호법에도 위반되고.. 의료법 위반이기도 하고... 차라리 경찰한테 가서 그 얘기 해보세요. 그게 제일 확실할 거 같은데요.”
“…”
순순히 내어줄 태세가 아니었다. 진상을 떨 수도 있었지만, 자칫 엉뚱한 경찰이 출동해서 상황만 더 복잡해질 수 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는 가장 확실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30분 뒤 김형사가 도착할 때까지 하나는 한의원 대기실 쇼파에 앉아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의사 가운을 입은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입구 정수기에서 물을 먹는 척하며 하나를 살피다 접수대 뒤쪽 커튼이 쳐진 약제실로 들어갔고, 허민지 조무사와 똑같은 복장의 깡마른 30대 조무사가 하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약제실로 들어갔다. 약제실에서 어떤 대화가 오갈지, 대화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소곤거림과 커튼 틈 사이로 보는 시선은 불편했고, 그럴수록 하나는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벽에 걸린 사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한쪽 벽이 모두 직원 사진일 정도로 유난히 사진 액자가 많은 병원이었다.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한의사 2명의 약력 소개 액자였고, 그 옆으로 조무사들끼리의 친목 사진, 한의사와 조무사들 간의 셀카 사진 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근무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듯.
관심은 없었지만, 사진에 시선을 둔 이상 한의사들의 약력 소개부터 조무사들 사진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다. 한의사는 방금 물을 마시러 나왔던 50대 남자와 아직 보지 못한 깡마른 40대 여자였다. 남자는 추나 치료를 전문으로 내세웠고, 여자는 안면마비 치료를 전문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 외 사진들은 셀카에 가까운 친목 사진들로 등산복을 입고 산에 서 있는 사진이거나, 자유로운 복장을 한 채 식당에서 찍은 사진, 한의원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들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 인물들은 깡마른 40대 여의사와 20대 젊은 여자만 빼고 모두 현재 한의원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허민지 조무사가 한의원에 없는 20대 여자와 특히 친한 지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찍은 사진 아래에는 ‘지은 언니의 1주년을 축하하며’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보기 시작한 사진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꾸 하나의 시선이 축하 글이 적힌 사진으로 향했다.
지은이란 여자가 눈에 띄는 미인이어서 일까? 지은이란 흔한 이름이 낯익어서 일까?
한참 사진을 들여다본 후에야 하나는 무엇이 이상한지 깨달았다.
두 명의 조무사 뒤로 사진을 찍는 남자가 거울에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반쯤 가려지긴 했지만 그는 호진이었다.
11.
김형사가 도착한 건 한의원문이 닫기 직전인 7시 20분이었고, 하나가 호진의 사진을 발견한지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10분 사이 하나는 많은 것을 알아냈다.
예상대로 거울에 비친 남자는 ‘유현수’이며, 사진 속 미인은 ‘최지은 간호사’였다. 같은 조무사였지만, 대형 한방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조무사가 아닌 간호사로 불렸고, 허민지 조무사의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유현수가 최지은을 좋아했고, 스토킹 수준으로 쫓아다녀서 최지은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집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데요.”
허민지가 흥분해서 덧붙였다.
“우리가 같은 날 안 쉬는 거 알고 저 근무할 때 몰래 찾아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신고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은 언니가 또 마음이 약해서 막상 신고는 못하더라고요. 같은 고향출신이고 부모님끼리 서로 아는 처지인데 어떻게 신고하냐고. 그런 상황인데 남편이라고 하시니까 제가 얼마나 놀랬겠어요.”
부모님 끼리 알아? 같은 고향 출신?
호진은 자신이 서울 토박이고,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허민지는 호진이 지은과 같은 고향에 부모님도 안다고 했다. 최지은이 틀렸든, 하나가 틀렸든, 둘 중 하나는 틀린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고향이요?”
“네 언니 고향이 진교거든요. 같은 중학교 선후배랬어요”
진교.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하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허민지도 입을 닫고 걱정스레 바라봤다.
“… 최지은씨도 이 사람을 유현수라고 했다는 거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네.. 근데.. 그 이름 처음 듣는 거예요?”
“…”
대답을 못하는 하나가 불쌍해보였는지, 허민지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던 유현수의 주민등록번호 앞 6자리를 ㄴ알려줬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보자 하나는 더욱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유현수는 그녀가 알고 있던 호진의 나이보다 4살이 더 많았고, 생일도 8월이 아닌 11월이었다.
**
“유현수요?”
“…”
“애인 이름이 김호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 못지않게 김형사도 이 상황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신원 조회 부탁드리는 거예요. 지난 4년간 쭉.. 김호진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 이름이 아니라잖아요.”
“…”
“건강보험을 적용받았으니.. 유현수란 사람은 진짜 있는 사람이란 말이고.. 그럼 둘 중 하나가 되겠죠. 호진이가 유현수 신원을 도용 했거나.. 진짜 유현수거나.”
호진이 신원을 도용한 게 나은지, 유현수가 본명이고 하나만 등신 같이 속은 게 나은지 하나는 쉽게 판단이 안 섰다.
“언제부터 연락이 안됐습니까?”
“어젯밤부터요”
“왜 연락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짐작 가는 거 없습니까?”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싸우지도 않았고, 문제가 생긴 것도 없어요. 갑자기 집을 나갔고, 그 뒤로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심지어 일하는 곳에는 아파서 일주일 쉰다고 했데요. 나한테는 아무 말 없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자꾸 목이 메는 느낌이 들었다. 김형사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어서, 하나는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거 흔한 일 아니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묵묵히 듣던 김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사람이 날 찾아왔습니다.”
“호진이가요?”
“정이나 살인범을 만나게 해달라더군요.”
“!!”
“안 된다고 하니까 바로 돌아가긴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현 지구대까지 찾아가서 그 사람 신원을 확인했답니다. 가족인 척 했던 것 같은데.. 왜 그랬는지 짐작 갑니까?”
호진이 이나 살인범을 만나려고 했다고? 왜?
하나 머릿속에는 ‘왜?’라는 질문 외 다른 질문이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사람 키가 175정도 같던데 맞습니까?”
김형사는 하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발 사이즈는 270. 왼손잡이에 약간 마른 체형”
그가 말한 것은 이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흔적이었지만, 호진의 사이즈이기도 했다. 하나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힐 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김형사는 그런 하나를 가만히 바라만 봤다.
“집에 가 있으세요. 알아보고 전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