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흥신소 건물을 나오자 눈부신 햇살 때문에 하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어둑한 건물 내부와 외부의 밝기 차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겨우 눈을 뜨자, 이번에는 허기가 몰아쳤다. 전날 점심부터 거의 먹은 것이 없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했다.
바로 앞에 익숙한 프랜차이즈 김밥집이 있고, 통유리 너머 김밥을 싸는 아줌마의 손길이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하나는 김밥집을 들어가는 대신 그녀 앞을 지나가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후, 하나는 303호 남자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열었다. 303호 남자는 하나에게 지갑에 든 돈의 양을 물었고, 그 만큼의 정보를 주겠다고 했다. 40만원을 건네고 받은 봉투는 얇았지만, 꽤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송호진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적힌 A4 종이 한 장, 의료기록 내역, 사진 몇 장이었다.
송원진. 31세.
거주지 : 면목동 현대아파트 702호
가족 관계 : 어머니 이희정 (58)과 함께 거주. 아버지 송정학은 8년 전 사고로 사망.
진교 중학교 졸업
진교 고등학교 졸업
한국대 경영학과 졸업.
제노제약 홍보팀 대리로 근무하던 중 한 달 전 퇴사.
드디어 흩어져 있던 점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선은 진교시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온 송원진, 최지은, 김호진, 현재 진교시에 살고 있다는 유현수였다.
두 번째 선은 면목동과 중랑 톨게이트였다.
아반떼 하이패스에 찍힌 중랑 톨게이트는 면목동에서 멀지 않는 거리고, GS칼텍스는 면목동 현대아파트에서 중랑 톨게이트를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경로 상 호진은 송원진을 만난 후 주유소에 들렀다가 중랑 톨게이트를 지나 진교시로 향한 것이 분명했다.
호진은 왜 송원진을 만나려 했을까? 송원진을 만나고 진교시로 가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송원진의 의료기록은 그가 가짜 자백을 했다는 증거품이었다.
한 장짜리 의료기록에는 OO내과, XX치과 같은 치료받은 병원 이름만 적혀 있었고, 병명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병원이름을 통해서도 상태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303호 남자는 송원진이 다닌 신경정신과에만 형광펜으로 색칠을 했고, 색칠된 곳은 8년 전과 한 달 전 딱 두 군데였다. 8년 전에는 5개월간, 매주 병원을 방문한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한 달 전에는 딱 1번만 병원을 간 것으로 나와 있었다. 김형사는 송원진이 우울증 때문에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가짜 자백을 했다고 했다.
병원 방문 횟수가 우울증의 강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거짓 자백을 할 정도로 심한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치고는 병원을 간 숫자가 지나치게 적었다. 송원진의 우울증에 더욱 의심이 간 것은 303호 남자가 붙여놓은 메모 때문이었다. 메모에는 ‘올해 겨울 결혼 예정, 상견례 마침& 퇴사 사유는 사업 런칭. 현재 사무실 계약 직전 단계’ 라고 적혀 있었다. 결혼과 신규 사업 런칭을 앞둔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물론 결혼과 신규 사업 런칭이 주는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올 수도 있고,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병든 사람일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자연스럽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하나의 의심에 가장 쐐기를 박은 것은 제노제약 홈페이지에서 뽑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4년 전, 신입사원 연수 때 찍은 사진으로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사진 아래 적힌 날짜는 이나가 죽었던 2월 17일 이었다. 신입사원 연수 도중 몰래 빠져나와 서울에 있는 이나를 죽이고, 강원도로 돌아갔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가해자가 남자이고, 피해자가 여자라지만, 깁스를 한 상태로 사람을 찔러 죽이기는 어려웠고, 계단에서 스쳤던 남자도 깁스를 하고 있지 않았다. 즉, 송원진은 절대 범인일 수 없었고, 자신이 범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다. 한 달 전 신경정신과를 간 것도 ‘우울증’이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범인이 아닌 건 확실해졌지만, 왜? 라는 질문은 더 강해졌다.
왜 송원진은 이나를 죽였다는 거짓말을 했을까? 무슨 이득이 있어서?
풀리는 의문은 없는데, 새로운 질문은 계속 추가되고 있었다.
**
면목동 현대아파트는 지어진지 20년이 넘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도어락이 없고, 경비실에는 ‘순찰 중’ 푯말뿐이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후였다.
702호 초인종을 누른다고 순순히 문을 열어줄까? 송원진이 하나를 못 알아볼 리 없고, 그녀를 알아본다면, 문을 열어줄 리 없다. 문을 열라고 난장을 피웠다가는 경찰이 출동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어떻게든 조용히 해결해야 했다.
송원진을 설득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7층에 도착했고, 하나는 702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시죠?”
세 번째 초인종을 눌렀을 때 인터폰 속이 아닌 하나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동그란 큰 눈과 작고 예쁜 코를 가진 30대 초중반의 여자였다.
“송원진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신데요?”
하트 팬던트가 달린 팔찌를 찬 여자는 햇살이 눈부신지 왼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며 다가왔다. 여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작고 가는 반지가 햇빛에 반짝였다.
얼마 전 상견례를 했다는 송원진의 예비신부가 이 여자일까?
송원진이 가짜 살인범 행세를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기 원치는 않을 것이다. 연인이라면 특히 더. 못마땅한 남자였지만, 연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하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기로 했다.
“마포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수요일에 뺑소니 목격하셨다고 신고하셔서요. 진술 때문에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그게 다예요?”
여자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저께 어떤 미친놈이 갑자기 원진씨 때리고 가서 신고했는데.. 그건 왜 조사 안 해요?”
누군가 송원진을 때렸다? 목요일 밤에? 순간 하나 머릿속에 호진의 얼굴이 스쳤다.
“사건이 일어난 게 몇 시였어요? 한 11시쯤?”
“네! 그 때 맞아요! 그 새끼 찍은 영상도 넘겼는데 보셨어요?”
“…”
**
능숙하게 702호의 도어락을 연 고성희는 익숙하게 음료를 따라 하나에게 건넨 후, 다소 흥분한 어조로 목요일 밤에 봤던 폭력 사건에 대해 풀어놓기 시작했다.
목요일. 502호 사는 그녀가 퇴근 후 아파트 앞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0분이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담배를 피우기 위해 흡연구역이 있는 뒷문으로 갔다고 했다. 멀리 남자 하나가 다른 남자를 때리는 걸 봤지만, 직접 나서기에는 무서워 경비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돌아섰다고 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송원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흡연자인 그에게 뒷문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뒤쪽에서 원진씨 벨소리가 들리잖아요. 벨소리야 같을 수 있는데.. 원진씨는 전화를 안 받고, 전화벨 소리는 계속 울리고..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그래서 가보니까 원진씨가 쓰러져 있는 거예요. 때린 놈은 이미 사라졌고! 내가 전화하니까 놀래서 도망친 거겠죠”
“…”
“원진씨는 그냥 시비 붙은 거라고 신고하지 말라는데 그게 말이 돼요? 아. 진짜 그 때만 생각하면”
고성희는 그날의 화가 가시지 않은 듯 말을 하는 도중에도 연신 물을 들이켰다.
하나는 가만히 고성희의 말을 듣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녀의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폭력’만큼 호진과 먼 단어도 없어서 때린 사람이 ‘호진’이란 생각이 들지 않기도 했지만, 선반을 가득 메운 액자들에 자꾸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얼핏 봐서는 특별할 게 없는 사진들이었다. 송원진 독사진이거나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었고, 스무 살 이전의 사진들은 거의 없었다. 간혹 초등학교 때나 중고등학교 때의 사진이 있긴 했지만, 모두 여행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즉, 진교에서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던 것이다. 진교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진교의 사진이 없다는 건 우연의 일치일까, 사진에 머물던 시선이 고성희의 얘기로 돌아온 건 ‘동영상’이란 단어가 나오면서 부터였다.
그냥 넘기려는 송원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고성희가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차들을 수소문한 끝에 당일 장면을 찍은 블랙박스 영상을 찾아냈고, 경찰에 넘겼다는 것이다. 영상을 보여 달라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고, 두 여자가 기다리던 남자, 송원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를 눌러쓴 그의 눈과 코 주변에는 푸른 멍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나를 본 송원진은 잠깐 놀라는 듯 했지만, 금방 체념한 듯 하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 했다.
**
햇살이 화창한 4월 이었지만, 놀이터는 노는 아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하나는 유일한 벤치에 앉아 송원진의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트북에서는 고성희가 말한 블랙박스 영상이 플레이 되고 있었다.
밤이어서 전체적으로 어둡고 흐릿했지만, 영상 속 풍경이 아파트 뒷문 앞 골목이란 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두운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한 남자가 그늘 아래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호진임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송원진이 아파트 뒷문에서 골목으로 나오자, 호진은 담배를 비벼 끈 후 그에게 다가갔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호진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뭔가를 때리기는커녕, 화를 내는 모습도 본 적이 없던 터라, 하나는 폭력적인 호진이 낯설기만 했다. 놀라운 것은 송원진의 반응이었다. 계속 되는 주먹질에도 그는 피하기만 할 뿐 맞서는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진이가 왜 때린 거예요? 뭐라고 하면서요?”
“준이 시켰냐고.. 물었어요.”
“준? 그게 누군데요?” 하나의 질문에 송원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송원진이 범인이 아니란 것은 하나가 호진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그가 범인이 아니란 건 알 수 있다 치지만, 왜 거짓말을 했는지 따지지 않고, 누가 시킨 일인지를 따진 것일까?
하나도 송원진이 왜 거짓 자백을 했는지 의아했지만, 누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호진은 왜 그렇게 물었을까? 그리고 ‘준’은 누굴까?
“경찰서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호진이가. 그 때도 그렇게 물었어요? 누가 시켰냐고?”
송원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랬어요?”
“저도 모르는 여자라고 했어요.”
“여자?”
용무늬 점퍼 차림의 여자가 하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주유소 CCTV에서 캡쳐한 그녀의 사진을 보여줬지만, 송원진은 고개를 흔들며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회사로 전화가 왔더라구요”
여자는 ‘아현 지구대에 가서 이 여자를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해’ 라고 요구하며, 이나 사건에 대해 정리한 스크랩북을 택배로 보냈다고 했다. 그 스크랩북 덕에 김진만 형사 앞에서 그럴 듯하게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진짜 살인범도 아니니까. 나중에 술 취해서 헛소리 한 거라고 하면 된다고 했어요. 제가 예전에 우울증 때문에 병원 다닌 것도 알고 있고, 자살시도 한 것도 알고 있더라구요. 만약 잘못된다 해도 우울증 때문이고, 술에 취해서 헛소리 한거라고 하면 심신미약 처리 될 거고, 최악 이래봤자 공무집행 방해인데 그건 전과에 안 남는다구요”
“그래서 그걸 했어요?”
“…”
“그 전에 사람 죽였다고 거짓말 한 것도.. 그 여자가 시킨 거였어요?”
“미리 테스트 하는 게 낫다고 해서..”
하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우울증과 심신미약이란 핑계거리가 있다지만 자칫 진짜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는데 사람을 죽였다는 거짓말을 하다니. 그런 일을 시킨 여자도, 순순히 따른 송원진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뭘까? 그들이 재미로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었다.
“왜 그랬어요?”
송원진이 하나를 바라봤다.
“그냥 했을 리는 없잖아요. 목적이 뭐예요? 그 여자가 뭐랬기에 그런 일을 했냐구요.”
두려움이 가득했던 송원진의 눈빛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당신은 모르는 거야? 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송원진의 눈에 안도감과 약간의 기쁨이 감돌았다.
“여기 온 거 경찰은 알아요? 모르죠? 아니..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요?”
“…”
상황이 역전되었다. 송원진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은 상태여서 하나는 이대로 송원진을 보낼 수 없었다.
“김호진씨가 사라졌어요”
“…”
“송원진씨 만난 이후에”
“전 아무것도 안했어요. 이 남자가 누가 시킨 건지 묻다가 갑자기 가 버렸다구요”
“그 뒤로 그 여자한테 연락 안 왔어요? 살인범 행세하라고 시킨 여자요.”
“안 왔어요”
“그 여자가 누군지 짐작 안 가요?”
“전혀요” 송원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여기 까지 했으면 좋겠네요.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송원진씨! 동생이 죽었는데, 이제는 같이 사는 남자친구도 사라졌어요. 송원진씨 거짓말 때문에. 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미안합니다. 정말로요. 하지만 제 상황이었으면 그쪽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 상황이 뭐 어쨌길래! 그 여자가 뭐라고 했길래 그런 짓을 했냐구요!”
송원진의 얼굴에는 단단한 침묵의 그림자가 씌워졌다.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는 듯이.
하나의 핸드폰이 울린 것이 그 때였다.
박부진이나 김형사였다면 절대 받지 않았겠지만, 핸드폰 화면에는 받지 않을 수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아반떼를 발견했던 오천 파출소 윤형식 경장의 번호였다.
“정하나씨” 라고 운을 뗀 윤경장은 잠시 머뭇댄 후 “김호진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나왔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