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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작가 : 달려라
작품등록일 :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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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 8년 전
작성일 : 18-12-10     조회 : 405     추천 : 0     분량 : 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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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학교로 돌아오니 이미 수업은 끝나 있었다. 하나는 보충수업 대신 자율학습을 선택했던 터라,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앉아 문제지를 펼쳤지만, 공포에 질린 이나 눈동자가 떠올라 좀처럼 수학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하나가 기숙사 딸린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이나는 충격 때문에 일주일간 하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16년간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도 있지만, 술만 마시면 때리는 아빠와 정서적 학대를 일삼는 엄마 사이에서 16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팀목 절반이 떨어져 나가겠다 선언했으니, 남은 한쪽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나 역시 이나 허락 없이는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할 생각이 없었기에 원서를 쓰기 전 일주일이 하나 인생에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차분하고, 똑 부러지고, 공부도 잘하는 하나가 전교 꼴찌를 다투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기만 하는 이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하나가 몰래 허벅지에 칼자국을 내는 걸 알고, ‘네가 하면 나도 할 거야’라며 칼을 드는 바람에 하나의 자해습관이 멈췄고, 아빠가 술을 먹고 들어왔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이 벽장이란 것을 알아낸 것도 이나 였다. 심지어, 아빠의 폭력을 완전히 멈추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

 이나가 입을 닫은 지 7일째 되는 날, 술 취한 아빠가 하나 머리를 테이블로 내리쳐서 하나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나는 사고가 났다. 하나는 기절했던 탓에 몰랐지만, 숨어서 지켜보던 엄마 말에 따르면, 이나가 칼을 휘두르며 아빠를 죽이겠다고 날뛰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나의 칼날이 더 빨라서 아빠의 손이 베였었다. 평소라면 더 폭력적으로 반응했겠지만, 이나가 얼마나 살기 가득했는지, 칼을 얼마나 빠르게 휘둘렀는지 아빠도 움찔하더니 욕을 하며 집을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빠의 폭력이 멈추었고, 멍 때문에 학교를 못가는 일도 사라졌다.

 이나가 ‘외고 가. 대신 20살이 되면 여기 떠나서 우리 둘만 살자’라고 했을 때 하나는 울었다. 자신을 보내주는 이나가 고마워서. 이 지옥에 이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게 미안해서.

 다시 이나 옆구리에 난 멍이 떠올랐다. 아빠 때문일까? 아닐까? 아니라면, 왜 생긴 걸까?

 평범한 상황이라면, 넘어져 생긴 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평범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었으니 평범하게 생각할 순 없었다.

 이나에 대한 생각에 얼마나 사로잡혔는지, 하나를 찾는 방송이 나왔음에도 멍하니 교과서만 보고 있었다가 옆자리 친구가 그녀를 치는 바람에 겨우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급히 교무실로 호출된 것은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까 당장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전화.

 중학교 때, 엄마 박부진은 학교로 전화를 자주 했었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집으로 오라고.

 가보면, 아빠가 부셔놓은 탁자를 함께 치우거나, 깨진 유리창을 치우는 일 같은 거였다. 그런 일 때문에 수업 중인 딸을 부르는 게 말이 안 됐지만, 박부진은 그런 엄마였다.

 평소라면 ‘급한 일’이란 말에 깨진 유리창을 떠올렸겠지만, 오늘만큼은 이나가 떠올랐다. 하나는 즉시 이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나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지만, ‘당장 와’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기말 고사기간이야. 무슨 일인데’ 라고 재차 묻자 엄마는 ‘미친 년’ 이란 욕설과 함께 ‘오라면 그냥 와’라는 말을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나는 늘 ‘희생하지 마. 네가 원하는 게 항상 1순위야’ 라고 말했고, 이틀 뒤가 기말고사였으니 이나 말대로라면, 하나는 진교에 가면 안 되는 것이다. 기말고사를 망치면 장학금을 받지 못하고,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하나는 외고를 다닐 수 없으니 일반고로 옮겨가야 한다. 부모님들이 비싸다는 이유로 외고 등록금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반고로 옮긴다는 것은 지옥 같은 진교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고, 이나도 오지 말라 했겠지만, 하나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나의 불안한 눈빛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25.

 7시에 출발한 버스가 진교시 월진동에 도착한 것은 8시 30분이었다. 평소보다 20분 정도 늦은 것은 경찰서 주변이 꽉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히는 일이라고는 없던 한적한 소도시였기에 승객들 여기저기에서 ‘사고’ 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차가 막히는 이유는 경찰서 주위를 빽빽이 둘러싼 KBS, MBC, SBS 공중파 3사 방송사와 각종 신문사 마크를 단 차량과 카메라들 때문이었다. 승객들 중 누군가 ‘뉴스 좀 틀어봅시다’라고 외쳤고, 기사가 라디오 뉴스 채널을 틀었다.

 “A씨를 살해한 범인으로 죽은 C양 외에 C양 친구인 J양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진교시 외곽 오천읍 별장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 이란 뉴스가 나올 때 갑자기 경찰서 쪽에서 화려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점퍼를 뒤집어 쓴 소녀가 경찰들에게 이끌려 건물을 나오고 있었고, 기자들이 그 소녀를 향해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버스 승객들도 소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더 뺐고, 아예 상체를 내민 사람도 있었지만, 번쩍거리는 플래시와 빽빽한 기자들 때문에, 소녀 얼굴은커녕 점퍼 그림자도 보기 힘들었다.

 

 버스를 탄 직후부터 문자와 전화를 계속하던 박부진은 하나에게 집이 있는 교동이 아닌 월진동에 내리라 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박부진이 서 있는 걸 보고 하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박부진이 딸을 마중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자” 박부진이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하나가 ‘무슨 일이야?’ ‘이나도 있어?’ 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지만, 박부진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앞으로 나갔고, 하나는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박부진이 향한 곳은 진교한방병원이었고, 별관에 위치한 직원 휴게실이 최종 목적지 였다.

 온돌방으로 된 휴게실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있었다.

 병원 인사과에서 일하는 아버지 정석우와 약재상을 운영하는 현준 부모님이 온돌방에 걸터앉아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이나의 절친 현준은 방 안쪽 구석에 앉아 무릎을 세운 채 얼굴을 묻고 있었다. 박부진은 하나를 방안 쪽으로 밀어 넣은 후 남편 정석우 옆에 앉아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나도 어른들의 대화가 궁금했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와 굳은 표정들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휴게실에서 그나마 만만한 상대가 현준이어서, 하나는 구석의 현준에게 다가갔다.

 2년 만에 본 현준은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키가 부쩍 컸기도 했지만, 살이 많이 쪄서 하나가 아는 현준이 아닌 것 같았다. ‘현준아’라고 불렀지만, 현준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준의 손등은 피딱지로 지저분했고, 흐트러진 교복 셔츠 옆구리에도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하나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는 한 현준은 누군가와 싸울 얘가 아니었다. 그 때 누군가 휴게실 문을 두드렸고, 놀란 현준이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본 현준의 얼굴은 더 끔찍했다 눈 주위에 퍼렁 멍이 들어 있었고, 실핏줄이 터져 눈동자 전체가 빨갛게 충혈 된데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맺혀 있었다.

 하나가 바로 옆에 있는 걸 모르는 듯, 현준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만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부모님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있어서 문을 연 남자가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였고, 180cm에 100kg인 아버지에 완전히 가려진 걸 보면, 180cm보다는 작고 마른 체형인 것 같았다.

 남자가 머문 시간은 채 1분이 되지 않았고, 남자가 사라지자 현준의 긴장도 풀리는 듯 했다.

 “유현준.” 현준은 그제야 하나를 알아본 듯 한 얼굴이었다. “이나한테 무슨 일 생겼어?”

 현준이 대답하기 전, 부모님이 그를 부르는 바람에 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가 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현준은 휴게실을 나서고 있었고, 정석우와 박부진도 나갈 채비를 하더니, 박부진이 ‘너 여기 잠깐 있어. 밖에 나오면 절대 안 돼!’ 라고 외치고는 그대로 휴게실 문을 닫았다.

 “엄마!”

 뒤늦게 문 쪽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문은 밖에서 잠근 뒤였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급한 일’이라는 말 때문에 학교도 빼먹고 왔는데, 이런 쪽방에 갇히다니, 어이가 없고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나가 늘 말했듯 ‘찌그러져 있어봤자 내 손해’여서 하나는 화를 내기 보다는 직접 나가기로 했다.

 휴게실을 둘러보니, 창문은 없었지만, 환기를 위한 쪽창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나가기에는 너무 높고 작은 창이었지만, 하나처럼 깡마른 몸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의자를 끌어다 쪽창 아래 놓고, 올라서니 다행히 어깨까지는 창문에 닿았다. 창문을 열자, 병원 마당과 병원 본관이 보였다.

 경찰서만큼은 아니었지만, 병원 마당에도 방송국과 신문사 차량이 꽤 많이 있었고,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소리를 치면 그들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크게 소리를 치려는 순간, 하나의 입을 닫게 만드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소년이 경찰에게 양팔이 잡힌 채 본관 건물을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그는 현준이었다. 소년을 발견한 기자들은 경찰서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 왜 현준이 경찰에게?

 현준 뒤로 우는 현준 엄마와 달래는 박부진. 정장 차림의 낯선 남자와 얘기하는 정석우와 현준의 아빠가 보였다. 갑자기 경찰서에서 점퍼를 뒤집어 쓴 채 나오던 소녀가 떠올랐고, 하나의 심장 박동수가 빨라졌다. 휴게실 온돌방 안쪽에 작은 TV가 있어서 하나는 TV를 틀어 뉴스 채널을 찾았다. 뉴스에서는 한방병원 마당이 비춰지고 있었고, 이를 본 하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저는 지금 오천읍 별장 화재사건 용의자인 H군이 숨어 있다는 한방병원 앞에 나와 있습니다. 화재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은 J한방병원 이사장인 A씨로 밝혀졌으며, 미성년자와 찍은 성관계 동영상 때문에 지속적인 협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영상을 찍고, 협박한 당사자는 18살 H군과 J양으로.. 아. 지금 용의자 중 한 명인 H군이 경찰에 연행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한방병원 마당에서 열심히 떠드는 여자 뒤로, 경찰차에 태워지는 현준이 보였다.

 하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J양. 그녀가 이나일까?

 아냐.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나의 꿈이 모델인 탓에 10대 답지 않은 요란한 화장과 화려한 복장 탓에 날라리라 손가락질 받기도 하고, 사람들 입방아에 여러번 오르내렸지만, 이나는 단순히 공부를 싫어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10대 소녀일 뿐이었다.

 절대, 성관계 동영상을 몰래 찍고 누군가를 협박하고, 사람을 죽였을 리 없었다. 하나는 이 모든 것이 몹쓸 오해나, 누군가의 모함이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깨지는 데에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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