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비밀과 거짓말
작가 : 달려라
작품등록일 :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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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다시 토요일
작성일 : 18-12-10     조회 : 388     추천 : 0     분량 : 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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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현재, 다시 토요일

 

 액자 앞에 허물어져 앉은 박부진의 목에서 끅끅 거리는 마른 소리가 새어나왔다.

 8년 전, 이나를 만나고 나오던 날, 유치장 담벼락 아래 주저앉은 채 내던 목소리가 딱 지금과 같았다. 18년간 남편에게 맞으면서, 딸들이 맞는 걸 보면서도, 이혼녀는 실패한 인생이란 이유로 이혼을 거부하던 사람이 박부진이었다.

 하지만, 8년 전 사건으로 이나가 진교를 떠날 처지에 놓이자, 박부진은 미련 없이 이혼서류를 내밀었고, 이나와 함께 떠나겠다 선언했다. 그녀는 하나에게 엄마를 따라갈지, 아빠와 함께 남을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엄마도, 아빠도 싫었지만, 이나와 떨어질 수 없었기에 하나는 엄마를 선택했고, 담임의 반대에도 불구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담임은 하나가 서울대를 못 갈까봐 걱정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전학 후 반년도 안 돼 하나는 자퇴를 했고, 법조인은커녕, 대학 진학의 꿈을 영원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끅끅거리는 소리를 멈추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은 지 한참 만에 박부진이 한 말은 “엄마랑 가자”였다. 재혼한 남편과 사는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내가 왜?”

 박부진이 하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쟤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여기 있겠다고? 쟤 현준이야..”

 “그러니까 그게 왜? 8년 전 일이랑 현준인 상관없다고 결론 났잖아”

 “그건!” 박부진이 순간 말을 삼켰다.

 “왜? 내가 모르는 거라도 있어? 설마 현준이가 저지른 일이야? 이나가 누명 쓴 거고?”

 하나의 말이 거슬리는 듯, 박부진이 잠깐 하나를 노려봤다. “그 놈도 잘못은 했어”

 “사람은 안 죽였잖아”

 “이나도 마찬가지야!”

 “진짜? 확실해? 이나 무죄인 거 맞아?”

 “하나.. 너..”

 8년 간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사실.

 판사가 판결한 무죄가 진짜인지, 아닌지. 이나가 A씨와 C양을 죽인 것인지, 아닌지.

 진짜 무죄라면 서울로 이주한 후 죽기 전까지 4년간, 이나는 왜 그렇게 자신을 자해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을까. 빛나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방안에 갇힌 삶을 고집스레 유지했을까. 세상 누구보다 이나를 사랑했지만, 그녀에 대한 하나의 의심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박부진이 조심스럽게 하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하나가 뭔가를 아는지, 단순히 넘겨짚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판사님이 그랬잖니. 무죄라고. 그게 맞아. 이나랑 현준인 그 놈 죽은 거랑 아무 상관없어”

 한참 만에 박부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가 현준이랑 엮이지 말라는 건.. 현준이 부모님이랑 한 약속 때문이야. 이나랑 현준이 절대.. 다시는 안 만나도록, 서로 잘 지키자고 했거든. 그런데 너랑 같이 살았다고 하니까 엄마가 놀랄 수밖에.. ”

 “준이가 누구야?” 상상도 못한 질문인지 박부진의 입과 눈이 커졌다.

 “이나랑 준이랑 무슨 관계야?” 박부진은 입술만 달싹거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아는 것이다. ‘준’이 누군지. 모른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현준은 송원진에게 ‘준이 시켰어?’ 라고 다그쳐 물었다고 했다.

 ‘준이 시켰다’

 송원진이 범인이 아니란 것뿐만 아니라, 범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범인은 모른다 치더라도 최소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연결고리는 갖고 있다는 뜻이다.

 현준 뿐 아니라, 박부진도 ‘준’을 안다는 것은 ‘준’이 8년 전 이나와 관련된 사람이란 뜻이고, 그가 누군지 알면, 8년 전 이나가 저지른 일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이나를 죽인 범인이 누군 지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엄마 알지?”

 “…”

 하나의 시선을 피하던 박부진의 손이 가방 손잡이를 더듬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불편하고 귀찮은 일은 피하려는 것이다. 박부진의 뜻대로 도망가게 둘 순 없었다.

 “현준이 부모님한테 물어볼까?”

 “!!”

 “가족들이 모두 진교시에 있던데. 내가 직접 물어봐? 당신 아들이 이나 쌍둥이 언니랑 동거했다는 얘기 하면서?” 치켜 뜬 박부진의 눈에서 ‘이렇게 까지 해야 겠니’ 라는 뜻이 느껴졌지만, 하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해. 엄마가 아는 게 뭐야”

 하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안 박부진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 걘 한국에 없어”

 “누군데”

 “나도 몰라. 그냥 이나 친구란 게 다야”

 “엄마!”

 “모른다니까! 넌 얘가 왜 그래? 왜 우릴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옛날 일을 헤집어서 뭘 어쩌려고!”

 “그게 지금까지 영향을 주잖아! 내가 2년이나 같이 살았던 남자가 날 속였어. 심지어 8년 전 그 망할 관련된 놈이고! 그게 정상이야?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잖아!”

 “… 그냥 일어난 일이야”

 “엄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확실한 건 이나는 죄가 없다는 거야! 그래.. 현준이도 죄가 없을 거야. 무죄 판명 났으니까.”

 “그럼 준이는? 걘 무슨 역할이었는데?”

 “몰라”

 “엄마!”

 “진짜 몰라! 이나가 말을 했어야 알지!”

 “…”

 “그 때 그 죽은 놈 처음 만날 때 셋이 같이 있었다더라. 그게 다야”

 “누구..? 이나랑 현준이랑.. 준이가 같이 있었다고? 그 아저씨 만날 때?”

 “…”

 “그리고 또! 또 아는 게 뭐야?”

 “그게 다야! 이제 그만 해. 지금 중요한 건.. 이나가 죽었고, 이나를 죽인 놈이 나타났다가 풀려났다는 거야. 이거야 말로.. 우연은 아니지 않니?”

 “…”

 “쓸데없는데 기운 빼지 말고.. 이나 범인 잡는 거나 도와”

 “뭘 어쩌려고”

 “어쩌긴. 직접 만나서 단판을 지어야지”

 박부진은 직접 김형사를 들볶을 생각이었다. 들볶는다 하여 입을 열 남자가 아니었기에, 하나는 아주 잠깐 송원진에 대해 알려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생각을 지웠다.

 박부진이라면 송원진에게 더 많은 정보를 캐내겠지만, 그의 사회적 삶을 망가뜨릴 것이 분명했다. 범인 행세한 그가 밉긴 했지만, 이나를 죽인 범인이 아니라면, 그의 삶을 망칠 권리는 하나에게도 박부진에게도 없었다.

 

 27.

 검색창에 ‘진교시 별장 살인사건’을 입력하자, 몇 개의 블로그, 뉴스 기사, 카페 게시글 등이 검색되었다. 블로그 게시글만 해도 313건, 뉴스 기사는 101건이었다. 하나의 예상을 배 이상 뛰어넘는 양이었다. 심지어 가장 최근 포스팅한 날짜는 올해 1월이었다.

 하나는 ‘진교시 별장 살인사건’을 제목으로 내건 블로그들을 건너뛰고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지난 6월 25일 오천읍에 위치한 개인 별장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변사체는 진교시에 거주하는 A씨로..’

 

 8년 전, 칼에 찔린 채 불에 타 죽은 남자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나온 기사였다. 예전에 이미 본 기사여서, 하나는 다음 기사를 클릭했다.

 

 ‘A씨 살인 사건 범인 검거’

 ‘진교 경찰서는 A씨(47) 살해 및 방화를 저지른 혐의로 진교시 교동에 사는 J양(18)을 긴급체포했다. J양(18)은 고민상담을 이유로 같은 반 친구인 C양(18)을 여관으로 불러낸 후 술을 먹인 다음, A씨(47)와 성관계를 맺게 했으며, 몰래 찍은 동영상을 빌미로 C양과 A씨를 지속적으로 협박해온 혐의...’

 

 낯설다. 이런 얘기를 듣거나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하나가 아는 이나는 에너지 넘치고, 발랄한 호기심 많은 18살 소녀이지, 같은 반 친구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협박하는 악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진교 별장 살인사건의 범인. 무죄 판정’

 ‘성매매 남성을 칼로 찌른 뒤, 별장에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된 J양(18)에게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지난 6월 25일 오천읍 별장에서 칼에 찔려 죽은 채 발견 된 A씨(47)를 살해한 범인으로 검찰은 J양과 C양을 지목했으나, 재판부는 칼에서 J양의 지문이 나오지 않은 점, J양의 옷에서 핏자국이 나오지 않았고, C양의 옷에만 핏자국이 나온 점을 미루어 C양의 단독 범행이라 판단되는 바, J양에게 살인에 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불이 나는 것을 봤음에도 신고를 하지 않은 점, C양이 별장을 나오지 못했음을 안후에도 구조 노력을 하지 않은 점을 미루어 화재 사건에 대해서는 과실치사를 일부 인정했다.’

 

 대부분 하나가 아는 내용이었다.

 인터넷 채팅방에서 쪽지를 받은 이나가 몇 번의 쪽지교환 끝에 성매매 약속을 했고, 그 자리에 친구 C양을 자신인 척 대신 보냈다.

 술이 취해 잠든 C양을 이나로 생각한 A씨가 그녀를 강간했고, 이나는 그 과정을 몰래 촬영한 후 C양과 A씨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냈다. 액수가 점점 커지고 협박이 반복되자, 견디지 못한 A씨가 이나를 별장으로 끌고 가 동영상을 지우라 협박했다. 그 때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C양이 날뛰기 시작했고, A씨가 그녀를 진정시킨다는 명목으로 폭행을 가했다. C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휘두른 칼에 불행하게도 A가 찔렸고, C는 A를 밀치고 달아나다 난간에서 추락해 목이 부러진 채 즉사했다.

 이 과정을 모두 본 이나는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일에 공포를 느꼈고, 죽어가는 A씨를 그대로 둔 채 달아났고, 그 후 별장에 불이 난 것이 그날의 사건이었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기사 어디에도 현준이나 ‘준’이란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딱 한 번, 현준이 체포되는 사진이 실리긴 했지만, 단순한 참고인이자 목격자로 수사 받은 것일 뿐, 그날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 앞뒤가 안 맞아.

 8년 전 그 때, 하나와 현준의 부모님은 수시로 통화하며 뭔가를 의논했다. 당시에는 이나가 그 사건에 관련됐다는 충격이 너무 커서, 현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현준이 사건과 관련 없다는 경찰의 발표에 하나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박부진은 ‘죽은 놈 처음 만날 때 세 명이 같이 있었다.’라고 했다.

 그 말은 C양에게 약을 먹이고, 이나인 척 방에 밀어 넣을 때, ‘준’ 뿐 아니라, 현준도 현장에 있었다는 뜻이다. 경찰은 그 사실을 몰라서 이나만 관련 있다고 발표했던 걸까. 부모님들이 손을 쓴 걸까. 현준의 부모님과 하나의 부모님이 열심히 통화를 했던 것도 그 때문일까?

 진실을 감추기 위해? 왜? 그렇게 해서 이나가 얻는 것이 무엇 이길래?

 하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가장 이상한 건 ‘준’이었다. 왜 그는 참고인 조사는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일까?

 ‘준’은 누구일까? 그 때 직원 휴게실을 찾아왔던 남자는 누구일까? 그가 준일까?

 하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나가 진짜 ‘과실치사 & 무죄’가 아닌 ‘살인 유죄’ 인 걸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박부진의 말이 맞을 수 있다. A씨와 C양 죽음에 ‘준’이 관련되어 있고, 어쩔 수 없이 이나가 뒤집어 쓴 것이라면?

 8년 전 사건에는 하나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확실한 것도 있었다. ‘준’이란 사람이 현준의 실종에 관련되어 있으며, 둘 다 8년 전 사건의 관련자라는 것.

 현준이 실종 직전, 진교시를 갔다 온 것도 ‘준’을 만나기 위해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가 해야 할 것은 분명해졌다.

 진교시를 가는 것. 진교시로 가서 ‘준’이 누군지 알아내고, 그를 만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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