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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작가 : 달려라
작품등록일 :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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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작성일 : 18-12-10     조회 : 414     추천 : 0     분량 : 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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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A.M 11:00

 

 8년 만에 찾은 진교 약초시장은 하나의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방병원을 제외하고는 진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지만, 하나가 약초시장을 찾은 적은 거의 없었고 시장에 대한 기억도 전무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엘리베이터 딸린 7층짜리 현대식 건물이 아닌 건 확실했다.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이나를 찾기 위해 현준 부모님이 운영하는 약재상에 간 적이 있었다. 약재상은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슬레이트 지붕이 덮인 재래시장 초입에 위치해 있었고, 현준의 아버지는 증기가 푹푹 나오는 약탕기 앞에 서 있었다. 가게 안 작은 쪽방에는 이나와 현준과 나란히 배를 깔고 누운 채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하나를 본 현준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이나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이나는 모른 척 만화책만 보고 있었다.

 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나와 끌고 가려는 하나 사이에 끼여 어쩔줄 몰라 하면서도 현준은 은근히 이나의 편을 들었다. 그에게 하나는 절친의 쌍둥이 언니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하나 혼자 있을 때 길에서 마주칠 때면, 아는 척 하기보다 모른 척 어색하게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 사이였으니 현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흐릿한 기억 중 그나마 뚜렷한 것은 가게 이름에 대한 이야기였다.

 ‘준수 약재상’은 현준의 증조 할아버지가 연 가게이자,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이라 했다. 그 위치 그대로 할아버지가 가게를 이어받았고, 그것을 다시 아버지가 이어받은 것이다. 현준과 현수란 이름도 증조 할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김형사 말처럼 현준의 가족들이 아직 진교에 산다면, 약재상을 운영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가게를 그리 쉽게 닫을 수 없는 일이고, 현준 아버지에게 먹고 살만한 다른 능력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 1층 엘리베이터 옆에는 각 층에 입주한 가게들 이름이 빼곡히 적힌 판넬이 붙어 있었다. 빽빽한 이름들을 두세 번 훑었지만 ‘준수 약재상’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닫은 것일까?

 가게 이름만 알고 무작정 온 것이라, 이름이 없다면 더 이상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이제 남은 선택은 김형사에게 묻거나 8년 전 이나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를 찾아가는 것뿐이다. 가해자 가족으로써 담당형사를 만나는 것이 부담됐지만, 김형사에게 현준 가족에 대해 묻는 것도 부담이었다.

 김형사가 현준을 이나 살인사건 용의자로 올려놨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하나가 아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형사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현준이 8년 전 ‘이나 사건’ 공범자임을 알려줘서 현준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키고 싶진 않았다.

 결국 8년 전 이나 사건을 담당 했던 형사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일일까?

 하나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밀차를 밀고 들어왔다.

 얼나마 다짜고짜 였는지 하나가 얼른 다리를 옮기지 않았다면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화가 난 하나가 조심 좀 하세요. 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라, 밀차에 실린 상자가 눈에 들어왔고 하나의 모든 생각이 리셋 됏다. 납작하게 접힌 포장용 상자에는 ‘진교한방병원 제3원외탕전원’ 이란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고, 아래 작게 ‘(구) 준수 약재상’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밀차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탄 하나는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1층 판넬에는 ‘4층-진교한방병원 제3원외탕전원’이란 글자만 적혀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4층 버튼 옆에는 ‘준수 약재상’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저씨” 남자가 인상을 쓰며 바라봤다. 노동의 힘겨움 때문에 인상을 쓴 것인지, 원래 찡그린 인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먼저 말을 붙이고 싶은 외모는 아니었다.

 “준수 약재상이 언제부터 진교 한방병원 원외탕전원 이었어요?”

 “원래 탕전원 이었잖아” 뻔한 질문이 귀찮다는 투였다.

 “여기 배달한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그건 왜?” 귀찮은 일. 이라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준수 약재상이 옛날 친구 아버지가 했던 가게거든요. 오랜만에 왔는데 너무 많이 바뀌어서요.”

 “아.. 아가씨 진교가 고향이야? 진교 어디~ 어디서 태어났어?”

 “교동이요”

 “교동~ 아~ 내가 거기 잘 알지. 그럼 교동 고등학교 출신인가?” 남자의 짜증이 사라진 건 기쁜 일이지만, 쓸데없는 관심이 살아난 건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다.

 “중학교까지만 여기서 살았어요.” 하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재빨리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제 친구 아버지가 진교 약재상 사장이셨는데, 지금은 그만 두신 거예요?”

 “아이고~ 그 친구랑 연락안한지 꽤 됐나보네~”

 “…”

 “아가씨. 실수했어. 그 친구랑 계속 연락해서.. 뭔가 꺼리를 만들어 놨어야지~”

 짜증이 사라진 남자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연신 혀를 끌끌 차며 하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 친구 남자 맞지? 진교 약재상 외아들이고”

 - 외아들?

 하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들이 이 사업 물려받았잖아. 아가씨. 여기가 옛날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이제는 그냥 약재상이 아냐. 진교 한방병원이랑 약초시장 한약 제조를 거의 여기서 하잖아”

 “준수 약재상에서요?”

 “약재상은 그냥 옛날부터 썼던 이름인 거고. 이제는 그냥 진교탕전원이라 불러. 내가 알기론 사업체도 한 두 개가 아닐걸?”

 8년 전.

 하나가 아는 준수 약재상은 평범한 약재상이었다. 개인이 소소하게 와서 녹용을 달이거나, 몸보신용 한약을 한재 짓는. ‘탕전원’이란 명칭을 쓰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의 작은 가게.

 “아저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남자가 밀차를 밀기 시작하자 하나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 아들이 지금 탕전원 대표란 말이죠?”

 “그렇지”

 “이름이 유현수 맞아요?”

 “내가 사장 이름까지 어떻게 알아. 여기 당직 직원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어보던가. 친구 만나면 술밥 좀 얻어먹고.. 진도 좀 잘 나가보고~ 이쁘게 생긴 게.. 잘 어울리겠네~”

 계속 캐묻는 하나의 목적을 잘 알겠다는 듯 남자는 싱글대는 웃음을 흘렸지만, 하나는 이미 그에게서 신경을 끊은 상태였다.

 외아들. 그 단어가 하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호준. 아니 현준은 아들로써 버림받았던 걸까?

 그래서 그가 실종됐다는 소식에도 가족들이 나서지 않았던 걸까?

 현준의 부모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8년 전 현준이 체포될 때 슬프게 울었던 모습은 기억이 났다. 그런 사람들이 왜 현준을 찾지 않았던 걸까?

 혹시 찾지 않은 게 아니라 숨긴 것일까? 박부진이 이나를 세상에서 숨겼던 것처럼.

 하지만 왜?

 이나는 8년 전 사건의 주범이니 그렇다 치지만, 현준은 아주 헐거운 공범일 뿐이었고, 따로 고소 당하거나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하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 질문을 던지고, 생각에 빠져봐야 소용없는 일. 정확한 답은 가족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진교에서 가장 큰 탕전원이라는 남자의 말이 틀리지 않은 지, 4층에는 한방병원 외 다양한 업체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보이는 벽에는 ‘진교한방병원 제3원외탕전원’이란 푯말이, 모퉁이를 돌면 바로 나오는 문에는 ‘진교약초시장 공식 탕전원’이란 푯말이, 또 다른 모퉁이를 돌면 ‘탕제실-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고, 반대쪽 다른 문에는 ‘약재 보관소’ ‘약침 보관소’ ‘냉침실’ 등 다양한 이름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복도를 헤맨 끝에 알게 된 것은 이곳이 ‘진교한방병원 제3원외탕전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진교약초시장 공식 탕전원’ ‘진교 탕전원’ 등 최소 3개 이상의 이름을 보유한 업체란 사실이었다.

 3대에 걸쳐 8평 남짓한 가게를 겨우 운영했던 곳이 8년 만에 200평이 넘는 넓은 탕전원으로 발전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8년 전, 현준의 형은 성인이었지만, 한의학과를 다니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현준 아버지가 사업체를 이렇게 키울 만큼 능력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지 않았다면 이런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까? 누가 도와준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준’이란 이름과 8년 전 현준 아버지 옆에 서 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였다. 그가 ‘준’과 관련된 사람일까?

 정확한 것은 ‘준수 약재상’의 아들인 유현수를 만나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4층에는 사람은커녕 벌레 한 마리 없었고, 창문 하나 없이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헤매느라 여기가 지나갔던 복도인지, 처음 온 복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겨우 ‘사무실’이란 푯말을 발견했지만, 문은 잠겨있었고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역시, 지금이 일요일 오전이란 것이 문제였다.

 사람이 있을 가능성보다 없을 가능성이 높은 시간이니, 하나는 현장을 헤매는 대신 인터넷을 먼저 뒤져보기로 했다.

 구글에 ‘준수 약재상’ ‘준수 탕전원’을 검색했지만,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진교한방병원 원외탕전원’ ‘진교약초시장 탕전원’을 검색어에 넣어 클릭했지만, 각각 한방병원 통합 ARS와 약초시장 통합 ARS로 연결될 뿐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결국 8년 전 담당형사를 찾아갈 수밖에 없나, 라는 생각에 맥이 빠지려는 찰라 복도 끝 사무실 문이 닫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들어간 것인지 나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4층에서 유일하게 인기척이 난 곳이어서 하나는 복도 끝 사무실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요!”

 하나는 낼 수 있는 최대한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렸고 드디어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의 대각선 뒤쪽 문이 열린 것이다.

 **

 “뭡니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양 다리를 벌린 채 서 있는 남자는 자세 뿐 아니라 목소리에서도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익숙한 모양새였다.

 “여기 직원이세요?”

 “용건이 뭐냐구요.”

 위압적이고,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남자가 싫다는 생각보다 친숙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8년 전, 진교에 살 때 알았던 사람일까? 그래서 익숙한 느낌인 건가?

 하나가 과거의 기억을 빠르게 더듬는 순간, 남자의 등 뒤에서 ‘대표님?’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유현수?”

 하나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돌아가던 남자의 고개가 다시 하나를 향했다.

 “현준이 형.. 맞아요?”

 “…”

 물음표가 가득하던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느낌표로 변하더니, 놀란 듯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정.. 이나?”

 “…”

 그를 만나기 위해 진교에 온 것이지만, 막상 그와 마주서자 하나의 마음은 불편해졌고, 진교에 온 것이 실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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