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든 두 사람에게서는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
이러면 곤란한데. 아이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자몽에이드를 들이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사건을 다시 잡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용의자가 있음에도 증거가 없어 붙잡을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 두 사람을 용의자로 단정 짓는 것 자체가 범인에게 놀아나는 것 같아 기분이 불쾌하고 더러웠다.
어떠한 목적으로 범인을 노리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붙잡지 않으면 또다른 희생자가 나올 수 있으니 더욱 신중을 기해 붙잡아야했다.
“우드리 오늘 출연하는 행성 담화 출연자 명단 좀.”
“알겠습니다.”
우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아이작에게 넘겨줬다.
“이게 오늘 출연한 출연자 명단입니다.”
출연자는 크게 남자 패널과 여자 패널, 인간 패널과 외계인 패널로 나눠져 있었다. 여자 외계인 패널의 자리는 원래 주인 대신 다른 이들이 채워져 있었다.
“뭐야, 다들 자리가 채워졌네?”
“간신히 구했더라고요. 올리비아와 세르티아의 자리는 신입이 채워진 반면 유카의 자리는 같은 플로라인인 블로썸 씨가 대체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못 하겠네, 언제 자신이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 녹화를 하고 싶을까?”
“그만큼 뜨고 싶은 자들도 있을 테니까.”
요번 게스트는 30년 동안 배우 생활을 한 대배우 윤슬아였다. 연기력이 빼어나 어떤 역할이든 그 인물에 빙의한 듯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그녀가 손대는 작품은 무조건 흥행한다고 알려진 연예계의 마이다스 손.
그래서인지 그녀와 같이 작품을 하는 걸 바라는 배우들이 많으며 많은 이들이 롤모델로 삼을 정도로 우상이 되는 존재였다.
인간뿐만 아니라 외계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아 인간 최초로 동료 배우와 같이 루나로 가 영화를 찍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우러러 보지만 정작 본인은 아직도 부족하다며 인터뷰 때마다 겸손함을 보였다.
“왜 빈자리를 신입을 채웠는지 알 것 같네.”
윤슬아가 찍은 신입은 무조건 뜬다는 소문이 돌았으니까.
터무니없는 소문은 아닌 것이 출연자인 양유경이나 올리비아, 유카 전부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고 뜰 거라고 예상했던 인물들이었으니.
“자신이 발굴한 신입이 윤슬아에게 컨텍 당하는 것만큼 큰 이슈는 없으니까요.”
“특집 방송이라고 캐스팅 제대로 했네.”
아이작이 살짝 혀를 차며 말했다.
“행성 담화가 만들어진지 몇 십 년이 지났으니까요. 그것을 기념하는 특집이니 대 배우를 캐스팅한 거겠죠.”
“내일은 또 다른 대배우를 섭외했다며. 몇 십 년 된 방송을 기념하는 특집 방송이니 말 다했네.”
“그래서 유난히 방송국에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른 때보다 유난히 많은 사람들. 카페나 방송국 주변을 돌면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그램 관련자들을 제외하고 이곳에 온 일반인들이 다 행성 담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팬들이 워낙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니. 요번 특집을 보기 위해 온 팬이라 봐도 무방할 거다.
“팬들은 녹화에 참여 안하지?”
“네, 참여 안합니다. 대신 요번엔 특집인 만큼 지하에 있는 강당에서 녹화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가지가지 한다.”
왠지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칼릭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범인이 멍청하면 오늘 범행을 저지르진 않겠지?”
“그 틈을 노리고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
“와, 진짜 싫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쓰러진다면 특집 방송은 올해의 최악의 특집 방송으로 바뀔 수 있었다. 가뜩이나 출연진 3명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강행되는 녹화다보니 기자들이 전부 건수를 잡기 위해 주시 중이었다.
팬으로 위장해서 들어온 기자도 있고, 공식적으로 윤슬아의 인터뷰를 위해 초대받은 기자들도 있으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좋아할 자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저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솔직히 기자들 중에는 우리를 주시하는 자들도 있어. 다른 팀이 해결하지 못하고 받은 사건이기도 하니까.”
정확히는 요번 사건의 범인이 ‘외계인’일 거라는 추측 때문에 억지로 넘겨받았다. 그러나 저번과 같은 상황이 있어 외계인의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범인도 범인이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되는 걸 막아야 하니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범인을 찾아야해.”
“그것도 중요하지만 다음 타깃을 찾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그래, 더는 피해자가 생기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바뀐 것은 없는 명단이었으나 외계인 연예인이 3명이나 피해를 봤으니 요번에도 외계인쪽에서 피해가 발생할 것 같았다. 신입이나 요번에 새로 들어온 블로섬을 제외한다면 범인이 노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유리아겠네.”
“그래, 이 중 원래 모습으로 활동하는 건 유리아 밖에 없으니까.”
레이카와 같은 루나 출신인 유리아 역시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원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 외계인이었다.
비너스인인 올리비아와 플로라인인 유카는 원래 모습으로 다녀도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신비롭다고 생각할 만큼 예쁜 외모였고, 세르티아의 경우 물속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나 부분적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어 다리 부분을 제외하고 원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 범인은 원래 모습으로도 예쁜 외계인을 위주로 습격하는 것 같아. 피해자들 모두 원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공감합니다.”
사실 그거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무자비로 외계인을 습격하는 거였으면 그 자리에 있는 외계인들 전부에게 다크 푸니카를 먹였을 테니까.
“블로섬은 요번에 대타로 들어온 인물이고, 다른 외계인은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범인이 노릴만한 인물은 유리아 밖에 없지.”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유리아를 지키는 거군요?”
“나아가서 범인을 잡는 것까지 포함이지.”
말을 마친 아이작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녹화 시작이니까 슬슬 일어나자고.”
“알겠습니다.”
칼릭스와 우드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마지막으로 효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식대에 각자가 마신 빈 컵을 올려 둔 후 카페를 나갔다.
“그건 그렇고 팀장님, 레이카 씨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게, 벤자민은 팀장님이 개인적인 일을 했으니 그렇다 쳐도 레이카는 어디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 녀석에게 보냈어. 아마 녹화 중간쯤에 합류할 거야.”
“그 녀석에게요? 그 녀석 레이카 왔다고 엄청 좋아하겠네요.”
그 녀석? 누구를 말하는 거지?
희준이 누군지 모르는 효은은 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 했다. 그저 그들이 아는 사람이라 추측할 뿐. 행성 담화 세트장은 본관을 지나 별관 1층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세트장이 눈에 들어왔다.
게스트를 포함해 출연자들은 아직 세트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송 관련 스태프들만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세 번이나 사건이 터져 흉흉한 분위기일 거란 생각과 달리 세트장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향한 의심과 경계심으로 인해 서로에게 날이 서려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스태프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변에 수상한 것이 있으면 죄다 검은 봉지에 집어넣었다. 음식도 반입금지이며 화장품도 검증된 물건만 사용할 수 있었다.
“와, 분위기 엄청 살벌하네.”
스태프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은 칼릭스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런 일을 격었는데 살벌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여기에 있으면서 누가 유리아, 나아가 다른 외계인 출신 연예인에게 접근하는지 주시하는 거야.”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즉시 잡으라는 말씀이시죠?”
알겠다고 대답한 칼릭스는 여차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우드리도 손에 식물의 씨앗을 만지며 공격에 대비했다.
“효은아, 혹시 이 사람들 중에 저번과 같이 이상한 모습을 한 사람이 있어?”
“잠시만요.”
효은은 눈을 크게 뜨며 주변에 돌아다니는 스태프를 하나하나 살폈다.
인간과 다양한 모습의 외계인이 섞여 있었으나 저번과 같이 이상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놓친 사람이 있나 다시 한 번 얼굴을 쳐다봤으나 결과는 같았다.
“여기에는 없어요. 하지만…….”
아직 녹화가 시작된 게 아니라서 사람이 모두 모인 게 아니었다. 연예인들과 그들과 같이 일하는 매니저와 코디를 포함, 이곳에 없는 다른 스태프의 얼굴도 살펴보고 나서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 일단 사람들이 모이고 녹화가 시작돼야 알 수 있겠다는 거지?”
“네, 맞아요.”
“혹시라도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말해줘.”
“알겠습니다.”
효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녹화 시간이 가까워지자 연예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그들이 주시하는 유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작이 유리아의 매니저를 통해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을 무렵, 효은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갔다.
볼일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복도를 울리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돌린 찰나.
퍽!
“악!”
맞은편에서 누군가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아야.”
갑작스러운 힘에 의해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꽤 강하게 부딪친 탓에 꼬리뼈 부근이 아팠다. 간신히 고통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죄, 죄송합니다!!”
저와 부딪친 상대방이 허리까지 숙여가며 연신 사과를 건넸다.
“제, 제가 앞을 보지 못하고 뛰어가다가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효은은 저에게 사과하는 스태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으나 앳돼 보이는 얼굴만은 감출 수 없었다.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키가 작고 무척이나 귀엽게 생긴 여성이었다.
저와 부딪친 것만으로도 패닉 상태가 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마치 작은 실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회초년생처럼 보였다.
“제, 제가 여기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방송국 지리를 잘 몰라요. 방금도 다른 세트장으로 가는 바람에 급하게 원래 세트장으로 가려다가 그만…… 진짜, 진짜 죄송해요”
그리고 효은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저, 저는 정말 괜찮은데.”
오히려 자신이 미안할 정도로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연신 사과를 하렴 어쩔 줄 모르는 여성을 보며 효은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 정말요? 다행이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였는지 표정을 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어디 다치신 줄 알고 긴장했어요.”
“이 정도 가지고 뭘요. 그건 그렇고 세트장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맞아! 늦어서 급하게 가고 있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까지 사과를 내뱉으며 세트장으로 향하는 여성을 보던 효은은 마치 제가 붙잡아서 더 지각하게 만든 것 같아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부디 심하게 혼나지 않았으면.
“……응?”
세트장으로 돌아가려던 효은은 저와 떨어져 있는 곳, 정확히 여자가 서 있던 곳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것을 주웠다.
“이건?”
떨어져 있던 것은 새하얀 약통이었다.
흔들어보니 내용물이 있는지 소리가 들렸다. 다만 약 외에 다른 것이 담겨있었는지 달그락 거리는 소리 대신 젤리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약통을 열어본 효은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내용물을 살폈다.
안에는 알약 대신 열매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오디보다 짙은 색을 띠고 있고 블루베리보다 작은 형체의 열매는 살아생전 처음 보는 열매였다. 열매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본 효은은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다급히 아이작에게로 달려갔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검은빛으로 물든 열매는 마치 ‘석류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