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팀장님!”
제가 바닥에 부딪치지 않게 구해준 자는 예상대로 아이작이었다.
와줄 거라고 믿은 덕분이었을까? 아이작의 냉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가 바닥에 부딪치지 않게 제때 달려와 저를 구해줬다.
짙푸른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 밀랍인형 혹은 뱀파이어처럼 핏기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모습은 평소의 인간 아이작이 아닌 카론 행성의 나아가 나흐트크라프 가문의 모습이었다.
아이작의 오른쪽 뺨에는 효은에게 새긴 문양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 손에 있는 문양이 빛나자 그의 뺨에 난 문양도 같이 빛났다.
“괜찮아?”
얼음장 같이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말투만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저를 걱정하는 눈빛을 느낀 효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팀장님 덕분에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뺨에 새겨진 문양은 효은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사라졌다. 문양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이작의 모습은 인간이었을 때 모습으로 돌아갔다.
“저때 와주셨네요?”
“온다고 약속했으니까. 당연히 와야지.”
왜 저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그의 말대로 직원이 위험에 빠졌다니까 당연히 온 것뿐인데. 다른 인간 직원이 있었어도 구해줬을 텐데. 그런데 왜……. 모든 게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레이카 괜찮아?”
“괜찮습니다, 팀장님.”
레이카가 묶은 덩굴도 효은이 내뿜은 냉기로 인해 얼어서 깨졌으나 다행히 칼릭스가 최대한 몸을 움직여 재빨리 레이카를 구했다.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한 레이카는 칼릭스와 우드리 안에 있는 독을 치료했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아이작의 시선에는 온몸을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윤이 있었다. 지윤의 주변에는 아직 얼어붙지 않은 검은 가시덩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분노로 몸을 주체하지 못하던 지윤은 눈을 부릅뜨며 효은을 향해 소리쳤다.
“네 년은 도대체 뭐야?!!”
뭔데 냉기를 발산해서 내 덩굴을 모조리 다 얼어붙게 만든 건데!!
지윤이 발악하자 주변에 있던 가시덩굴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독을 잔뜩 머금은 가시가 효은에게 닿기도 전에 아이작의 냉기로 인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이작은 얼어붙은 덩굴을 발로 밟아 부숴버리며 사납게 말했다.
“내 직원에게 쓸데없이 욕하지 말고 예의 지켜.”
“겨우, 겨우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왜 이렇게 방해꾼이 많은 거지?
“유카처럼 예뻐졌다고. 더 이상 나이가 들 걱정도, 다이어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이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그런데 왜…… 왜 나를…… 방해하는 건데!!!”
지윤이 소리치자 사방에서 가시덩굴이 튀어나왔다. 가시덩굴 속에서 피어난 커다란 흑장미는 독을 품은 채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외모가 꽃처럼 아름답게 변했어도 예뻐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추해보였다.
“피해자에게 다크 푸니카를 먹인 이유는 뭔데? 설마 자기 혼자 아름답고 싶어서?”
“그것도 있지만 짜증났어. 나는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데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본 모습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쉽게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니까.”
꽃처럼 예쁘다는 이유로 다들 나보다는 유카를 좋아했다고.
기획사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유카. 늘 유카와 비교하며 저를 깎아내렸다. 아무리 예뻐지기 위해 노력해도 유카를 이길 순 없었다. 아이돌로 데뷔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유카만을 찾았다.
인간과 외계인을 비교대상으로 삼은 것도 짜증나는데 조금만 얼굴이 안 예쁘게 나와도, 표정을 찌푸리고 있어도, 조금만 살이 쩌도 온갖 악플이 쏟아지자 외계인보다 못한 자신이 무척이나 비참했다.
유카, 유카, 유카!!
왜 다들 제 앞에서 유카를 얘기하는 건데!! 유카가 뭔데? 도대체 나한테 뭔데!!
친구로 생각했던 유카가 ―전혀 의도치 않았음에도―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저를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저를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외계인의 모습으로도 사랑받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그래서 그랬어.”
지윤은 생각보다 많이 뒤틀려있었다.
아이돌이란 이유로 온갖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외계인과 비교를 당하자 비참함에 제 자신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결국에는 비교대상이 되었던 유카처럼 플라워인으로 변했다.
뒤틀리고 망가진 지윤에게는 그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설득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면 그녀가 조종하는 가시덩굴에 의해 얼굴과 몸에 큰 상처를 입고 망가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 효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두 사람은 그렇다 쳐도 유카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어. 그래서 화장품과 먹을 것에 다크 푸니카를 잔뜩 넣어줬어. 두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멍청하게 나를 믿고 먹더라고. 정말이지 한심하고 멍청했어.”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이 일그러져 전혀 예쁘지 않았다. 귓가를 파고드는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지윤이 얘기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이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고작이라고? 당신이 뭘 안다고 소리쳐!!”
또다시 가시덩굴이 튀어나왔으나 아이작에 닿기도 전에 깨졌다.
“그리고 당신 지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설마 플로라인이 오랫동안 사는 종족이라고 생각한 거야?”
아이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플로라인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아.”
“……뭐?”
처음 듣는 말이었는지 지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 당신 말대로 플로라인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 모습 그대로 늙지 않고 살아가. 꽃에서 태어난 종족답게 꽃처럼 화려하게 피다가 진다고.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꽃이 질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플로라인은 인간보다 적은 수명으로 꽃처럼 피어나 꽃처럼 진다. 제가 성장하고 난 그 모습 그대로.
“짧은 수명을 다한 뒤로는 꽃이 되어 생을 마감하지. 그리고 그 꽃은 언젠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땅속에 천천히 스며들어 양분이 된다고.”
플로라인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잘 얼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플로라인이 생을 마감한 뒤 피어난 꽃은 치료할 수 없는 어떤 상처라도 순식간에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진 탓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도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진 생명의 꽃.
자신이 죽고 난 이후로 피어난 꽃이 다른 이에게 노려지지 않게, 언젠가 태어날 자신의 자식을 위해 죽을 때가 되면 플로라 행성으로 돌아가 천천히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플로라인의 최후였다.
“그럴 리가…….”
아냐…….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어……. 그 사람은 그저 플로라인처럼 예뻐진다는 말만 했는데…….”
“그 사람?”
“꽃처럼 이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만 말하고…… 줬는데……?”
듣도 못한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는지 지윤은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에게서 들은 얘기와 전혀 달랐다.
그저 예뻐질 수 있다고만, 유카처럼 꽃 같은 외모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준 약을 먹었는데.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아니야.”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지윤을 본 아이작은 뭔가 잘못된 것을 확인하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절망에 빠진 지윤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절규했다. 지윤의 주변에 바람이 불며 흑장미꽃잎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타이밍 좋게 아이작이 주변에 얼음벽을 세웠으나 꽃잎은 점점 더 빠르게 휘날려 모든 것을 감쌌다. 꽃잎이 감싼 것들은 독으로 인해 색이 변해가거나 조금씩 녹아들었다.
“저거 닿으면 안 됩니다! 다크 푸니카와 비슷한 성분을 띄고 있어요.”
“알아, 그래서 막은 거야!”
시야를 차단할 만큼 강한 꽃보라라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냉기를 최대한 발산한 덕분에 모두의 몸에 닿기도 전에 얼었으나 이런 식으로 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방법을 찾던 아이작은 제 옆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는 효은에게 시선을 뒀다.
보이지 않는 시야를 최대한으로 집중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저번과 똑같았다. 설마, 아이작은 효은의 주변에 날아다니는 꽃잎을 얼리며 물었다.
“약점 보여?”
“네, 정확히 보여요.”
효은은 손가락을 들어 지윤의 얼굴을 가리켰다.
“왼쪽 뺨이에요.”
지윤의 왼쪽 뺨에 장미 문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효은만이 보이는 유일한 약점.
“아름다움에 집착해서 얼굴에 있는 건가.”
어이없네. 아이작이 작게 중얼거리며 냉기로 만든 고드름을 꽉 쥐었다.
“한 번에 가야해.”
저번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약점 외의 부분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외계인처럼 변했으나 엄연한 인간이었다. 인간을 함부로 공격할 수는 없었기에, 약점만 노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끝내야했다.
“……제가 할까요?”
효은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아냐, 그냥 약점만 가르쳐줘. 우드리!”
아이작의 부름에 우드리가 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 꽃잎 몇 초라도 좋으니까 흩날리기 않게 할 수 있어?”
“가, 가능합니다.”
주머니에서 다급히 씨앗을 찾은 우드리가 간신히 답했다. 다만 아까 씨앗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에 오랜 시간동안 막는 건 불가능했다. 아이작이 원하는 만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점을 위안 삼았다.
“좋아, 그럼 내가 신호를 보내면 공격해. 우드리가 꽃잎을 막으면 효은아 너는 나랑 같이 저 여자에게 가자.”
“알겠습니다.”
공격할 타이밍을 찾고 있던 아이작은 이내 자신이 세워뒀던 얼음벽을 부쉈다.
“지금이야!”
부서진 얼음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소리치자 우드리가 씨앗을 있는 힘껏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들어간 씨앗은 순식간에 자라났고, 자라난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져 흑장미꽃잎을 감쌌다. 꽃잎의 공격이 잠잠해진 틈을 이용해 아이작과 효은이 지윤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뭐냐고!!”
얼굴을 내린 지윤이 발악하며 꽃잎을 날렸으나 그마저도 아이작의 냉기에 얼어 떨어졌다.
“저기가 약점이에요!”
“알았어.”
“오지 마!!”
저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대충 알아차린 지윤이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꽃잎이 또다시 사방으로 휘날렸다. 성가시게! 아이작은 고드름을 이리저리 휘둘러 꽃잎을 베어낸다.
“저리 가라고!!”
비명소리에 맞춰 바닥에서 가시덩굴이 튀어나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이런! 가시덩굴에 묶여 지윤과 떨어지게 된 아이작은 어떻게든 고드름을 이용해 약점을 찌르려고 했으나 잘못했다가는 지윤에게 이상이 생길까 함부로 움직이지 못 했다.
대신 들고 있던 고드름을 효은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고드름을 붙잡은 효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봤다.
“티, 팀장님?”
“신호주면 약점을 향해 있는 힘껏 던져!”
“네? 아, 알겠어요!”
아이작이 손을 뻗자 가시덩굴이 점점 얼어붙기 시작했다. 효은을 감싸던 가시덩굴이 냉기로 인해 얼어붙자 얼음이 깨지듯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몸이 자유로워진 틈에 지윤에게 다가간 효은은 들고 있던 고드름을 망설임도 없이 있는 힘껏 휘둘렀고.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고드름이 왼쪽 뺨, 자신이 봤던 약점에 정확하게 찔렀다.
“어……?”
뺨을 찌른 고드름을 빼자 상처가 난 왼쪽 뺨에 검붉은 피가 튀어나오며 흑장미와 같은 색의 액체가 꽃잎이 떨어지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지윤은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지르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입에서 검붉은 액체를 게워냈다.
컥컥거리며 제 몸에 있던 모든 것을 뱉어낸 지윤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며 제 얼굴을 만졌다.
“아, 안 돼…… 안 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뺨에 난 상처는 고사하고 모든 것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지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세트장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