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은아, 미안해」
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려진 동시에 눈이 떠졌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만 바라보던 효은은 꿈을 꾸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허탈해하며 얼굴을 감쌌다. 꿈인 걸 알았음에도 언니가 옆에 있었던 것 같아 더 허탈했다.
언니가 나오는 꿈을 가끔 꾸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현실감 넘치는 꿈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언니가 나온 장소가 자신이 예전에 엄마와 같이 살던 집이 아닌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었으니까.
원래 이 오피스텔은 언니 효원이 사용하던 오피스텔이었다. 시청에서도 나름 가깝기도 했고 외계인이 많이 살고 있으나 월세가 싸고 치안도 나름 괜찮아 여자 혼자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차가 끊겼거나 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왔던 그리운 공간.
“언니…….”
효원이 죽은 후, 그녀가 살던 오피스텔은 효은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언니가 살던 공간이고 가끔씩 온 적이 있어 어색한 건 없었으나, 가끔씩 언니가 그리웠다.
여전히 보고 싶은 언니.
이제는 만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효원의 죽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꿈에서 언니가 나와서 그런가.”
촉촉한 눈가를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없었으나 엄마와 언니가 있어서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들은 살면서 형제자매들과 싸운다고는 하나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을 만큼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그래서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효은에게 있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사망하기 전 내게 미안하다고 얘기했지.’
그때 언니는 왜 내게 미안하다고 했던 걸까.
말다툼을 좀 하긴 했지만 굳이 사과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언니는 내게 미안하다 말하고 나를 아련하게 바라봤던 걸까.
언니…… 언니는 도대체 뭘 알고 있던 거야?
내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큰 고민이었던 거야? 그런 거야? 응? 꿈속에서라도 좋으니까 제발 말 좀 해줘…….
「……정말 미안하다.」
“어?”
미안하다는 언니의 모습이 순간 저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는 석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며 망가진 인형처럼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석오. 언니를 떠올리다 왜 갑자기 그날의 석오가 떠오른 걸까.
“그러고 보니 분명―.”
띵동.
정적은 깨는 초인종 소리에 뭔가를 떠오르려던 효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 앞으로 향했다.
누구지? 최근에 물건 산 적 없는데.
여자 혼자서 사는 집을 노리는 파렴치한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었으나 그랬다면 경비가 알아차렸을 거라는 생각에 바로 의심을 지웠다. 만약에라도 발견하지 못했을 상황에 대비해 외계인 전용 스프레이를 챙겨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 일어났네?”
“…….”
아니 얘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뭐야, 그 떨떠름한 얼굴은? 기껏 생각해줘서 왔더니.”
마치 네가 왜 왔어? 라는 표정이었다. 은화는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효은의 옆을 지나쳐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랐네. 효은은 신발장 위에 스프레이를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제발 연락이라도 하고 와라, 마침 깨어있어서 망정이지 자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뭐래, 어제 오겠다고 문자했잖아.”
그랬나? 워낙 정신없는 일을 겪고 난 탓에 경황이 없었다.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협탁 위에 있는 휴대전화를 들어 문자한 내용을 확인했다. 정말이네. 은화에게서 온 연락을 확인한 효은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저럴 줄 알았지. 익숙한 상황인지 은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들고 있던 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너 밥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시장에서 사왔어.”
은화가 사온 것은 5번가와 6번가에 위치한 시장에서 파는 닭강정이었다. 닭다리 살로만 만든 순살강정에 달달한 소스, 말랑말랑한 떡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닭강정으로 맛도 있거니와 가격도 착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가끔 장을 보면 다른 것은 빼먹더라도 닭강정은 꼭 사가지고 올 정도로 좋아했다. 양도 많은 거보면 부족할 걱정은 없어보였다.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다!”
효은은 은화에게 손하트를 날리며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봉지 안에 있는 닭강정을 꺼냈다.(이에 은화는 어울리지 않는 짓하지 말라고 한소리 들었다.)
방금 만들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뜻했다.
“너 좋아하는 음식이라 사왔지.”
은화는 봉지 안에서 치킨무와 콜라를 꺼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한 거 아니냐? 효원 언니도 좋아했던 음식이잖아.”
닭강정은 평소에도 효원과 효은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시장에 가면 자주 사먹었을 정도였다. 언니를 떠올린 상태에서 자주 먹었던 닭강정을 보니 더욱 그리운 느낌이었다. 혹시라도 은화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눈가를 만지며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해서야 닭강정을 입에 넣었다.
“음, 맛있어.”
여전히 익숙하고 여전히 그리운 맛. 맛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제가 아는 맛 그대로 무척이나 맛있었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은화는 살짝 미소 지으며 테이블 옆에 놓인 컵에 콜라를 따라 효은에게 건네줬다.
“너도 얼른 먹어.”
“알아서 먹을 테니까 드셔.”
라고 말하며 포크를 들어 닭강정을 입에 넣은 은화였다.
효은뿐만 아니라 은화도 좋아하는 음식이라 그런지 양이 꽤 많았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바닥이 났다. 깨끗하게 비워진 박스를 보며 두 사람은 서로 많이 먹지 않은 척 포크를 내려놨다. 그리고 누구할 것 없이 동시에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효은이 차를 준비할 동안 은화는 닭강정 박스를 버리고 행주로 테이블 위를 닦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빵집에서 사온 쿠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일은 좀 어때?”
“정신없어.”
자리에 앉은 효은이 은화에게 차를 건네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건현장에 가야하는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정신이 없어.”
“하긴, 너한테 인사하는 것도 힘들던데.”
“사건이 없으면 사무실에 있기는 한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밥도 안에서 먹더라.”
“그래서 내가 퇴근할 때 너를 못 보는 건가?”
“나도 너 못 본다.”
아이작과 같이 사건현장으로 가는 탓에 오히려 시청에 있는 횟수가 적었다. 사무실에 있더라도 만약의 상황을 위해 대기를 해야 해서 할 일이 없더라도 퇴근시간 전까지는 함부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사건이 끝나고 하루나 이틀 휴식이 있다는 것에 위안삼고 있어.”
그거 아니었음 진짜 몇 배로 피곤했을 거야. 효은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직원분들이 다들 착해서 다행인 것 같아.”
같은 여자인 레이카는 말할 것도 없고 칼릭스는 장난스럽기는 해도 적당히 선을 지키며 자신을 대했다. 우드리는 과묵하지만 저를 잘 챙겨주었다.(벤자민은 아이작의 개인비서라 논외로 친다.)
그리고 팀장인 아이작은…… 불편했던 첫인상과 달리 언제나 다정하며 가장 먼저 저를 챙겨주었다. 외계인들에 비해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 팀원이라 그런 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무실 내에서 가장 저를 생각하고 챙겨주는 것은 단연 아이작이었다.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언제나 다정하게 저를 대하는 아이작.
저번 사건 때 저를 구하러 달려온 아이작의 모습을 떠올린 효은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효은은 열이 올린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양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혹시라도 은화가 이상하게 볼까 걱정했으나.
“그래, 외계인이라도 착하면 장땡이지.”
다행히 은화는 효은의 태도를 보고도 딱히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앞에 놓인 쿠키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착하다니 다행이네, 한 명이라도 성격 이상한 사…… 아니 외계인 있었으면 답도 없는데.”
“그, 그러게 말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부끄럽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아. 효은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차를 들이켰다.
“그래서 너희 팀장도 착해?”
푸웃!
생각지도 못한 말에 효은은 마시던 차를 뱉었다. 다행히 고개를 돌려서 은화의 얼굴에 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어쨌든 내뱉은 차로인해 바닥이 얼룩졌다.
“가, 갑자기 뭔 소리야?”
왜 이 상황에서 아이작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효은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가를 닦아내며 물었다.
“왜 갑자기 팀장님 얘기를 하는 거야?”
“아니 저번에 팀장 얘기를 꺼냈으니까, 그래서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 당황스러워해?”
너 설마? 은화의 눈빛이 음흉하게 바뀌자 아니라고 소리치며 손사래를 쳤다.
“갑자기 팀장 얘기를 하니까 당황해서 그랬지 팀장님에게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거든?”
“알았어, 그렇다고 쳐줄게.”
“백은화!!”
버럭 화를 냈음에도 은화는 얼굴 가득 담긴 장난기를 거두지 않았다. 일단 넘어가기는 했는데, 시종일관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단 참기로 했다.
팀장 얘기에 당황했다는 이유로 지레짐작하고 음흉한 웃음을 짓는 은화가 이해가지 않는 동시에 이런 일로 버럭하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첫인상과 달리 나에게 잘해주더라.”
“다행이네. 팀원도 그렇지만 진짜 상사 잘못 만나면 답도 없어.”
“맞아, 진짜 답없지.”
그러면서 화제를 돌리니 자연스럽게 아이작에 관한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됐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으나 금방 잊었다.
한참을 수다를 떨던 은화는 뭔가를 떠올랐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보여줬다.
“이거 너희 팀이 맡은 사건 맞지?”
휴대전화 화면에는 서지윤에 관한 기사가 떠 있었다.
유명 아이돌인 S양 ―이라고 표현했으나 다들 서지윤이라고 눈치챘다.― 다른 행성출신 연예인들에게 독을 먹이고(다크 푸니카라고 쓰여 있진 않았다) 그것을 들키게 되자 입막음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려 했다는 내용의 기사.
“맞아, 우리가 맡아서 해결한 사건이야.”
굳이 속일 필요가 없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것 같았어.”
우연히 효은이 속한 팀이 들어오는 걸 보게 되었다. 그런데 시청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행색이 누군가와 싸운 것처럼 엉망이었다. 무슨 일을 겪었길래 옷이 해질 때까지 엉망이 된 건가 싶었는데, 이 사건 때문이라면 납득이 되었다.
“이거 듣고 카페 사람들 모두 충격 받았잖아. 서지윤이 그런 짓을 할지 몰랐다면서 한동안 이 얘기로 떠들어댔지.”
“누가 믿었겠어.”
나도 긴가민가했으니까. 지윤 옆에 꿈틀되는 그것의 존재만 아니었으면 그녀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그것.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은 붙은 대상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꿈틀거리며 이윽고 외계인의 형태로 변해버린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그것이 변한 형태의 외계인으로 변해버리고.
도대체 그게 뭐길래 인간을 순식간에 외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걸까. 의아해하고 있는 찰나 은화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서지윤에 대한 기사가 나온 직후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
“이상한 소문?”
“응, 서지윤이 외계인으로 변했다는 소문.”
그걸 어떻게? 효은의 입가가 단번에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은화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소문이 도는 게 한두 번이 아냐.”
“한두 번이 아니라고?”
“응, 인간이 외계인으로 변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시괴담처럼 떠돌고 있어. 단순한 루머나 찌라시로 치부하기에는 목격자가 있고.”
“…….”
“진짜든 아니든 소름 돋지 않아? 어떻게 인간이 외계인으로 변해?”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할수 있을까.
두 번이라 인간이 외계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탓에 말도 안 되는 말 아니냐는 은화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