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지 조교입니다.”
윤 조교는 저의 이름을 말하며 모두에게 인사를 한 후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어깨까지 오는 까만 생머리에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는 예쁘다기보다는 창백하게 느껴졌다. 검은 뿔테 안경 속에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다른 이들에 비해 유난히 짙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떠오를 정도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내면에 숨겨둔 어둠을 본 것 같아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사람 이미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나 정말 다른 학생들과 친했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윤 조교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교수님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미스터리 연구부 학생들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고요.”
“네, 죽은 학생들이 같은 동아리라고 들었습니다. 동아리 학생들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흠, 하고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교수님보다 제가 학생들과 친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에게 정보를 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다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든 설득을 하기 위해서 레이카가 말을 걸던 차에 뭔가를 느낀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뭔가 눈치 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 조교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페 밖으로 나간 아이작은 제 볼에 떠오르기 시작한 문양과 변해가는 모습을 느끼며 어디론 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
“사, 살았다.”
효은은 제 앞에 얼어붙은 아메바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는 새겨진 파란 문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위험에 빠지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작의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아메바인이 효은의 머리를 뜯어 먹으려고 한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냉기가 퍼져 주변이 얼어가는 동시에 벽과 바닥에서 삼각기둥 형태의 얼음기둥이 튀어나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아메바인의 몸을 꿰뚫은 얼음기둥. 아메바인이 얼음기둥 하나를 입으로 부숴버렸으나 사방에서 나오는 얼음기둥을 모조리 부숴버릴 수는 없었다.
저에게 다가온 아메바인이 얼음기둥에 꿰뚫린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동시에 극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한 탓에 효은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일단은 시간은 벌었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등 뒤에 있는 문에 몸을 기댄 채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은 냉기로 인해 얼어붙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메바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이쯤이면 아이작이 제 상태를 눈치 채고 달려오고 있을 테니 그 전에 아메바인이 얼음을 부수고 나오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그건 그렇고, 역시 팀장님에게 과외받기를 잘한 것 같네.”제 손등에 반짝거리는 문양을 보며 효은이 작게 중얼거렸다.
며칠 전, 두 번째 사건을 해결한 후 다시 출근을 했던 날에 일이었다. 의뢰가 없어 나름대로 한가롭게 일을 한 후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효은아 잠깐만.”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짐을 싸고 있던 효은을 아이작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시간이요? 네,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서 할 일도 없고 너무 늦으면 아이작이 데려다주겠다고 약속을 했기에(괜찮다고 했음에도 굳이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사무실에 남아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팀장님 효은이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안 괴롭혀!”
모든 직원들이 나가고 사무실 안에는 아이작과 효은만 남게 되었다. 아이작은 한쪽 구석에 있는 냉장고에서 무언가 꺼내 소파에 앉아있는 효은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거 마셔.”
“이거 뭐예요?”
“루나 행성에서 만들어진 음료수인데 마시기만 해도 체력을 올려주지. 인간에게도 몸에 맞는다고 정식으로 유통되는 음료수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되고.”
“감사합니다.”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겉보기에는 우유 같은데 달달하면서도 걸쭉한 것이 설탕이 들어간 플레인 요구르트를 먹는 기분이었다. 한 모금만 마신다는 것이 생각보다 맛있어 전부 비워냈다. 입가에 묻은 음료수를 닦아내고 있을 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사실 너에게 남아달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고, 얘기를 해주기 위해서야.”
“얘기요?”
“……9팀이 생겨난 이유와 요즘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줄곧 의문이었고 시간이 될 때 반드시 말해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던 말. 언젠가 말해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이 될 줄이야. 효은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봤다.
“이것을 말하기 전에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어.”
“네?”
가르쳐주고 싶은 거? 효은이 눈을 깜빡이자 아이작은 잠시 한숨을 쉬다 이내 자신의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 냉기가 느껴진 동시에 아이작의 모습이 변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짙푸른 눈동자로 바뀌었으며 오른쪽 뺨에는 효은에게 새겨진 문양이 떠올랐다.
처음 마주쳤을 때 효은이 꿰뚫어보았던 아이작의 원래 모습이었다.
“보다시피 카론 행성 외계인들은 지구인과 비슷하지만 ‘초능력’이라고 불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어릴 적에는 모두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지만 능력을 각성함에 따라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달라지지.”
그 중 나흐트크라프 가문은 불, 물, 바람, 전기 등 인간이 ‘자연적’이라 생각하는 능력을 조종할 수 있었다. 나흐트크라프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라면 자연적인 능력을 한 가지 조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은 너도 알다시피 빙결(氷結)이야.”
얼음을 생성할 수도, 냉기를 조종해 주변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능력. 물의 파생된 능력인 탓에 능력을 각성한 순간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파랗게 변했다.
아이작이 손을 움직이자 주변에 냉기가 퍼졌다. 퍼진 냉기는 아이작의 주변을 에워싸서 마치 오라처럼 그를 보호해줬다.
‘어라?’
주변에 냉기가 퍼졌음에도 이상하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효은의 의아해하자 아이작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음료수는 대상의 체온을 조절할 수도 있어. 그렇기에 추위를 느끼지 않는 거야.”
“오, 신기하네요.”
나중에 집에 갈 때 가지고 가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아이작의 말에 집중했다.
“어쨌든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에게 능력 사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나흐트크라프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여차하면 아이작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생각만 가지고 효은은 최대한 냉기를 발산하여 저를 묶은 가시덩굴을 얼리고 깨뜨렸다. 그로 인해 아이작이 올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체력이 많이 빠졌을 거야, 처음부터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했으니까.”
아이작의 말은 틀린 곳이 하나도 없었다.
무작정 능력을 사용한 탓에 체력의 반 이상이 빠진 상태였다. 그 당시에는 긴장하고 있어 미처 몰랐지만, 긴장이 풀리자마자 체력이 순식간에 떨어졌는지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물론 여차할 때에는 내가 구해줄 테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게 어떨까 해서.”
외계인을 제압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위험하기 마련이다. 인간보다 약한 외계인도 있으나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한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많으니까.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위험할 때 자신이 구해줄 수 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달려가겠으나 만약 자신이 효은에게 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만약이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상. 왜 효은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건지 알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만약에, 라는 것이 있기에 자신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거나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물론 본인이 원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팀장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알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효은은 아이작의 마음을 깨닫고 그의 제안을 받아드렸다.
“정말?”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라 살짝 놀란 표정으로 효은을 바라봤다. 효은은 그와 눈을 맞추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위험할 것은 각오했지만 특수수사대에 일한다는 건 언제나 위험에 노출된 상태이니까요.”
아이작 팀장으로 있는 9팀을 제외한 다른 팀은 인간이 많아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정부에서 나눠준 외계인 퇴치용 무기가 있고 다른 외계인 직원도 있지만.
“우선 저는 아무 힘없는 인간이고 아무리 외계인 퇴치용 무기가 있더라도 그것으로만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살해당할 뻔했던 기억은 기억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계속하다가는 위험해질 수 있다. 아이작의 문양을 받아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팀장님이나 다른 이들에게만 의지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제 스스로 지킬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장비로 외계인을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제 스스로 해보지 않고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능력을 연습해보자는 아이작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렸다.
올곧은 눈빛에서는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떨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며 효은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아이작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된다.”
그럼 당장이라도 시작해볼까?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효은도 따라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파 옆에 섰다. 생각보다 크고 넓은 바닥은 연습하기에 부족할 것이 없었다.
“내 능력은 보통 세 가지로 나눠.”
아이작이 손가락을 펼쳤다.
“첫 번째는 냉각(冷却), 말 그대로 눈앞에 있는 대상을 얼리는 거지.”
생명체나 무생명체 모두 얼어붙게 만들 수 있다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작이 옆에 있는 소파에 손을 대자 냉기가 발산되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단순히 얼리기만 하는 거라 그다지 위협은 되지 않지만,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 세포까지 얼려 부서뜨릴 수 있어.”
“그렇군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효은이 소파에 손을 대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다만 아이작과 달리 겉만 얼어붙었는지 아이작이 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졌다.
“아직은 이 정도 충격에도 깨지지만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쉽게 깨지 못할 거야.”
저번처럼 말이지. 아이작의 말에 효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 번째는 변형(變形)이야.”
“변형이요?”
“얼린 얼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변형시키는 거지.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여러 개 꺼내 바닥에 뿌렸다. 꽤 많은 양을 뿌려 두 사람의 주변에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일단 내가 바닥에 물을 뿌리면 그걸 얼려봐.”
효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고인 물에 발을 댔다.
“일단 얼리긴 했는데…….”
“잘했어. 지금은 단순히 얼리는 거지만―.”
아이작이 제 앞에 있는 물웅덩이에 발을 대자 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동시에 커다란 기둥 같이 것이 마구잡이로 솟아올랐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꿰뚫어버릴 만큼 위협적인 얼음을 보며 효은은 감탄을 내뱉었다.
“변형 단계에 이르면 이렇게 공격도 할 수 있지.”
단순히 얼리는 것만으로는 상대방을 제압했다고 할 수 없다. 약한 자나 인간이면 몰라도 강한 능력을 가진 외계인은 얼렸다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얼음을 깨고 나올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변형까지 시켜두면 시간을 벌 수 있어.”
“그렇군요, 변형이라.”
변형을 이용하면 단순히 시간 벌기뿐만 아니라 제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변형할지 생각하는 효은을 보던 아이작은 그녀의 발밑을 보고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역시 그랬나.’
효은이 얼린 물웅덩이는 단순히 얼린 것에 그치지 않고 미세하게나마 제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얼음기둥이 튀어나와 있었다.(효은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아무리 계약을 맺었다 해도 처음부터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대한 능력을 발산시켜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미 냉각 단계는 벗어난 상태이며 변형에도 재능을 보이니, 어쩌면 빠른 시간 내에 저의 능력을 모조리 마스터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정효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파장이 잘 맞는 인물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