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은 두 사람이 발산한 냉기로 인해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냉동 창고에 들어왔을 만큼 강한 한기였으나 아이작이 준 음료수 덕분인지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면 레이카가 난리치겠군.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냉기를 거둬들었다. 냉기가 차츰 사라지면서 녹아내리는 얼음. 얼음이 녹아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퍼져 있는 것까지 싹 다 정리했다.
주변에 물기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아이작은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세 번째는 생성(生成)인데, 이 단계는 훨씬 어렵고 복잡해.”
아이작이 손을 움직이자 주변에 냉기가 불어오더니 이윽고 장미 모양의 얼음이 만들어졌다.
“와~”
아까와 달리 진심어린 감탄이 튀어나왔다.
자연적인 능력을 조종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것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생성해낸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 동시에 신기하기만 했다. 외계인들을 많이 봐왔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여전히 신기하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마 처음 외계인을 만난 사람도 이런 느낌이었으려나?
“생성 단계까지 가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수만큼 얼음과 관련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그것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도 있지만―.”
뒷말을 잠시 멈추며 생성한 얼음 장미를 효은에게 건네줬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 수도 있지.”
“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효은은 놀란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손을 뻗어 얼음 장미를 받았다. 꽃잎부터 가시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미는 얼음인데도 불구하고 향기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고, 고맙습니다.”
“얼음으로 된 것이라면 모든지 네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낼 수 있어. 이 얼음 장미처럼 공격용이 아니라도 말이야.”
“그렇군요.”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
만약 언니가 이 광경을 보았으면 무척이나 좋아했을 텐데.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삼키며 얼음 장미를 코트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일단 오늘 수업은 끝. 가끔씩 시간이 날 때마다 능력 사용법을 가르쳐줄게.”“아, 네. 알겠습니다.”
“늦었으니까 데려다줄게.”
“아, 네.”
저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짓는 아이작. 그런 그를 바라보는 효은은 얼굴이 다시금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괜스레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못 마주치겠어.’
분명 첫인상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시청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느꼈던 왠지 모를 냉랭함과 압박감, 제가 인간과 외계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를 추궁하는 모습은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었다. 다시는 엮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는데.
아이작이 저에게 이곳에 들어오라고 부탁을 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던 첫인상이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끌어들인 장본인인 탓일까? 저를 가르치겠다는 명분으로 파트너로 정해 잘해주고 챙겨주려고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는 위험에 빠지면 제가 나타나서 구해주고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집안의 문양을 새겨넣어주기까지.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친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는데.’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지금도 저를 위해서 능력 사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하며 친절하게 대해줬다.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게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설명을 해주는 건 물론이거니와 배려하고 친절한 미소까지 지어줬다.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
아이작은 분명 다른 이들의 눈에도 잘생긴 얼굴임에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단순히 그가 외계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얼음 아니 겨울 같은 남자. 차가운 얼굴과 마찬가지로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 옆에 있으면 그의 주변에 퍼지는 냉기로 인해 얼어붙을 거라고 수군거리곤 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도대체 이 사람은 어디까지가 본 모습인 걸까.’
차갑기만 한 첫인상이 원래 아이작의 모습일까, 아니면 지금 저에게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이 아이작의 진짜 모습인 걸까.
만약 지금의 모습이 진짜 아이작의 모습이고 차가운 모습이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짜 모습이라면……?
그는 왜 굳이 본모습을 감추고 차가운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처음으로 아이작에 대해, 그가 감추고 있는 사정이 뭔지 궁금해졌다.
*
“효은아!”
생각에 잠긴 채 정신을 잃고 있던 효은은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무대에 새하얀 공간이 떠오르면서 원래 모습의 아이작이 나타났다. 아이작은 단번에 효은을 발견하고 재빨리 뛰어왔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과 달리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인지 아이작이 부축해주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아이작이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면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정말 괜찮아? 이렇게 많이 힘을 발산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 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어 괜찮다고 다시 한 번 말했으나 창백해진 얼굴과 축 늘어진 몸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할 자는 없었다.
“나한테 기대.”
“네? 하지만…….”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부축했을 때보다 더 밀접하게 몸을 맞대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정말 괜찮다고 떨어졌을 텐데, 힘이 빠진 자신의 몸뚱이를 원망하며 아이작에게 기댔다.
“저게 너를 공격한 아메바인이야?”
냉기로 인해 얼어붙은 소극장을 둘러보던 아이작은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했다.(이 정도로 냉기를 내뿜었다는 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는 자신들이 서 있는 곳과 반대편 문 앞에 얼어붙은 커다란 무언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맞아요.”
효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직까지는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세포까지 얼린 건지 아님 겉만 얼었는데 너무 두꺼워서 깨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몸에 힘이 다 빠질만 하지. 아이작이 손에서 고드름을 생성해서 그것에게 던지려는 찰나.
“그런데 뭔가 이상해요.”
뭔가를 봤는지 효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까는 아메바인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드는 탓에 놀라 정신이 없었으나 지금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그렇다쳐도 이렇게까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니. 아무리 아이작의 힘을 이용했다 해도 저는 외계인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으로 능력을 쓴 거니 당연 한계가 있어 미묘하게나마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아까부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요. 외계인이라면 보이는 것도 당연히 보이지 않고요.”
“저거 설마.”
아이작은 효은을 의자에 앉힌 후 아메바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어붙은 몸에 손을 댔다.
쨍그랑!
손을 대자마자 큰 소리를 내며 깨지는 얼음. 파편이 떨어졌으나 아메바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음기둥에 의해 잘려진 세포만 남겨둔 채 어디론 가로 사라져 있었다.
“역시 도망간 건가?”
하지만 어떻게?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작은 얼어붙은 세포와 더불어 아메바인 특유의 흔적들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집었다.
“이건…….”
*
“뭐지?”
본관에서 나오던 학생들은 소극장에 쳐진 폴리스라인을 바라보며 의아했다. 주변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학생들 틈에선 진아는 무슨 일인가 확인해보려다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저거 경찰이 아니라 외계인 전담 특수수사대에서 친 거래.”
“엥? 그럼 여기에 외계인이 있다는 거야?”
“아마? 그런데 꽤 위험한 외계인인지 아예 막아놨더라.”
“도대체 어떤 외계인인데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소문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멍하니 소극장을 바라보고 있던 진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극장에 외계인이?”
서, 설마? 사색이 된 얼굴로 뭔가를 떠올린 진아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어디론 가로 뛰어갔다.
본관 1층에 있는 보건실로 온 진아는 노크할 새도 없이 무작정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운 좋게도 보건실을 담당하는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온 진아는 갑작스럽게 느껴진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왜 이렇게 추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했는데?
입김이 나올 정도로 주변은 냉기로 가득했다. 겨울처럼 살을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며 왼쪽 침대에 누워있는 인물에게 다가갔다.
“진우야.”
자고 있는지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로 조그마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우야, 일어나봐. 응? 진우야.”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으나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 뭐지?’
차가운 곳에 있다 왔는지 이상하게 축축한 이불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에 의구심은 더욱 짙어졌다. 계속된 진아의 행동에 정신이 좀 들었는지 진우가 몸을 틀었다.
“진우야, 일어났어?”
눈을 뜬 진우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진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우가 입을 열었다.
“……배고파.”
“뭐?”
“너무 배가고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의해 중심을 잃은 진아는 그대로 진우의 품에 안겼다.
“지, 진우야?”
낯선 모습에 당황한 진아가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진우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진우야?”
진우와 눈을 마주친 진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은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 혹은 뱀처럼 반짝이는 세로동공의 눈동자로 진아를 보던 진우는 이내 입을 벌렸다.
「하지 마!!」
입을 벌리며 진아의 목을 물으려던 진우는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기겁하더니 황급히 진아를 놨다.
“지, 진우야?”
진아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진우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벌벌 떨던 진우가 찬찬히 손을 뗐다.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갈색의 눈동자로 돌아가 있었다.
“진아야. 어, 언제 왔어?”
제 행동에 당황한 진우가 억지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방금 전에…… 그보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러게 몸이 차?”
“몸이 차? 내가?”
놀란 진우가 제 몸을 어루만졌다.
진짜로 제 몸이 차가웠다. 냉동창고에 있다 온 것처럼.
“뭐, 뭐지?”
자신은 분명 첫 강의를 끝내고 다음 강의를 준비했으나 급격하게 몸이 나빠져 밥도 먹지 않은 채 보건실에 와서 쉬고 있었다. 교수님이 준 약이 워낙 센 탓에 먹자마자 누가 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졌는데…….
“눈을 떠보니까 네가 와 있었어.”
“뭐? 너 그럼 내내 여기서 자고 있었다는 거야?”
자신이 본 게 있기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닌 추궁의 목소리인 탓에 도리어 진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그래?”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의심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를 의심하고 추궁하는 걸까.
“무슨 일 있어?”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다고? 진짜?”
“진짜 맹세코 없어.”
“너 분명 소극장에 가―.”
뭔가를 말하려던 진아가 입을 다물었다.
“소극장?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회피했으나 진아의 머릿속에는 소극장으로 들어가는 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뭔가에 홀린 듯 느릿느릿 소극장 안으로 걸어가던 진우. 아프다고 보건실로 갔던 사람이 갑자기 소극장으로 갔는지 의아했으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면 요즘 따라 진우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무뚝뚝하게 대하고 가끔씩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의 충격으로 약을 먹고 있으니 일시적인 거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지만.
“너 정말 내가 아는 강진우 맞지?”
그저 확인하고 싶었던 물음이었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표정이 변하는 그에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