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어째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내뱉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의문을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주변의 상황과 더불어 눈앞에서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내뱉지 못한 채 억지로 삼켜야했다.
“혀, 형님…….”
가까스로 입을 열었으나 메마른 목소리는 금방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일어난 상황이 현실감이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꿈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을 텐데…….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째서 물어보지 못하는 걸까.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단순히 두려워서?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무서워서?
어느 쪽이든 괴로운 건 마찬가지인데도.
밀려오는 불안함에 차마 묻지 못하고 입안에서 메아리치던 의문은 상대방의 목소리로 인하여 억지로 삼켜졌다.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구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아이작은 자신의 형님, 블레이즈의 얼굴을 바라봤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얼굴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 없을 무(無)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 자가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형님이 맞는가.
집안의 돌연변이라고 여겨지던 자신을,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자신을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해주며 챙겨주었던 형님이 맞는 건가.
아니면 형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물인 것일까.
“나는 네가 알던 블레이즈 나흐트크라프 그대로다.”
눈동자만큼이나 감정이 실려 있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생각한 그대로 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자를 죽였다.”
내 손으로 직접. 뒷말은 이어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손과 땅바닥에 떨어진 하찮은 돌멩이처럼 여기저기 널린 시체. 모두 나흐트크라프 가문의 일원이자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웅덩이가 된 채 성의 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피웅덩이 한 가운데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잔혹하게 살해당한 자들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눈을 감은 채 절규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
“죽일 거야.”
당장이라도 찾아가 죽여 버릴 거야.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진 동시에 아이작의 몸이 분노에 휩싸여 덜덜 떨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주체할 수 없이 냉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진정하세요, 아이작 님!”
보다 못한 벤자민이 말렸으나 이미 주변은 냉동창고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뒤였다. 희준은 인상을 쓰며 겉옷을 여몄다.
“미안. 좀 흥분했네.”
“여기 체온 조절할 수 있는 외계인은 없습니까?”
얇은 옷을 입고 왔는데 이게 뭐냐고 툴툴 거리며 컵을 들었으나,
“앗, 내 콜라!”
콜라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바람에 마실 수가 없었다. 와,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희준이 우는 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콜라를 내려놨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의 신경은 온통 블레이즈가 찍힌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뻔뻔스럽게 잘도 살아있었어.
“어떻게 찍은 거야?”
“우연히 CCTV에 찍힌 영상을 캡처한 사진이에요. 흉흉한 소문이 나는 곳을 조사하던 차에 찍혔는데―.”
“여기 어디야?”
아이작은 희준의 말을 단번에 자르며 물었다.
“8번과 9번가 사이에 버려진 폐병원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의료사고로 폐업한 병원이요.”
들은 적이 있다. 인간과 외계인을 상대로 온갖 약물을 실험하다가 발각되어 폐업하게 된 병원. 약물실험으로 인해 피해자가 상당히 많았으며 일부는 사망까지 갔다고.
실험을 주체한 의사 및 간호사들이 전부 감옥에 갔으며 모든 자료를 폐기처분 했다고 대중들에게는 알려졌다. 크게 다뤄진 사건이었음에도 해결된 사항은 적게 다뤄져 소리 소문 없이 묻힌 사건.
인간과 외계인을 실험용으로 사용한 대가로 버려진 병원에 CCTV가 작동하는 것도 이해가지 않는데 블레이즈가 그곳에 발견되었다는 것이 가장 이해가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약물실험을 행했던 폐병원으로 향한 건지.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블레이즈와 그 병원의 관계성을 찾지 못 했을 뿐.
이유에 대해서는 희준도 알 수 없는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할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작은 굳은 목소리로 벤에게 명령을 내렸다.
“벤, 지금 당장 블레이즈가 발견되었다는 폐병원으로 가서 뭐라도 찾아.”
어차피 지금 가봤자 블레이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을 테지만(워낙 철두철미한 자라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지만)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면 좋으련만, 상대는 철두철미한 블레이즈인 탓에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거란 헛된 희망은 버리기로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 있어봤자 더 해결되는 건 없자며 노트북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그에 대해서 더 알아내는 것이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수고했어.”
가방을 멘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던 희준은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더니 몸을 돌렸다.
“요번에 새로 왔다는 신입 저랑 같은 인간이라면서요?”
“어, 인간이야.”
“예쁩니까?”
“왜 인간들은 신입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예쁘냐고 물어볼까. 어, 예쁘다.”
대충 둘러대기는 했으나 다른 사람의 눈에도, 아이작의 눈에도 효은은 예쁘다고 느낄 외모였기에 나름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팀장님이 직접 뽑은 사람이라니 궁금하기는 하네요, 언제 보여주실 겁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줄게.”
“진짜죠? 꼭 보셔주셔야 해여!”
소개 안 시켜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며 다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아이작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아이 인간이 확실한 거예요?」
칼릭스가 효은을 데려다주고 나서 사건에 대해 정리를 하다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누구?」
「아이언인으로 변했던 가해자 말이에요.」
「확실하겠지, 우리 눈에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외계인은 누가 외계인이고 인간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효은처럼 원래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외계인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특수한 기를 내뿜었다. 그 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 인간과 외계인 반을 나눌 정도로 얼마나 철저한 학교인데.」
「그럼 왜 외계인처럼 변해버린 걸까요? 그리고 그걸 유일하게 캐치한 것이 효은 씨라니…….」
다들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질문.
외계인으로 변한 인간 그리고 그것을 유일하게 알아차린 인간.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정말로 구별할 수 있을 줄이야. 더욱이 외계인으로 변한 인간의 ‘약점’을 봐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기까지.
역시 그 아이에게 뭔가 있는 것일까.
“차차 알아가야지.”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안녕하세요.”
“안녕~”
효은이 들어오자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 모두 밝게 인사를 건넸다. 레이카와 가장 가까운 자리가 효은의 자리였다. 들고 온 가방을 의자에 걸친 채 겉옷을 벗는데 칼릭스가 책상 위에 음료수를 건네주며 물었다.
“푹 쉬었어?”
“네, 덕분예요.”
칼릭스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칼릭스는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효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다. 칼릭스의 노력 덕분에 차안에 감돌았던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칼릭스는요? 몸은 이제 괜찮아요?”
“하루 쉬었더니 말짱해졌어.”
“우드리 씨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레이카의 치료 덕분인지 아님 외계인이라 회복력이 월등히 높은 건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니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대부분의 외계인은 인간보다 회복력이 빠르다. 그래서인지 경찰서나 소방서에서 일하는 외계인들이 언제나 위험한 현장에 가장 먼저 투입되었다. 유난히 회복력이 좋은 외계인들을 앞장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는 건데……. 인간 방패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효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차를 가지고 온 벤자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효은 님, 아이작 님이 찾으십니다.”
“저를요?”
효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작이 있은 방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어서 와.”
서류를 검토 중이던 아이작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라는 눈짓에 얼른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아이작은 효은과 마주보는 곳에 앉아 말을 걸었다.
“잘 쉬었어?”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 아마 맡은 임무가 끝나면 그 다음 날은 휴일이다 생각하면 돼.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않으니 안심해.”
“그렇군요.”
“실례하겠습니다.”
벤자민이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의 앞에 차를 내놓고는 편히 대화 나누라며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 모두 레몬티였다. 레몬을 좋아하나? 효은은 레몬티를 마시는 아이작을 나지막이 바라봤다.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얘기를 해주려고.”
특수수사대는 공무원 개념이라 월급이 제때 나오고 퇴직금도 나온다는 말을 시작으로 ―첫날부터 사건이 들어와 말하지 못한―근무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10시부터 7시까지 근무하며 맡은 임무가 없으면 그냥 퇴근해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되도록 주말에 근무하지 않도록 하나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부를 수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효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카페에서 일할 때에도 주말에 나간 적이 있어서 주말에 일할 수도 있단 말에 당황하진 않았다. 그저 완전히 특수수사대 일원이 되었구나 싶었다. 이제는 함부로 그만둔다는 말을 할 수도 없겠네.
“그리고 이건 특수수사대 중 인간 직원이 가지고 다니는 건데.”
아이작은 테이블 위에 작은 총과 함께 줄이 하얀색의 금속으로 된 시계를 올렸다.
“이게 다 뭐예요?”
“앞으로 네가 가져야 할 물건이야.”
아이작은 먼저 시계를 들어보였다.
“이건 직원끼리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시계야. 무전기라고 생각하면 편해.”
평소에는 시계이나 위험한 상황에 시계를 누르면 모든 직원에게 연락이 갈 거라며 사용법을 가르쳐줬다. 사용법을 외운 효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찼다. 오랜만에 손목에 시계를 차서 그런지 조금 어색했다.
“이 줄은 뭐로 만든 거예요? 은은 아닌 것 같은데.”
“루나에서 가져온 금속이야. 이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거지, 가격은―.”
더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이 총은 호신용 총으로 상대방을 재우거나 마비시킬 수 있어.”
위력은 외계인 호신용 스프레이보다 강하다며 정말 위급할 때만 사용하라고 덧붙였다. 총알의 색은 붉은색과 초록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알이 담긴 가방까지 넘겨주며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안한데 손 좀 내밀어볼래?”
“손이요?”
효은이 오른쪽 손을 내밀자 아이작은 두 손으로 붙잡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자 괜히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빼고 싶었으나 아이작이 꽉 잡고 있는 탓에 뺄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효은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효은의 손등에 푸른빛이 나며 무언가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다 됐어.”
아이작이 손을 떼자 효은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등을 바라봤다. 손등에 푸른색으로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건…….”
“만약을 위해서 우리 집안의 문양을 새겼어.”
“네?”
“특수수사대에 들어온 이상 위험한 일을 겪게 될 테니까. 되도록 내가 옆에 있을 테지만 만약을 위해서 새겨놨어.”
“팀장님…….”
“네가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나에게 즉각 알리게 되어있어. 그럼 내가 네 앞으로 오거나 내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했으니까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아, 가, 감사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켜주겠다는 말을 왜 저리…… 쓸데없이 다정하게 하는 건데. 효은은 괜스레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미치겠네.’
만약의 상황을 위해 한 조치였으나 문양이 새겨지면 상대방의 감정이 공유되는 탓에 효은이 저로 인해 부끄러워하는 걸 느낀 아이작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 역시 효은과 마찬가지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