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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갛게 그녀 파랗게 그
작가 : 이몽블
작품등록일 : 201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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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여자 시점)
작성일 : 16-08-23     조회 : 731     추천 : 0     분량 : 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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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비가 쏟아지듯이 내린다. 시원스럽게 뚫린 하늘 때문에 오늘은 위를 보지 못하고 땅만 보고 걷는다. 추적추적한 빗소리와 눅진한 습기들이 달라붙어 온종일 나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뜨거운 햇빛과 멈춰진 바람보단 낫겠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창문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줄기, 우산 굴곡을 따라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는 날이면 그를 떠올리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고 말았다.

 

 비가 오는 날엔 검은색 운동화를 신는다. 물에도 잘 젖지 않고 비가 묻어도 보이지 않아서라고 할까, 아마 나 홀로 정한 무언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일정한 행동 패턴은 아침부터 시작된다. 매일 아침에 늘 모카번이나 치즈 번을 구입해 아메리카노 한잔과 같이 먹고, 출근 후에 책상 정리를 하고 손을 씻는다.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소독을 한 후에 물을 버리고 다시 미지근한 물을 담는 작업한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왔고, 그렇게 비가 온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빵과 아메리카노를 포기했다. 출근 후 책상 정리를 하고 손을 씻곤 매번 하듯이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담으려 했지만 정수기가 보이지 않았다.

 

 "정수기는 어디로 간 거야."

 

 약간의 짜증 섞인 혼잣말 끝에 회사 근처 편의점에서 물을 구입했다. 매일 하던 일련의 행위를 안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다운됐다. 커피 대신 구입한 옥수수 수염차가 유난히 껄끄러웠다.

 

 별다른 일없이 마무리된 하루 속에서 흐르는 시간과 흐르는 빗물과 함께 온 퇴근시간.

 아직도 밖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내리는 비의 양만큼 '박선우' 이름 세 글자가 잊히지 않는다. 머릿속에 맴도는 우린 왜 헤어져야 했을까라는 거지발싸개 같은 의문이 번진다. 벌써 헤어진 지 1년이 지났건만 비만 내리면 내 기분을 옥죄여와 사람을 멍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비가 싫다. 이렇게 사람을 바보같이 만들고 하루 종일 습함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드는 게 꼭 누구 같다.

 

 나의 하루는 참 재미없다. 7:00시 즈음 일어나 씻고 화장을 한다. 7:50분 즈음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탄다. 8:40분 즈음 회사에 도착해 6:05분 즈음 퇴근을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7:00시 즈음 집에 도착한다. 그렇게 집에 와서도 별거 없다. 샤워하고 밥 먹고 머리 말리고 그리고 설거지와 빨래 그러고 나면 10:00시 즈음이 된다. 그럼 월화수목금 드라마를 챙겨보곤 자는 것이다. 주말도 참 멋없고 심심하기 짝이 없다. 집에 히키코모리처럼 틀어박혀 밀린 예능을 보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기 일수다.

 

 박선우를 만날 때는 달랐다. 아, 선우를 '박'선우라고 성을 붙이는 이유는 따로 없다. 가장 친한 친구도 성을 붙여 부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저 그와 나의 현재의 거리처럼 심리적 거리를 두고 싶다는 다짐인 것이다.

 

 여하튼, 박선우를 만날 때는 내가 달라졌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같이 뭐라도 하고 싶어 안 달라했다. 뭐 본성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내가 변하려 했던 게 중요 포인트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예전에 나로 다시 돌아온 것뿐이다. 아니 어쩌면 더 굼벵이가 되어버렸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언제 끝나?]

 

 기범이다. 평범한 어쩌면 푸근한 몸매에 각진 턱을 가진 선우와는 대조적으로 남자한테 이 단어를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탄탄한 육감적인 몸을 가진 남자다. 얼굴은 샤프하고 웃을 때 눈이 사라지는 게 약간 2AM 정진운 같다. 선우와는 정 반대로 애교와는 거리가 먼 무뚝뚝함의 극치인 사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애교를 꺼내 들어야 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지만, 그냥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 아닌 기범은 든직한 사람이었다.

 

 [회사. 곧 끝나]

 [알았어. 근처 카페에서 기다릴게]

 

 우산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창가에 긴 다리를 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 기범에게 다가갔다. 기범은 아메리카노 빨대에서 입을 떼더니, 옆 의자 놓여있는 보라색 수국을 나에게 건넸다.

 

 내가 말했었다. 보라색 수국이 받고 싶다고. 그걸 또 사주는 기범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아무렇지 않게 못 들은 척 하지만 또 그걸 들어주는.

 

 수국을 건네며 미소 짓는 기범은 어딘가 선우와 닮았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며 기범과 선우를 겹쳐 그린다.

 

 기범과 나는 꽃을 주고받는 남녀 사이다. 그렇게 카페에 앉아 눈을 마주치며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팔을 툭툭 치기도 하고 다른 연인들 마냥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한다. 하지만 비 오는 카페 밖을 나오면 우리는 우산 두 개를 펼친다.

 

 내 우산, 그리고 기범의 우산.

 우리는 우산을 따로 쓰는 사이다.

 그러니까 음, 그런 사이.

 

 나는 더 이상 남을 상처 주는 내가 상처받는 연애 따위는 하고 싶지가 않다. 비가 오는 날 선우를 계속 생각하는 이상 난 다음 연애는 시작할 수가 없다. 선우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기범과 나는 계속 우산을 따로 쓸 것이다.

 

 기범은 걷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비가 내려 따로 쓴 우산 사이의 거리만큼 우리의 거리도 좁혀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일 거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꽃 예쁘다, 고마워."

 "전에 보라색 수국 이야기하길래. 오는 길에 눈에 보여서 샀어."

 

 기범은 멋쩍은 듯이 앞만 보고는 머리를 긁었다.

 

 "가지고 싶다고 말하면 다 사주는 거야? 신나는데?"

 

 나는 웃으며 기범에게 농담을 던졌다. 우리는 아주 가끔, 아니 어쩌면 아주 자주 만난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에 나의 회사 퇴근 시간에 맞춰 근처로 찾아온다. 그러면 같이 저녁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 왜 화요일과 목요일만 나를 보러 오는 거냐고.

 그때 그는 골똘히 생각하듯이 입을 다물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냥-'이라고 가볍지만 의미가 무거운 대답을 해준다. 그 그냥은 그냥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그냥이라는 말에서 그가 긴 대답을 삼키고 있다는 걸 안다. 나름 한 눈치 하는 나는 그의 속 뜻을 알고 있음에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우와 헤어지고 몇 날 며칠을 울며불며 술을 퍼마실 때, 기범이 나에게 고백 비스무리한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날 아프게 안 할 자신이 있다고, 그런 놈 말고 자신한테 오라고. 술에 취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내 귀는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입은 그 날의 기억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답은 하지 않으면서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기범을 만나는 이유를 나에게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그냥은 그냥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송주은! 오늘 곱창!!]

 [ㅇㅇ]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서야 ㅇㅇ이라는 성의 없는 답장이 도착한다. 나는 이런 답장에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늘 이런 식의 대화였기에 약간의 서운함도 없다. 매달 둘째 주 금요일은 룸메이트 주은과 회식을 하는 날이다. 나의 룸메이트는 회갈색 눈동자에 정말 사슴 같은 눈망울을 소유했는데, 팔다리도 길고 쭉쭉 뻗어있어 짧은 옷을 입고 그녀가 밖을 나가는 날이면 지나는 남정네들이 주은을 안 쳐다보고는 못 배겼다. 그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긴바지는 답답하다며 매번 짧은 옷을 집는다.

 

 나는 그녀와는 다르게 답답하게 그지없는 한여름에 긴팔 긴바지를 입는다. 비가 올랑 말랑 한 눅눅한 날씨에 검정 운동화까지 신은 나는 퇴근 후 곱창집으로 향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고, 수많은 사람들 때문인지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불안했고 심장이 급격히 두근거리고 호흡이 잘 안됐다. 때로는 손발이 떨리면서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듯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메슥거리는 게 미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1년 전부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이 증상이 심해졌는데 그걸 송주은한테 말하면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공황장애네 공황장애. 곱창이나 먹어'라고 쿨내 나게 내게 말했다.

 

 "이모!!! 저희 왔어요~"

 "어~ 왔으"

 곱창 이모는 힐끔 우리를 쳐다보더니 안쪽 자리를 권했다. 나름 맛집으로 소문이 난 곳이라 30분은 기다려야 했지만 8년째 단골인 우리는 전화 한 통으로 자리를 빠르게 잡을 수 있었다.

 

 "5인분이요!"

 

 여자 둘이 테이블을 잡고 앉자마자 5인분을 외쳤다. 으슥한 뒷골목에 잘 보이지도 않는 모퉁이에 있는 곱창집치곤 맛이 있고, 오래된 곳이라 근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시끄러움과 활기참이 뒤섞여 오히려 식욕을 자극하고, 음식에 집중을 주는 흔치 않은 가게라 시끄러움과 사람을 싫어함에도 내가 사랑하는 곳이다.

 

 "아, 스트레스 받아. 회사가 나쁘지는 않은데, 내가 왜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주은이 입에 곱창을 한껏 넣고는 씹지도 않고 말한다.

 

 "나도. 난 끈기가 없나 봐."

 

 온 사방에 퍼지는 곱창의 특유의 향이 내 옷 속으로 스며들 때쯤, 그제야 대화가 시작된다. 매번 이야기하는 내용은 같은 주제인데 늘 할 말이 많은 우리다. 처음 시작은 회사 내용이다. 힘들다 하기 싫다 나와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밉다 저 사람이 괴롭게 한다 등등이고, 두 번째는 남자 이야기다.

 주은은 매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싫어하고 또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을 좋아한다며 우울해한다. 그러면 나는 그 이야기에 위로를 해주는 것이 아닌 내 이야기만 떠든다. 그런 우스운 관계지만 주은은 내게 불릴 때 언제나 '송주은'이다. 성을 불러도 전혀 서운해하지 않는 그런 우리다.

 

 "기범 씨랑 안 사귀어? 그냥 사겨~ 너도 싫진 않잖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주은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에 우울해하면서도 '싫진 않잖아'라는 말을 내게 한다. 시끄러운 곱창집에서 '싫진 않잖아'라는 이 멘트가 둥둥- 떠다닌다. 싫진 않는다 라는 말은 '그렇게 좋지도 않다'라는 말이 된다.

 

 "아직도 선우인가 선웅인가 걔를 기다리는 건 아니지?"

 주은은 은색 그릇에 양껏 담겨져 있는 부추무침을 들면서 말한다.

 "... 아니지. 내가 뭘 기다려."

 

 나는 늦은 대답을 토해낸다. 대답은 늦긴 했지만 정말로 진짜로 그를 기다리는 건 아니다. 그저 나를 기다리는 거다. 완전히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와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아질 정도로 단단해진 나를.

 

 고요한 정적이 좋은 주말이다.

 주은은 회사를 가고, 나는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주은이 다니는 회사는 야구구단 이었는데 그래서 주말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주말에 출근을 했다.

 

 냉장고엔 물외엔 음식이 없었고, 마땅한 반찬이 보이지 않아 옷을 대충 갈아입곤 밖을 나왔다. 밖은 부슬부슬 옅은 비가 내렸다. 다시 우산을 챙겨 올까 하다가 이 정도는 뭐- 그러면서 그냥 집을 나왔다. 마트를 가려면 우체국과 갈비집을 꼭 지나쳐야 했다. 우체국과 갈비집을 볼 때면 머리가 깨질 듯 흔들렸다. 흐믈흐물 번지는 기억에 밖으로 나오는 게 싫었지만 배고픔을 이기진 못했다.

 

 "15,600원입니다. 포인트 번호 있으세요?"

 "아뇨. 그냥 주세요."

 

 2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똑같은 마트를 다니면서도 나는 포인트를 모으지 못했다. 이게 다 귀찮음 때문이리라. 대충 고른 파와 계란 그리고 아이스크림 하나, 요플레를 구입한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시 집으로 왔다. 머리카락이 미스트를 뿌린 듯 촉촉해졌다.

 

 큰 대파에 흰 부분만을 다진 후 참기름과 소금을 넣었다. 휘휘 저어 잠시 놔둔 후 밥을 했다. 밥솥에 쌀을 세 번 푹 퍼서 넣곤 물로 세 번 헹군 뒤 손 두 번째 마디에 물이 좀 미치지 않게 맞추었다. 그런 다음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눌렀다.

 

 여자 둘이 사는 집이라, 머리카락이 늘 많았다. 밥이 되는 동안 바닥 정리를 하고 빨래를 돌렸다. 주은은 비가 오는 날에 빨래를 싫어한다. 공기에 습기가 가득 차서 온 집안이 눅눅해지면 기분이 젖은 솜 같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화장실 환풍기며 에어컨을 틀고 집을 나갔다. 나는 소리에 예민해 그녀가 집을 나가고 나면 집안의 소리가 나는 모든 물건의 작동을 중지시켰다. 그녀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비가 오는 날에도 늘 빨래를 했고, 그녀는 내가 환풍기를 트는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늘 환풍기를 틀었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빨래는 매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하루 정도는 빨래를 미뤄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환풍기를 틀지 말자고 했다. 그녀는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서로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서로의 습관을 이해했다.

 

 다된 밥을 좀 식힌 후 밥을 볶았다. 아까 만들어 둔 파가 들어간 참기름 소스에 밥을 비볐다. 밥이 다시 뜨거워지고 고소한 참기름 향이 공기 중을 떠다닐 때 계란 하나를 깼다. 계란이 퍼지면서 밥에 덮였다. 하얀 쌀밥이 약간 노오랗게 됐다. 계란이 더 익기 전에 불에서 후라이팬을 뗀다. 펴져있는 상에 돌아다니는 책을 올리고 후라이팬 째 들고 온 나는 숟가락 하나를 들고 퍼먹기 시작한다. 김치하나 없이도 맛있다. 좁은 집안에 참기름 향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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