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털이 붕숭붕숭한 복숭아 5개를 구입했다. 복숭아는 아기의 엉덩이 마냥 토실하게 영글어 부끄럽다는 듯 붉은빛을 뗬다. 검은 봉다리에 담아 팔을 휘휘 저으며 집으로 복숭아를 가져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눅눅한 곰팡이 냄새를 잡기 위해 어어컨을 틀었다. 가져온 복숭아를 냉장고에 넣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물까지 뜨거워진 날씨에 내 몸을 씻었다. 띠띠띠- 도어록 소리가 들리더니 주은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화장실에서 그 소리를 듣곤
"어, 왔어?", 했다. 그러자 주은이 "어.", 답했다.
몸을 씻고 수건으로 몸에 방울방울 매달린 물들을 닦았다. 뿌옇게 변한 거울 속엔 흐릿해진 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알몸으로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오슬오슬 몸에 붙었다.
"저녁 뭐 먹을래?"
주은은 리무버를 솜에 묻혀 눈두덩이에 올려놓고 거울을 보며 말했다.
"나 복숭아 사 왔는데"
"그럼 오늘 저녁은 바나나에 복숭아를 먹는 걸로"
의도치 않은 다이어트를 하게 된 우리는 저녁 메뉴를 원래 집에 있던 바나나와 내가 사 온 복숭아로 하기로 했다. 주은은 바나나를 먹으면서 화장을 지웠고, 나는 머리를 말리면서 바나나를 먹었다.
기다란 바나나의 노란 껍질을 벗겨내 그 하얀 속살을 한 움큼 배어물면 입안 가득 바나나가 찬다.
혀로 그 바나나를 3등분 해 한 조각씩 먹는다. 먹으면서도 드라이기를 놓지 않는다.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과 시린 에어컨 바람이 맞부딪치며 싸운다. 내가 바나나 2개를 먹는 동안 주은은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왜 복숭아를 이렇게 잘라?"
선우가 복숭아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내손에 들려있는 복숭아는 껍질이 있는 부분이 반, 껍질이 없는 부분이 반이다. 3cm 정도 껍질이 붙어있고 또 3cm 정도는 껍질이 없게 얼룩덜룩 벗겨져 있다. 꼭 수박 껍질 무늬처럼.
"음, 뭔가 까끌 부드럽게 먹고 싶어."
선우가 그게 뭐야 변태 같아, 했다. 나는 배시시 그를 보면서 웃었다.
텁텁하게 꺼슬리는 껍질 채 먹고 싶기도 하고, 부드럽게 달콤한 속살만 먹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다.
나는 그 복숭아를 쑹텅쑹텅 잘라 선우에게 건넸다. 선우는 변태 같은데 맛있다, 했다. 나는 내가 변태 같다는 선우를 한번 노려보고는 그래도 내가 좋지? 물었다. 그러자 선우가 이 복숭아 같아, 했다.
주은이 샤워를 하는 동안 복숭아를 잘랐다.
껍질 부분이 반, 껍질이 없는 부분이 반이다.
빨간 껍질이 반, 하얀 속살이 반이다.
나는 복숭아를 뭉텅뭉텅 잘라 입안에 넣었다. 달큰한 복숭아 향이, 붕숭한 복숭아 솜털이 혀끝을 간지럽힌다.
다른 복숭아는 껍질을 모조리 벗겨 가지런히 그릇에 담았다.
"나오면 복숭아 먹어."
물소리가 들리는 화장실에 대고 말했다. 주은은 또 응, 했다.
아직 까끌 부드러움이 남아있는 복숭아 조각을 입안으로 넣었다.
날씨가 지겹게 뜨겁고 눅눅스럽다.
하루 종일 손에 붙잡고 있던 핸드폰의 온도보다 뜨겁다. 해가 이미 사라졌는데도 뜨거움이 남아있는 습한 공기에 숨을 마셨다가 더운 공기를 내뱉었다. 홧홧한 열기에 눈 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서 어지러움이 일었다. 휘청 거리다가 이내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잠시 서있었다. 디스트로진에 파란 로고가 새겨진 흰 티를 입은 기범이 손을 흔든다. 미소를 한껏 머금은 그의 모습은 아지랑이에 덮여 있다.
"덥지?"
잔뜩 일그러진 내 모습을 보곤 기범이 내 어깨를 잡고 말한다. 나는 곧 정신을 차린 후 키 큰 기범을 올려다본다.
"방금 씻었는데 끈적 거려."
기범은 예의 있다. 매너 있다. 자상하다. 잘생겼다. 그런 그가 웃는다. 힘들 때 나를 보듬어 준 사람. 그가 자연스레 내 손을 잡는다.
"시원하지?"
손이 차갑다. 차가운 기운이 내 뜨거운 손을 녹인다. 시리다, 내 손이 내 마음이.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연애의 시작은 손을 잡는 것부터라고. 그의 손을 처음 잡던 날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영화관에서였나? 그를, 박선우를, 오롯이 아로새겨 마음에 담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범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이내 손을 빼낸다.
"우와. 저거 이쁘다!"
나는 뺀 손으로 주변에 있는 악세사리를 집어 들다가 내려놓는다. 기범은 사줄까? , 묻는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
잊으려 하면 할수록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밀어내려 하면 할수록 온몸이 사슬로 묶여 옥죄여 오는 것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를 내 몸에 깊숙이 아로새기기로 했다. 아프고 고통스러움을 참고 그를 온몸에 남기기로 했다. 그래야 잊힐 것 같기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그 아픔에 무뎌져 제대로 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처음 만났던 날,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옷, 처음 만난 날의 날씨, 처음 같이 봤던 영화, 처음 같이 같던 음식점, 처음 같이 찍었던 사진들을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날, 헤어졌던 날의 나, 헤어지자는 말을 했던 음성,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문자들을 되새겼다.
나에게 보여줬던 눈빛,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목소리, 따뜻하게 감싸던 손길, 여기저기 아직도 내 주변에 공기처럼 남은 흔적들을 그냥 그렇게 내 눈에 담았다. 사소한 물건에 사소한 것들에,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그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별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거짓말
누군가가 아니, 많은 이들이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 시간은 그를 곱씹는 날들뿐이라 약이 아니라 독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상처가 아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처에 약을 바르기보다는 상처가 더 이상 낫지 않게 계속해서 상처를 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상처에도 새살이 돋아날까 봐 조바심을 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별의 상대인 그는 자존심을 건, 선한 역할이었다. 이별에서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필연적으로 악역을 맡았다. 그는 사귀자고 할 때도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으며,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도 그저
"우리 그만 연락하자."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알면서도 구질구질하게 나와 끝내고 싶은 거냐고 추궁했고 결국엔 '헤어지자'라는 끔찍할 말을 마주했다. 그냥 정직하게 자기 의사를 짧고 담담하게 말해주고 끝내면 좋았을 텐데, 명확한 이유와 확고한 말투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도 같은 시간 속에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걸 그에게 바라는 건 무리였을까. 감정표현을 피상적으로 했던 그가 너무 미웠다.
그렇지만 그래서 내가 그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와 내가 정반대였기 때문에.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검은콩'이었고 나는 '아이스크림 31'이었다. 정말 같이 있는 게 안 어울리는 조화.
'아이스크림 31', 늘 먹고 싶은 것만 찾아먹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고, 원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스타일.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보고 점심메뉴를 이야기하는 사람, 데이트할 때나 소개팅을 할 때도 내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게 나였다.
나와는 반대로 그는 '검은콩' 같은 사람이었다. 굽거나 튀기거나 찌거나 해도 그 본질의 맛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변함없는 단단한 사람이었고, 세심한 성격이여서 확실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고, 배려심이 많았기에 나에게 상처되는 행동들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같이 있다 보니, 아이스크림 같던 나도 조금씩 변해갔다. 아니, 그저 '검은콩'이 되고자 노력했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그를 만나고 나서는 싫어하던 등산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만화방을 안 갔다. 쇼핑중독인 내가 내 것을 안 사고 네가 필요하다는 것들을 샀다. 자꾸 무언가를 주고 싶었고, 해주고 싶었고,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녹아져 갔다. 그는 나를 많이 바꿔놓았는데, 그에게 맞춰져 버린 지금에 나에게는 네가 없었고, 나도 없었다.
너에 기준에 맞춰 내 삶이 변한다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나, 검은콩처럼 고소하고 든든하게 니 옆을 채워주고 싶었는데,
아직도 아이스크림 같은 여자야. 나도 많이 노력했는데
아이스크림이 검은콩이 될 순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