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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갛게 그녀 파랗게 그
작가 : 이몽블
작품등록일 : 201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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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데이 (남자 시점)
작성일 : 16-08-23     조회 : 461     추천 : 0     분량 : 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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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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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맑았다. 꼭 좋은 날이라는 걸 억지로 알리듯이. 미적지근한 태양이 가져온 마음들이 오늘의 나를 밍숭맹숭하게 만드는 것 같아 기분이 영, 그랬다. 어김없이 아침에 은설이 찾아올 것을 알기에 옷을 제대로 입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손에서 녹아내리는 왁스를 오랜만에 머리에 발라본다.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만지고 있을 때 체리빛 문의 녹슨 손잡이가 돌아간다. 언제나 은설은 노크도 없이 당당하게 들어온다.

 

 -내가 막 들어오지 말랬잖아.

 

 그녀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오늘 날씨 좋다-를 연신 말했다. 은설의 쌍꺼풀 없는 깊고 큰 눈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하얀색 무릎까지 오는 주름진 스커트, 하늘색 어깨가 다 드러난 옷을 입은 단발머리의 그녀가 상큼하게 다가와 창을 연다. 칙칙한 작은 원룸에 창이 열리자 사각한 햇빛이 들어오고 따뜻한 7월의 공기가 섞인다.

 

 -위고랑 끌로에는?

 

 내 말에 은설은 배시시 웃으며 밖에서 싸우던데?라고 말했다.

 은설은 원룸 구석에 있는 다갈색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달력을 보더니 그것을 집어 들어 올렸다. 나는 간단하게 짐을 싸다가 그녀의 행동을 보곤 놀라 다가가 은설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달력을 빼았았다.

 

 -내 물건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부러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2015년 6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있는 특이하고 작은 달력.

 그 달력은 내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 유하가 특별히 내게 만들어 준 달력이었다. 남자 손바닥 크기만 한 달력에 매달마다 유하와 내가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이 여자랑 헤어진 거 아니야?

 

 은설은 늘 그렇게 알면서 물었다. 난 내가 답하기 싫은 내용은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대답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와의 헤어짐을 미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나쁜 버릇을 은설은 알고 있다. 그 달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툭-하고 던져버린 뒤 짐을 들고 은설에게 안 가냐고 물었다. 은설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툴툴거렸지만 이내 바닥에 내팽게쳐진 달력을 보고는 쪼르르 나를 따라 원룸을 나왔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마실 음료와 자잘한 것들을 사서 역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도 위고와 끌로에는 고양이와 개처럼 앙숙인 것 마냥 계속 투닥거렸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위고가 그렇게 말하자 끌로에가 뭐가 미안한데-라고 물었다.

 

 아, 이곳도 마찬가지구나.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사랑싸움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유하와 나는 만나는 동안 싸운 적이 거의 없다. 그저 유하가 서운해-라고 말하면 나는 미안하다고 했고, 내가 질투나-하면 그녀는 아유 귀여워-하면서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는 한참을 깔깔 웃었다.

 

 니스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기분 좋은 여행을 하자며 온갖 수다와 위고의 애교에 넘어간 끌로에는 다행히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설은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녀의 풍성한 가슴이 내 팔 바깥쪽에 닿는다. 은설의 찰랑거리는 갈색 단발머리가 태양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였다.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우리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미리 예매해둔 기차표로 왕복 50유로라는 기분 좋은 가격에 니스로 출발했다. LYON PART-DIEU에서 출발해 아비뇽, 엑상 프로방스, 마르세유, 툴롱, 깐느 등 여러 역을 거쳐 NICE VILLE 까지 가는 TGV(떼제베)기차였다. 사실상 무척이나 길다면 긴 시간인 4시간 반의 기차 여행은 즐거운 친구들로 인해 짧게만 느껴졌다.

 

 철도가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다. 창으로 보이는 드넓은 초지와 드문드문 서있는 오두막, 간간히 보이는 풍력발전기, 저 멀리 높고 푸르른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기차 안에서 밖 풍경을 동영상으로 담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니스로 가는 길-. 그 길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니스에 도착해 간단한 요깃거리로 햄버거를 구입했다. 그 후 꽃시장과, 니스 성을 구경했다. 프랑스혁명기념일인 바스티유데이라 니스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수많은 인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고 같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일렬로 서서 거리에 대기했다. 마세나 광장 주변에서 시내 구경을 하고 점심으로는 스페인 음식인 빠에야와 라자냐, 각종 샐러드를 먹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날은 어둑한 저녁이 되어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거리는 한산해졌다. 밖이 깜깜하자 사람들이 해변가로 몰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해변가로 가기로 했다. 달달한 연인인 위고와 끌로에는 저만치 먼저 가고 나는 은설과 함께 니스 해변의 유명 산책로인 프롬나드 데 장글레를 걸었다.

 

 -돌멩이들이 동글동글해서 예쁘다.

 

 은설은 발아래 굴러다니는 바닷가 돌들을 보며 내 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바닷가는 해변이 크고 길었고, 오돌토돌 몽글한 자갈들이 파도와 부딪쳐 쏴아-쏴아-시원한 소리를 반복했다. 은설은 파도소리에 기분이 좋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시원한 파도와 바닷바람과 그리고 내 얼굴이 비쳤다.

 

 바스티유데이의 피날레인 불꽃이 까만 하늘을 수놓았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팡- 하고 터지자 수많은 불꽃이 사방으로 퍼졌다. 일렁이는 바다에도 불꽃이 거울처럼 비쳐 발갛고 파랗게 바닷속을 꾸몄다. 하늘 한번. 바다 한번. 하늘 한번. 바다 한번. 나는 그렇게 하늘에서 꺼져가는 불꽃을,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봤다.

 

 -선우야,

 

 그녀가 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지막이 불렀다. 하얗고 창백해 보이던 유하와 달리 탄탄한 피부를 가진 은설이 까맣고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커다란 폭죽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나는 여전히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보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길었던 니스의 불꽃 축제가 끝나자 그녀는 잡았던 내손을 놓았다. 나는 그제야 그녀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불꽃 축제가 끝나고 조용해진 뒤에야 그녀의 작은 입이 떨어졌을 때였다.

 

 -난 네가 좋...

 

 흰색 대형 화물 트레일러가 광란의 질주를 하며 사람들을 덮쳤다. 지그재그로 움직이면서 대형 화물차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려는 듯이 눈을 뻔뜩이며 방향을 휙휙 틀었다. 트럭에 받힌 많은 사람들이 볼링핀처럼 공중을 날아다녔다. 은설은 해야 할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은설의 손을 잡고 어디가 안전한지도 모르면서 뛰고 또 뛰었다. 서로 밀치고 울고 악지르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하늘을 울렸던 폭죽 소리만큼 사람들의 울음과 비명이 총성과 바닷소리와 함께 공간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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