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아파트가 다 휘청였다.
구릿빛 피부, 굳이 벗겨보지 않아도 온통근육으로 뒤덮여 있을 것 같은 단단한 몸,
그리고 그 몸 위에 정갈하게 다려진 군복을 갖춰 입은 도연의 목소리였다.
왼쪽 가슴팍엔 UDT/SEAL 글자가 선명했다.
도연은 늘 딩동, 벨을 누르고 현관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경례를 붙였다. 가뜩이나 우렁찬 목소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전체로 울려퍼졌다.
"아 쫌! 쪽팔리게!"
도연 키의 반토막쯤 되는 여자아이가 현관문 안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왔다.
하루이틀 겪는 일도 아니건만 이연은 늘 이렇게 질색팔색이었다.
"오빠 온 거 아무도 관심 없거든!!"
씩씩 대며 제 오빠의 등을 있는 힘껏 밀어 현관문 안으로 들여보낸 이연이 '짜증나!' 한마디를 더 외치곤 쇼파에 털썩 앉았다.
지금 막 티비속엔 열 세살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이자 유일한 삶의 이유인 가수가 나와 노래를 부르려는 찰나였다.
자고로 저 가수가 티비에 얼굴을 내밀고 있을 때 이연을 방해하는 건, 이 집안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이연의 홀대가 익숙한 도연이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주말에 집이 이렇게 조용한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쉿!!."
대답 대신 검지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린 이연이 텔레비전 볼륨을 세칸쯤 더 올렸다.
이연과 말을 섞으려면 저 가수의 노래가 다 끝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쯤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인지라 도연은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저기, 이연.."
흐음.
제법 진지한 얼굴로 텔레비전에 집중한 이연의 모습이 귀여워 몇마디 더 건네려다 이연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은 도연이 멋쩍은 한숨을 내쉬었다.
꼬맹이적엔 그렇게 귀찮게 따라다니더니, 이젠 사소한 눈길마저 뾰족한 가재미눈이라는 사실이 퍽 서러웠다.
"엄마 모임. 아빠랑 같이."
노래가 끝나고 제 가수가 들어가자 이연이 새초롬하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여전히 제 오빠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이연의 손길이 꽤나 익숙했다.
그래도 말 섞어주는 게 어디냐, 도연이 냉큼 이연의 곁에 붙어 앉았다.
"그럼 너 혼자 있었어?"
"그럼 누구랑 있어?"
아 씨. 볼 게 없어, 볼 게.
영혼없는 대답끝에 추임새마냥 붙는 투정들마저 귀여워 도연의 입가엔 연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선배님, 제발 웃지 좀 마십쇼. 애들 겁 먹습니다.'
사람좋게 지어보이는 웃음에도 후배들이 지레 겁먹을 만큼 딱딱한 도연이건만 집에만 오면 왠지 바보천치가 되는 기분이다.
요즘은 딸바보가 대세라는데 동생바보도 좀 끼워줬으면.
"이야, 다 컸네 이연이. 혼자 집도 보고."
"나 내년에 중학생 이거든?"
아 씨. 이것도 본 건데.
"벌써 중학생이야? 우와 이연이 진짜 다 컸네."
"아 장난해? 근데 오빠 왜 왔는데? "
아 씨. 이따 여섯시에 가요천국 재방송이나 봐야겠다.
연신 혼잣말을 섞어가며 요리조리 채널을 돌리던 이연이 드디어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자 도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티비는 이따 봐. 오빠 집에 온 거 안반가워? 나 수요일까지 휴가냈어. 다다음주 너 생일이잖아. 그때 훈련들어가서 못 오거든. 그래서 오늘 온거야. 미리 우리 이연이 생일선물 사주려고."
행여라도 이연이의 관심이 다른데로 돌아갈까 속사포처럼 다다다다 꿀같은 말을 뱉어낸 도연이 뿌듯한 얼굴로 이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박. 역시 우리 오빠야! 헤헤."
역시.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인 이후 이렇게 반가운 동생의 눈길을 받은적이 있었던가.
선물, 두 글자는 늘 뾰로통한 사춘기 소녀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꽃이 피어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필요한 거 다 말해, 이연아. 오빠가 다 사줄게."
다섯살도 아니고 열 살도 아니고 자그마치 열 다섯 살이나 어린, 그래서 마냥 귀여운 요 깍쟁이에게 점수를 따는 법을 터득한 도연은 늘 집에 올 때마다 선물공세였다.
용돈이나 선물로 이연이의 환심을 살 때면 '아 내가 이맛에 돈 벌지' 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심정을 백 분 이해하고도 남는 도연이었다.
"이연이 요즘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음.. 갖고 싶은 건 아니고 소원."
도연의 질문에 병아리같은 입에선 금새 '소원' 두 글자가 튀어나왔다.
"소원? 아까 나온 그 가수랑 결혼할래 뭐 이런거는 아니지?"
"내가 애야? 그딴 시덥잖고 현실성 없는 소원이나 빌게?"
"와. 진짜 다 컸네 이연이. 소원이 뭔데? 오빠가 들어줄 수 있는 거야?"
"응! 들어줄 수 있는거야. 그런데도 안들어주면 오빠는 오빠도 아니고."
"뭔데 그렇게 겁을 줘? 말해봐. 들어줄게."
이연의 얼굴에 또다시 배시시 웃음꽃이 피어났다.
제 말이라면 껌뻑 죽는 오빠라는 걸 이미 다 알아버린, 진정한 승자의 웃음이었다.
.
.
.
"...콘서트??"
되묻는 도연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아니아니, 콘서트는 아니고 팬미팅 같은 거라니까."
"너 학교는 어쩌구?"
"그러니까 내 소원이라구우. 그날 오빠가 나 조퇴 좀 시켜주라. 응? 제바알. 이번마안.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응? 제바알."
"너무 어려운 소원인데? 팬미팅을 가겠다고 학교를 빼먹어?"
"누가 아예 빼먹는댔어? 4시까지라니까? 어차피 그 날 수업도 5교시까진데 뭐! 4교시 끝나고 점심시간에 조퇴하면 수업 딱 한시간만 빠지는 거잖아! 딱 한번이야, 응? 제바알! 오빠아!"
부탁하는 건지 협박하는 건지 당최 분간이 서질 않아 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앙칼지고 뾰족한 이연의 목소리는 끊이지도 않고 이어졌다.
"동생 딱 한번뿐인 소원인데 그것도 못들어줘? 그리구 우리 그날 5교시 체육이란 말이야! 오빠도 똑같애! 맨날 말로만 내편이라 그러고 부탁은 하나도 안들어주면서!"
코 앞에 (k9 자주포)가 있대도 이렇게 귀가 따갑지는 않을 것 같다. 고막을 찢을듯한 총소리와 전투함의 각종 소음들에도 눈하나 깜빡 않던 도연이 고래고래 질러대는 이연의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안들어주겠다는 말을 뱉기 전인데도 저 모양이면, 안 봐도 뻔했다. 만약 도연의 입에서 '안되' 소리가 뱉어진다면 이연은 들고 있는 리모콘을 휙 내팽개치고 제 방 문이 부서져라 쾅! 닫고 들어가 코빼기도 안비칠 것이다.
호화마마보다 무섭다는 사춘기가 그랬다.
요즘 애들은 다 빠르다던데 그래서 사춘기도 이렇게 빨리 와버린 모양이었다.
"흠… 안 들어 준다고는 안했는데?"
도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깊게 생각하나 마나였다. 도연은 이연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건 진리였다.
"들어줄거야? 보내줄거야? 조퇴시켜줄거야?"
뾰족한 눈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이연의 눈에 금새 반달이 떴다. 양 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갈만큼 배시시 웃어주는 건 보너스였다.
흥, 그럴 줄 알았어. 오빤 내 밥이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연의 표정이 하는 얘기는 도연의 귀에 쏙쏙 잘도 들어왔다.
"화요일이야. 알았지? 화요일 점심에 학교에 와서 조퇴시켜주는 거야."
"그래, 알았대도. 근데 그 콘서튼지를.. 어디서 한다구?"
"팬미팅이라니깐. 압구정역."
"서울? 서울 압구정?"
"응."
"혼자 가?"
"아니"
"친구?"
"아니, 오빠."
"오빠? 누구? 나?"
"응. 조퇴만 시키고 끝냄 안되지. 나 서울 길도 모르는데 혼자 보내려구? 오빠가 델따 줘야지. 기다렸다 델꾸오구."
"나도 팬미팅 같이 보는거야?"
"아니! 그거 이벤트 당첨된 사람만 볼 수 있는 거라 오빠는 안되. 오빠는 그냥 근처에서 기다려야되."
"몇시간이나 하는데?"
"몰라! 두시간 정도 하려나?"
아 그리고.
뻔빤한 요구사항을 끝도 없이 이어가던 이연이 새끼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군복 입고 오면 절대 안되! 약속!"
***
쾅!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고딕체.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로 '원장실', 정직하게 만들어 새긴 명패가 한가운데 붙어있는 나무문.
시술실이며 상담실이며 죄다 돈을 들여 한껏 고급스럽게 꾸며 놓고 왜 원장실은 저따위로 놔둘까, 늘 궁금하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박하지씨, 나 좀 봅시다. 지금 당장!"
열린 문 안에서 젊은 원장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테이션을 지키고 서 있던 하지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맨날 우리보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면서 지가 제일 시끄러워요, 하튼. 아, 짜증나. 나 들어갔다 올게."
"언니, 자꾸 말대꾸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듣고 한귀로 흘리면 되잖아. 응? 맨날 조마조마해 죽겠어."
"그래, 하지씨. 그래도 이 근처에서 이만큼 월급주는 데는 여기밖에 없어. 알잖아. 돈 하나보고 버텨. 무슨말인지 알지? 응?"
"맞아,맞아. 하지씨 짤리면 우리 어떡하라구."
저벅저벅 원장실로 걸어 들어가는 하지의 뒷모습이 꽤나 익숙한 듯 동료들이 저마다 걱정어린 잔소리를 해댔다.
알았다는 표시로 손을 번쩍 올려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 하지가 기세등등하게 원장실로 들어갔다.
수없이 들락거린 곳이건만, 원장을 꼭 닮아 촌스러운 방 분위기는 참 적응하기 어려웠다.
"박하지씨. 굳이 먼저 말 안해도 내가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그래,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무슨 일로 또 귀하신 고객님 입에서 원장불러 소리가 나온 거야? "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하지를 올려다 보던 원장이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생각할수록 분한지 꽉 쥐어진 통통한 주먹에 실핏줄이 아른거렸다.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셔서요."
하 참, 이거야 원. 나 참, 이거.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은 무심한 하지의 대답에 기가 차다는 듯 원장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말도 안되는 어떤 요구? 들어나 보자구. 말 해봐."
들어도 용서는 안하겠지만 그럼에도 변명할 기회를 딱 한 번 주겠으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무언의 눈빛이 하지를 향해 반짝였다.
"예약 시간 10분 남겨 놓고 취소 전화를 하셨습니다."
"급한일이 생기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지씨는 예약하면 무조건 지켜?"
"그럴수는 있는데 오늘 저녁 야간진료로 봐달라셔서요. 아시다시피 오늘은 야간진료가 없는 날이잖아요."
하. 젊은 원장의 미간에 다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정중하게 설명 드렸나?"
"당연하죠. 근데도 오늘만 봐 달라고 우기시잖아요. 다른 고객들 아무한테도 말 안할테니 자기 사정 좀 봐달라고. 남편이 출장에서 내일 돌아오는데 그 전에 꼭 시술 받아야 된다고요."
"그래서 하지씨는 뭐라고 응대했지?"
"그렇게 따지면 저희 직원들도 남편과 가족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오늘 꼭 일찍 퇴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솔직히 오늘은 야간 진료가 없는 유일한 날인데 너무 하잖아요."
하. 젊은 원장의 입에서 또다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씨는 서비스인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씀드렸는데 그 고객님 혼자 열받아서 소리를 지르신 겁니다."
"요구를 들어드릴 수 없어 죄송하다는 말은 했고?"
"애초에 무리한 요구를 한 건 고객님이기 때문에 제가 죄송할 필욘 없었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고는 했습니다."
"승무원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승무원 출신인거랑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물어보시니까 대답을 하자면, 네. 항공서비스과 졸업하고 아주 잠깐 항공사에 근무했습니다."
"처음 입사하면 내 알기론 서비스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고객 응대법, 인사법, 뭐 이런 거 말이야. 하지씨를 채용한 것도 그 이유고."
"서비스 교육을 받는 건 맞지만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개인 생활까지 침해 받아가며 들어줘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는 않아서요. "
더 할 말 있으신가요?
하지의 무심한 두 눈이 원장을 향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앞으로 그런 문제가 있으면 제발 하지씨는 빠지고 최실장한테 넘겨. 스테이션에서 인사나 하고 간단한 스케쥴 상담이나 하라고.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정말.. 휴. 나가 봐요. 머리 아프니까."
하지가 원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원장의 두 손이 분에 못이겨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지만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짜를테면 짜르라지.
바들바들 떨리던 손을 들어 하지에게 훠이훠이, 나가라는 손짓을 한 원장이 의자에 깊숙히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빼어난 외모와 서비스 관련 경력때문에 두 번 생각도 않고 하지를 채용했던 6개월 전으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런 원장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태연히 나오는 하지를 향해 동료들이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웠다.
"하지씨! 완전 최고."
"하지씨 아니었으면 우리 오늘도 야간진료 할 뻔 했어."
"솔직히 원장도 하지씨한테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 고객은 당해도 싸. 한두번도 아니고. 지난번에는 아들 재롱잔치 가기전에 시술해야 된다고 아침부터 와서 졸랐었잖아. 진짜 개념이 없다니까."
"얼른 이리 와서 쉬어, 하지씨. 욕 먹느라 피곤하지? 우리가 보고 있을게 좀 쉬고 있어."
원장에겐 웬수, 동료들에겐 영웅, 고객들에겐 불친절의 대명사인 하지는 동료들의 칭찬이 익숙한 듯 또다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직원 휴게실로 총총총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