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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삭아삭한 로맨스
작가 : 진소르
작품등록일 :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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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울의 여름_연애하기엔 넌 너무 어려.
작성일 : 18-12-17     조회 : 303     추천 : 0     분량 : 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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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욱- 캐리어 지퍼를 여니, 구겨진 옷들이 한가득 이었다.

 전부 다리미로 쫙 펴도 시원찮을 옷들이었다.

 

 “에잇!”

 

 여울은 캐리어를 한쪽으로 미뤄버리고,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전부 1년 전의 옷들이라 유행도 지나고, 해묵은 옷들이었지만 그래도 구겨진 옷들보다 나았다.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서 화장도 했다.

 

 째각- 시계는 오전 10시에서 10시 30분으로 긴 바늘이 순간이동을 했다.

 너무 오랜만에 화장을 하다 보니, 화장도 한참동안 걸렸다.

 

 “헐..”

 

 숯 검댕이 눈썹, 짙은 아이라이너, 빨간 입술까지 가부키 화장이나 다름없었다.

 망한 화장을 만회하기 위해 빳빳한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짧은 청치마를 입었다.

 긴 포니테일 머리를 하니, 영락없는 대학생 같았다.

 

 “좀 괜찮은가?”

 

 스탠드 거울 앞에 서, 못 먹어서 빠진 체형을 뽐내었다.

 

 “누나 뭐해?”

 

 여욱이 불쑥 문을 열었다.

 

 “선 보러 가냐?”

 

 쿵- 잠깐 동안 여울을 훑어보던 여욱이 짧고 굵은 말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이게 진짜!”

 

 여울이 닫힌 문을 두고 애먼 말을 했다.

 신경질이 난 여울은 검정색 미니 샤첼 백을 들고 쿵-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

 

 “잔액이 부족합니다.”

 “응?”

 

 ATM 기계에서 청량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여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20만원 까진 없나? 그럼 15만원은?’

 “잔액이 부족합니다.”

 

 점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럼 13만원은?’

 “잔액이 부족합니다.”

 

 이쯤 되니 뒤에서 끙- 하는 참을성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10만원은 있겠지?’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ATM기계에서 돈을 토해내는 소리가 흘렀다.

 귀한 오 만원권 지폐 2장이 여울의 손에 쥐어졌다.

 ATM기계가 토해 낸 통장에는 287원이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총 10만 287원이 전 재산이었던 거다.

 

 ‘망했다. 오늘 서울 가야하는데..’

 

 끄응- 하는 소리가 뒤에서 또 들렸다.

 기계에서 통장을 받고 자리를 비켜드렸다.

 어제부터 계속 민폐만 끼치고 있었다.

 띵동- 경쾌한 소리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남자친구 마루가 보낸 쪽지였다.

 

 ‘xx레스토랑 예약했어. 오늘 6시까지 보자.’

 

 진짜 망했다. 마루가 레스토랑을 예약했으니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전 재산이 10만 287원인 상황에서 서울로 올라가야했다.

 하..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돈이 없으니 마음도 가난해진 것만 같았다.

 여울은 은행 문을 열고 나와 터미널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내가 KTX예약하라고 했지!”

 

 하완이 여욱에게 신경질을 냈다.

 

 “아.. 그럼 직접 예약하시지..아니면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시던가요.”

 

 ‘아삭파이’의 터줏대감인 여욱이 지지 않고 궁시렁 댔다.

 업무 이외의 일을 직원에게 시킨 제 잘못이었다.

 하완이 휴대폰으로 얼른 KTX예약을 확인했다. 이미 매진이었다.

 조금이라도 매장 일을 더 하고 가려 했는데, 덕분에 일찍 매장을 나서야 했다.

 

 “나 대신 마감 잘하고.”

 “에이. 걱정 마세요. 사장님도 선 잘 보시고요.”

 “...”

 

 하완이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언제 선본다고 말 한적 있었던가.’

 “크크.. 진짠가봐.”

 

 ‘후-’, 하완이 분노의 한숨을 내쉬자, 반듯한 앞머리가 펄럭거렸다.

 재간둥이에 가끔 버르장머리도 없는 여욱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 모습을 시크한 알바생 준영이 유심히 보았다.

 단발보다 짧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에 헐렁한 옷차림을 주로 입는 준영은 미소년 같은 외모 때문에 겉으로 봤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분간이 안 갔다.

 걸걸한 목소리에 힘쓰는 일도 마다않는 체력까지, 말투와 행동이 영락없는 사내였지만.. 준영은 여자였다.

 

 “나 쟤 보기 싫으니까. 빨리 나가야겠다. 준영이 수고해.”

 “네!”

 

 하완이 겉옷을 걸쳐 입고 서둘러 나갔다.

 준영은 하완이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쳐다봤다.

 여욱은 준영의 행동을 주시하고,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

 

 “혹시 승차권 안 찍고 타신 분 있을까요?”

 

 기사님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없으시면 이제 출..”

 “저요!”

 

 흰색블라우스에 청치마를 입은 여자가 포니테일 머리를 휘날리며, 번들거리는 얼굴로 헉헉- 가뿐숨을 몰아쉬며 버스를 탔다.

 

 “여기 승차권..”

 

 승차권을 찍은 여자가 숨을 고르 쉬며 하완에게 다가왔다.

 하완은 여자가 다가올수록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 여자.. 설마..?’

 “아.. 놓칠 뻔했네.”

 

 하완의 이인석 옆, 1인석에 앉은 여자가 미니 샤첼백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이미 땀에 흘러버린 메이크업 때문에 얼굴이 지저분해 보였다.

 

 “이제 출발할게요!”

 

 취이- 버스가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여자는 버스가 출발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쿠션을 팡팡-두드리며 황급히 메이크업을 고쳤다.

 하완은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푹- 웃음이 터졌다.

 

 ***

 

 버스가 서울을 향할수록 창문에 뺨을 기댄 여울의 잠도 깊어졌다.

 하완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고, 잠을 깼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자리 1인석에 앉은 여자에게 향했다.

 차창에 뺨을 기대고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단조로운 하완의 일상에 트렁크 터진 여자의 얼굴이 너무 인상 깊게 남아서 그런 거라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런데 트렁크 터졌을 때, 얼굴이 어땠었지?’

 

 하완은 또 힐끔 여자를 봤다.

 쓰읍- 차창에 뺨을 기댔던 여자가 침을 닦으며 일어났다.

 하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취이- 버스 정차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내렸다.

 잠에서 깬 여자도 엉겁결에 내렸다.

 하완은 여자의 찰랑이는 포니테일 머리가 멀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

 

 코엑스에 도착한 여울이 익숙한 듯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일부러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간 패션아울렛의 신상품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브랜드 옷가게 차창 너머로 비치는 세련된 옷들을 입은 마네킹들이 어쩐지 여울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카드라도 긁을 걸 그랬나?’

 

 하필 마루가 예약한 레스토랑은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딱 봐도 아울렛이나 인터넷 저렴한 쇼핑몰에서 산 것 같은 싸구려 재질이 오늘따라 눈에 거슬렸다.

 여울은 퇴근길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지하철을 탄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덕분에 여울이 신경 써서 입은 옷들이 더 망가졌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쯤엔 높이 묶은 머리도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여울은 거울을 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남자친구인 마루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슥슥- 고기 써는 소리가 정적마저 깰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하완은 선보는 여자를 앞에 두고 어색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여자의 칼 주름이 잡힌 정장은 한 눈에 봐도 여자가 전문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어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글싱글 웃는 여자의 얼굴은 서비스업 전문직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무슨 일하신다고요?”

 “프랜차이즈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계사라고 들었는데..”

 “그건 벌써 2년 전이에요. 회계사 접고 과수원일 하면서 납품할 업체 찾다가 제가 프랜차이즈까지 운영하게 됐습니다.”

 “어머 멋있어요. 도전하는 삶. 저도 아나운서 하다가 최근에 프리선언하고 강연하고 있어요.”

 

 여자의 맞장구에선 어쩐지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완은 이쯤하고 일어서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뭐라 하고?’

 

 아직 식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실례를 범하고 일어서는 건 무례하고 경솔하다 생각했다.

 탕- 어디선가 포크와 나이프로 테이블을 찍는 소리가 들었다.

 하완과 맞선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웬 남자가 벌떡 일어나 있었다.

 앞에 여자가 있는걸 보니 커플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하완의 시선을 고정 시킨 건 벌떡 서 있는 남자가 아닌 앞에 앉은 여자였다.

 

 ‘저 여자.. 설마..’

 “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벌떡 선, 남자가 앞에 앉은 여자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자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하완의 눈에 들어왔다.

 하완이 제대로 본 거라면 저 여자는 분명 트렁크 터진 여자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끼익-하는 의자소리와 함께 하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맞선녀의 당황한 표정이 하완의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여자를 구해야한다!

 

 “으아아아앙”

 

 쿵쿵- 뛰어가던 하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잘못본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벌떡 선, 남자는 폭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울고 있었다. 그것도 애처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으아아앙!”

 

 여울은 당황해서 마루를 감싸 안았다.

 

 “야! 울지마!”

 

 뻘쭘 해진 하완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맞선녀의 얼굴은 차가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까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네. 아.. 죄송합니다. 많이 당황..”

 “저 이만 갈게요.”

 

 맞선녀가 일어나서 쌩하니- 가버렸다.

 하완의 돌발행동에 기분이 나빴나 보다.

 갑자기 고민이 해결됐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 이유가 맞선녀가 일어나서 가버린 것 때문인지, 아니면 트렁크 터진 여자가 알고 보니 남자친구가 있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멍한 상태에 멈춰서 있다가 뒤를 돌아보니 벌떡 선, 남자도 트렁크 터진 여자도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하완은 홀로 쓸쓸히 스테이크를 씹으며 빈속을 달랬다.

 

 ‘그 여자 맞네. 트렁크 터졌던..’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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