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뽀짝뽀작 모이시랑께.”
과수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사람들을 모았다.
썬 캡을 쓰고, 손수건을 두른 중년의 남녀 대 여섯 명이 가까이 붙었다.
혼자만 유독 하얀 피부를 가진 여울만 20대였다.
“음음.. 수확하러 이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농장이 1000평이 넘는 부지여서, 적진 않아요. 그래도 오늘 안으로 수확을 다 끝내는 것이 목표여~ 여름내 약했던 태풍이 가을에 다시 온다는 소문도 무성하고, 최대한 빨리 수확을 마치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이것이지요.”
아저씨의 답답하고 긴 말에 썬 캡을 쓴 아줌마가 대꾸했다.
“아따~ 결국은 하루 안으로 다 수확하라 이거 아니여?”
“맞지요.”
“그 말을 그리 답답하게 한 당가?”
“흠흠. 어쨌든 다들 열심히 해봅시다! 파이팅!”
파이팅을 휘두른 아저씨의 주먹 쥔 손이 무색하게 사람들이 무심히 흩어졌다.
여울만 멀뚱멀뚱 서 있었다.
“뭣 한 당가?”
“네?”
“얼른 안가고!”
“아, 네!”
일손들은 일렬로 서 있는 사과나무들을 한 줄씩 맡았다.
여울도 사과나무 한줄 앞에 서서 수확을 시작했다.
툭- 꼭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쭉쭉 나가는 옆의 아주머니와 다르게 여울은 손이 느렸다.
‘장갑을 껴서 그럴까?’
꼭지가 두꺼운 사과는 두 손으로 힘껏 따도 꼭지가 끊어지지 않았다.
“뭐하고 있어요?”
“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여울이 옆을 돌아봤다.
여울의 옆에는 연갈색 피부를 가진 외꺼풀의 남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헉- 소리 날 만큼 남자의 외모가 잘생기기도 했지만, 남자와 여울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울은 옆으로 한 발자국 떨어지며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때 전화 받았던 사람이에요. 박하완.”
남자는 손으로 전화 받는 시늉을 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남자의 얼굴에 묻는 것 마냥 해사한 미소였다.
“네.. 안녕하세요..”
여울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울이 두 손으로 따도 잘 안 되던 사과를 하완이 힘껏 잡아채자, 꼭지가 끊어졌다.
“헐..”
여울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휘둥그레졌다.
하완은 힘이 장사였다.
“잘 안되나 봐요?”
하완이 내민 사과를 여울이 꼭 쥐어 받았다.
“수확은 처음이죠?”
“네..”
이렇게 말하고 약간 부끄러워졌다.
하완이 한 손으로 따는 것을 여울은 두 손으로도 못 따고 있었으니, 약간 부끄러워졌다.
“정 안되면 이거 받아요.”
하완이 손바닥만 한 집게발을 건넸다.
“니퍼에요. 정 안되면 이거로 끊어요. 너무 높은 것들은 이따가 간이사다리 사용해서 수확해요.”
“네..”
하완은 친절에 여울은 호감어린 얼굴로 쳐다봤다.
하완이 여울의 웃는 모습을 보더니 씩-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렇게 웃는데, 이따가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지 말아요.”
그때까지 여울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처음엔 수확이 정말 재밌었다.
사과 한 알, 한 알, 딸 때마다 얻는 재미가 있었다.
나무마다 있는 상자에 사과도 금방 찼다.
그런데 30분이 지나가고, 한 시간이 지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가자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선선한 가을 날씨임에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는 여울을 이미 앞질러간 지 오래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대충 확인했을 때, 현재 수확하는 사람들 중 여울이 가장 느렸다.
꼬르륵- 이젠 뱃속에서 소리도 났다.
‘언제 점심 되는 거야?’
같은 자세로 사과만 따니, 허리도 아팠다.
여울은 한손으로 허리를 짚고, 해가 중천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따- 아가씨. 지금 제일 느리면서 빈둥대는 겨?”
아까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아저씨가 불쑥 핀잔을 줬다.
“네? 아니요!”
여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억울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했건만, 수확이 처음이라 결과가 엉성했을 뿐이다.
“내가 같이 따줄까요?”
어디선가 나타난 하완이 여울의 옆에 서, 쳐다보지도 않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 그럼 좋죠.”
여울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따. 아가씨가 예쁜 게 총각이 절로 붙네.”
옆에서 수확하시던 아주머니가 볼멘소리를 하셨다.
여울은 머쓱했다.
반면 하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수확을 이어나갔다.
하완의 큼지막한 손이 사과를 쉽게, 쉽게 땄다.
하완이 합류하면서 수확의 속도도 빨라져,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얼추 속력이 맞아갔다.
하완의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여울은 어깨 너머로 하완의 얼굴을 살폈다.
집중하는 하완의 얼굴에서 건강한 매력이 넘쳤다.
아까 자세히 못 봐서 몰랐는데, 다시 보니 얼굴도 잘생긴 것 같았다.
‘역시 일하는 남자는 멋있어.’
여울은 점점 설레기 시작했다.
‘미쳤나봐. 내가 처음 본 남자한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때마다 마루가 생각났다.
마루가 시무룩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울이 너 그럼 안 돼. 바람피우면 안 돼.’
씁쓸했다. 이미 전 남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여울의 마음속에선 마루가 떠나가질 않았다.
여울이 헤어지자 말해놓고..
“이봐요.”
남자가 여울 앞에서 두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네?”
“정신 차려요. 수확 안 할 거 에요?”
“아, 네!”
여울은 씁쓸한 얼굴로 힘껏! 사과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하완은 어쩐지 쓸쓸한 여울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큼지막한 솥뚜껑이 평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솥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계탕이 솥 안에 꽉꽉 차 있었다.
하완의 이모가 국자로 닭을 풀 때마다, 진득한 국물이 옹골차게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하고 다들 점심 잡수시오!”
과수원 아저씨가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가을 햇볕에서 진땀을 빼던 사람들이 쾌재를 부르며, 평상으로 모여 들었다.
“점심은 뭣이당가?”
“삼계탕이라던디?”
“워메. 배에 기름칠 좀 하겄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싸. 삼계탕!”
여울은 신이 난 나머지,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한 바퀴 돌며 뜀박질을 했다.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풋- 뒤에서 따라가던 하완은 그만 웃음보가 터졌다.
“어서들 오시오. 어서들.”
하완의 이모가 사람들을 평상에 앉히고, 큰 대접에 삼계탕을 푸짐하게 퍼줬다.
배식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때깔 좋네.’ 같은 감탄사가 나왔다.
여울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워메. 어찐대. 자리가 없는데.”
네 다섯명 앉자, 좁은 평상이 꽉 찼다.
“아가씨는 서서 먹어야 하겠는디?”
하완이 여울을 도와주자, 시샘을 했던 아줌마가 여울에게 괜히 심술을 부렸다.
“전 괜찮아요.”
여울이 해맑은 얼굴로 받자, 하완이 여울에게 다가가 대접을 빼앗았다.
“나 따라와요.”
“뭐 하는 거 에요?”
하완이 숟가락이 꽂힌 자신의 대접과 여울의 대접을 양손으로든 채, 평상에서 멀어졌다.
여울은 배가 고팠기에 무작정 대접을 따라갔다.
“둘이 어디 간 당가?”
“젊은 남녀 사이에 정분났네. 정분났어.”
“남자가 여자를 제법 괜찮게 보는 것 같은데?”
하완을 졸졸 따라가는 여울을 보고 사람들이 희희낙락거리며 수군거렸다.
젊은 남녀의 연애상열지사는 언제, 어디에서나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이다.
“하완이가 저 아가씨를 좋아한 갑소.”
“저 아가씨는 이짝에서 처음 봤을 건디. 아가씨는 괜찮아 보이더만.”
하완의 이모와 이모부도 여울에게 관심을 보였다.
***
하완이 여울을 끌고 간 곳은 과수원에서 멀지 않은 이모내외의 2층 단독주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신 하완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집이었다.
끼익- 큼지막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잘 꾸며진 정원 안에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아담한 탁자와 간이의자가 보였다.
“우와. 집 되게 예쁘다.”
하완은 탁자에 삼계탕을 두고, 부엌으로 수저를 가지러 들어갔다.
여울은 하완이 부엌에서 나올 때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당 곳곳을 구경했다.
마당에 깔린 잔디밭에는 앙증맞은 돌다리들이 깔려 있었다.
잔디밭을 입지 않은 맨살의 흙 밭에는 철을 맞은 코스모스들이 얕은 가을바람에 몸을 휘날리고 있었다.
“와서 밥 먹어요.”
“대박. 여기 집도 하얗다. 나 하얀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는데, 꼭 그리스 산토리니에 있는 집 같아요.”
“여울씨..”
“대박 이건 드라이플라워를 벽에 매달아 놓은 건가?”
“여울씨..”
하완이 여울을 아무리 불러도 여울은 집 구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
여울이 뒤 돌아봤다.
하완이 여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밥 먹어요. 제발.”
“아, 네.”
여울이 고분고분 앉았다. 방금 전 자신의 과감한 행동으로 하완도 당황했는지 말없이 밥만 먹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저를 달싹 거리는 소리 외에는 소음이 없었다.
대신, 가을 매미소리,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 얕은 바람이 불때마다 흩날리는 꽃잎 등 그림의 한 폭 같은 배경만이 존재 할 뿐이었다.
대접에 곱게 누웠던 닭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국물만 남아 있을 때쯤 하완이 용기를 냈다.
“오후에 수확 끝나면 나랑..”
하완과 여울의 눈이 마주쳤다.
여울이 벌떡 일어났다.
“혹시 여기 커피는 없나요?”
“...”
“아니, 제가 너무 많이 먹어서.. 오후에 졸릴 것 같아서.. 그러니까..”
“안쪽에 부엌 있는데, 이모가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가는 거 싫어하실 거 에요. 제가 탈게요. 커피는 그냥 있는 걸로 아무거나 타와도 되죠?”
“네..”
하완이 커피를 타기위해 집 안 으로 들어갔다.
여울은 벙 찐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나한테 고백하려 한 거야?”
믿기지 않았다.
“아니, 언제 봤다고!”
그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진한 사과 향.. 여긴 사과를 주로 재배하는 과수원이니까.
당연한 향기였는데,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이 향 어디서 한번 더 맡은 것 같은데?’
그때, 여울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트렁크가 펑-하고 터졌던 날, 자신을 쳐다보고 쇼핑백까지 건네줬던 남자..
너무 잠깐이라 제대로 눈도 못 맞췄던 남자..
하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