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헤아는 주막 주인과 대화를 끝낸 후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에 좋아보이는 방에 들어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저씨는 무슨 느낌 못 받으셨어요?”
“뭐가?”
“같이 오래 사셨으니까 아저씨도 뭔가 느꼈을 거 아니에요.”
“글쎄.”
이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글쎄랄 것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내에 대한 기억은 그저 군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장면. 딱 그뿐이었으니 말이다.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그렇게 말하고 벌러덩 몸을 누웠다.
“그면 뭐 어쩔 수 없죠.”
헤아는 그렇게 말하고 이불 쪽으로 슬그머니 기어갔다. 그리고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와아. 여기 이불 엄청 푹신푹신해요오.”
그러면서 기분이 좋은지 얼굴까지 비비고 있었다.
똑 똑.
한참 헤아가 이불과 놀고 있을 때 밖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물 다 데워놨으니 빨리 와서 씻게나.”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헤아는 부모님과 헤어져야 하는 아이처럼 슬픈 눈망울을 한 채 무언가에 끌려가듯 방 밖으로 나섰다.
“빨리 씻고 와서 놀아.”
“네에.”
헤아의 축 처진 목소리에 나는 작은 미소를 그렸다.
“말도 안 돼.”
처음에는 착각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강시들이 계속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에 죽은 자들이 내뿜어대는 사기(死氣)들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사기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기 속에서 살짝 풍겨오는 비릿한 철 냄새. 그것이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아닐 거야. 분명….”
죽었어야 했다. 아니,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돌아왔다 하더라도 이상했다. 그는 아니, 그 존재는 이곳 북계가 아니라 교주도를 돌고 있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특이한 강시라고 해도 이곳 사람들이 보기엔 강시란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강시를 특이하다고 생각하나 했다. 그 강시가 교주도로 갔다고 했을 땐 조금 의아해했지만, 소문이 다 그렇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릿한 냄새가 ‘그’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쌀쌀해지는 이 계절에 땀이 온몸을 덮을 정도로 힘들고 지쳤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그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으니 말이다.
“헉…. 헉….”
이렇게까지 뛰어본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원나라에 쫓길 때가 마지막이었나….
“오랜만이네요. 경애 씨.”
마을 입구에서 지쳐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마을 주민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구. 온몸에 땀이 아주. 무슨 일이세요.”
“아니에요. 제 지인이 이곳에 왔다고 한 거 같아서 서둘러 오다니 보니 이러네요.”
하면서 경애는 조금 차오른 체력을 빌려 몸을 일으켰다.
“지인이 왔다고요? 흠, 그럼 혜숙 아주머니네 주막으로 가보세요.”
“예?”
“요즈음 난리가 아니어서 피난민밖에 없잖아요. 근데 얼마 전에 여행객이 한 명 와서 거기서 묵고 있어요.”
“여행객이요?”
확실히 그녀는 이 시대에 여행객이라면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상외로 너무 빨리 찾아버린 덕분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근데 이렇게 버선발로 달려오다니. 혹시 그분이 경애씨의….”
실제로 버선발은 아니지만, 자신의 상황과 같은 표현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후자가 들렸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아마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맞아도 아닐 것이다.
“크큭.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제가 중요한 만남을 두고 너무 오래 잡아뒀네요. 빨리 가세요.”
“아, 예.”
솔직히 경애는 아직 그를 만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조금 더 잡아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매정하게 경애를 두고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경애는 그녀를 다시 부를까 했지만 고민하는 사이 사라진 그녀를 다시 부를 재간은 없었다.
“하아.”
결국, 가야 했다. 물론 쓸데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릴 순 있지만,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나면 그땐 할 말이 없으리라.
“왜 오셨나요.”
경애의 말은 바람을 타고 흩어지고, 그녀는 쓸쓸히 주막으로 발을 옮겼다.
씻고 오니 역시 헤아는 이불과 놀고 있었다. 이제는 만지는 수준이 아니라 온 몸에 돌돌 말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이고. 오랜…. 월휴….”
그때 내 귀에 밖에서 주막 주인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대상은 여성인 거 같은데 그녀는 목소리만 살짝 들릴 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근데 내 고향 얘기는 왜 나오는 거야.’
나는 주막 주인이 말한 내 고향 때문에 문 쪽으로 조금 다가가 더 자세하게 들었다. 하지만 멀리 있나 가까이 있나 피차일반이었다. 둘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고, 멀리서 이불과 부스럭대던 헤아도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쿵 쿵.
그 순간 들리는 문 두들기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헤아는 내 모습에 피식 웃었다.
“방금 무지 고양이 같았어요.”
“이게.”
나는 갑자기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괜히 헤아에게 짜증을 냈다.
“여보시게 젊은이.”
“예.”
나는 대답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전에 말한 그 사람이….”
나는 주막 주인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 주막 입구에서 그녀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 임신한 나의 아내가 말이다.
방 안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것을 미리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그냥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놀다 올게요!”
라고 말하고 후다닥 도망친 헤아는 어질러진 이불만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오랜…. 만이에요.”
“그러네요.”
어색한 분위기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아름다운 풍경, 그녀 그리고 헤어짐. 그뿐이었다. 솔직히 그녀의 얼굴만 기억날 뿐이지 그녀의 이름, 나이와 같은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아무것도 몰라서 조용히 있는 나를 대신해서 입을 연 건 그녀였다.
“아마도요….”
아마도. 아마도였다. 이제 와서 그녀가 내 아내인지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아내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남편이라니. 말이 되는가.
“아마도라…. 혹시 기억을 잃으셨나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건 군 생활밖에 없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아내와 헤어지는 것뿐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려 해도 전부 그것뿐이었다.
“혹시, 저는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말에 나는 말 할까 말까 많은 고민을 했다.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짧게 고민했지만 나는 더 많이 알아가기 위해선 그녀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았고, 그러려면 최대한 그녀에게 맞춰줘야 했다.
“아내….”
“예?”
“당신은 내 기억 속에서 내 아내였소.”
그 말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나도 그녀의 말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아내였다. 가장 가고 싶었던 마을에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그 사실에 벅차올랐다.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친구는 누구였고…. 이런 사소한 얘기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삶에 내가 즐거워하고 신기해한다는 것에 약간 어색함을 느꼈지만 잃어버린 기억의 일부분을 되찾는다는 기쁨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기도 했다.
“우린…. 아기가 있었소?”
그 말에 그녀 아니, 경애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굳게 닫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매우 슬퍼 보였다.
“미안하오.”
나는 괜히 말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에요.”
경애는 애써 그렇게 말하고 힘들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품속에 안겼다.
“아기는…. 괜찮아요.”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도 나도 그런 분위기 속에 서로를 조심스레 껴안았다. 힘껏 껴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팔을 덴다는 느낌으로 안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그녀는 꽤 오랫동안 안고 있다 떨어졌다.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흠흠.”
나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 민망해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돌리지 말아봐요.”
하고 그녀는 내 얼굴을 붙잡았다. 나는 눈동자만 데구루루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내 얼굴을 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상처가 많네요.”
그 말에 나는 긴장감이 푹 하고 풀리면서 또, 내 몸을 먼저 걱정해 주는 그녀가 고맙기도 했다.
나는 손으로 얼굴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상처라 느껴지는 부분이 몇군데 있긴 했다.
“그게, 이것저것 하다 보니 그렇게 됐소.”
하면서 나는 말을 둘러댔다.
고려군에게 쫓기고, 스님들에게 쫓겼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고생 많으셨어요.”
그녀도 다행히 더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약을 발라야겠어요.”
“아니, 괜찮소.”
나는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내 몸은 시체기 때문에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약이라니. 그러면서 나는 경애 옆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그녀는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아마 그때. 그때가 내가 그녀를 떠날 날이 될 것이다.
“왜 그러세요. 많이 아파요?”
솔직히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그녀인데 그녀를 본 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오. 괜찮소.”
나는 이제 경애를 위해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많이 힘듭니다. 전선을 더 물려야 합니다.”
그 말에 공저는 침음을 흘렸다. 500여 명으로 이루어진 항마군이면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본디 어디로 향하기로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강시들은 너무 잘 벼려진 칼이었다. 지금껏 5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결과만 두고 본다면 3구의 강시만 어떻게든 무너트릴 수 있었다. 약 30구의 강시였는데 5번의 전투 후에도 약 30구라니. 공저는 앞날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지원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다들 눈을 피할 뿐이었다.
공저는 어쩔 수 없음에 한숨을 쉬었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서경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려 했다.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 강시와 싸우는 중이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에서의 지원을 바라는 것이 요원했다.
“공저 스님. 저희는 할 만큼 했습니다. 시간도 많이 벌었습니다. 족히 5일은 벌지 않았습니까. 지금 백성도 중요하지만, 홍건적도 중요합니다. 보십시오. 홍건적을 견제해야 할 병사들이 강시와의 싸움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피해가 커지면 다시 홍건적에게 서경을 내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흠.”
“크음.”
어느 한 장수의 발언에 모든 사람이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강시 외에는 관심이 없어 정보에 어두운 공저 자신의 귀에도 ‘홍건적 10만 대군이 내려온다.’라는 얘기가 들릴 정도면 이곳은 물론 어느 곳에서도 듣고자 한다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10만은 상상 그 이상으로 거대한 숫자였다. 그중 절반만으로도 인간의 파도가 될지도 모른다.
공저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항마군 자체가 노역이나 사원전(寺院田)에 종사하는 수원승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이들을 데리고 저렇게 강력한 강시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과 같은 투승(鬪僧)은 고려 땅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부에게 수원승도들로는 불가능하니 자신과 같은 분들을 모아달라고 했지만, 시간이 얼마큼 걸릴지는 몰랐다. 그런 와중에 서경에는 차곡차곡 병사들이 모이고 있다. 심지어 능히 강시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판단되는 몇 안 되는 장수들이 이곳이 아니라 서경에 모이고 있었다.
“으드득.”
공저의 이 가는 소리가 조용한 막사에 울렸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공저도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중앙에서 아니, 권문세족이 내린 명령을 못들은 채 하고 자신의 부탁에 따라 백성을 위해, 잠시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남아준 자들이 아닌가. 그들이 이제는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도 피난 중인 백성들은 많은데 말이다.
“아아.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노에서 애원으로 바뀐 공저를 다른 사람들은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급보입니다!”
막사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장수들은 인상을 썼다. 분명 서둘러 서경으로 돌아오라는 재촉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루에 몇 번씩 보내는 것인지.”
한 장수의 투덜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지휘관의 말에 전령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빨리 보고하여라.”
“예. 강시들과 그들을 이끄는 부대가 갑작스럽게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전령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일으켰다. 공저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극성이었다.
“이유,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이…. 아직 그 이유는 찾지 못했습니다.”
“안된다. 안돼.”
공저와 그곳에 있던 장수들 모두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아직도 이곳에서 싸우는가. 바로 백성들의 피난이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국경에서 서경으로 이루어진 관도를 타고 여유롭지만 착실하게 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길과 가까운 마을을 모두 피난을 보내고 시간을 벌고 있었다. 즉 동쪽은 상대적으로 피난 간 마을이 적다는 얘기였다. 자신들의 희생이 헛된 순간이었다.
“공저 스님.”
혼란에 빠진 그를 같이 있던 승병 한 명이 불렀다. 덕분에 공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하고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저희는 강시를 막으러 가겠습니다. 다들 수고스럽지만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발이 빠른 병사들을 보내 동쪽에 있는 마을들도 피난을 유도해주십시오.”
그 말에 다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들은 명령을 늦지만 따를 것이다. 그리고 항마군과의 작별인사로 그 정돈 해줄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척 해준.”
“예.”
그때 지휘관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지휘관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자네는 공저 스님을 따라가게.”
“알겠습니다.”
그 말에 척 해준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공저였다.
“아니….”
지휘관은 공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좋은 곳에 써주게나. 그래도 이자는 자기 조상의 피를 강하게 물려받았는지 쓸모는 있을 거야.”
그야 당연했다. 홀로 3구의 강시와 싸우면서 한 구의 사지를 잘라버리던 아니, 찢어버리던 그의 무위를 잊을 수 없었다. 비록 여러 번의 전투로 몸 여기저기가 찌그러져 있는 강시였지만 공저 자신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공략해야만 했던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척 해준은 기회라 여기고 사지를 찢어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곳에 있는 부대에서 항마군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강시와 싸울 수 있는 존재였다.
“감사합니다.”
“아니네. 내가 더 감사하지.”
본디 백성을 지키는 것은 군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군은 백성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항마군에게 떠맡긴 것이다. 자신들의 위대한 책임을 떠넘겨버렸는데 명검 한 자루가 아깝겠는가. 지휘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빨리빨리 움직이세. 지금도 많이 늦었으니.”
“예.”
다들 대답과 함께 막사를 벗어났다.
공저도 그들을 따라 서둘러 막사를 벗어났다.
“공저 스님.”
그때 전령이 공저를 살며시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서경에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예. 스님께서 쫓던 강시를 발견했다는 소문입니다.”
그 말에 공저는 갈등했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강시들이 더 위험했다. 하지만 그 강시도 잠재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 일단 위치나 들어보자꾸나.”
일단 들어보고 나중에 그곳을 중심으로 찾아보면 될 거라고 공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그의 생각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서경에 있던 장수들에 의하면 서경의 동쪽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뭐?”
그 말에 공저 옆에 있던 승병들과 척 해준은 흠칫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강시들도 모두 동쪽으로 향했다 하지 않았느냐.”
“예. 맞습니다.”
“공저 스님. 혹시….”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두릅시다.”
그 말에 승병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승병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승병들이 모여있는 막사로 뛰어갔다.
“그럼 저도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예.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스님 같은 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척 해준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짐을 챙기기 위해 발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공저도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녀가 이곳에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암군의 옆에 붙어있는 자는 불만이 쌓이면서도 꼬박꼬박 암군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서경도 가지 못했다. 근데 벌써 세 구나 당했구나.”
그는 “언제나 당신 옆에 꼭 붙어있는 다섯 구의 강시도 전장으로 보냈으면 한 구도 잃지 않았을 겁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먼저 간 선배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애써 그 말을 삼켰다.
“그래도 그녀를 찾을 수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그래. 그녀라면 강시를 고칠 수 있겠지.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새로운 강시들을 양성할 수 있을 거야. 지금 당장!”
강시를 제조하는 방법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아마 고려를 공략하여도 꽤 오랜 기간 연구를 한 뒤에야 강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방법을 적어둔 서적과 직접 강시를 만들던 주술사들을 대부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있다면 달랐다. 그녀는 전대 회주 옆에서 강시 제조를 함께 한 일류 중의 일류 주술사기 때문이었다.
“역시 곳곳에 정찰대를 보낸 내 현명함이 새 시대를 당기는구나.”
“예. 모든 것은 암군의 현명함 덕분입니다.”
똑같은 말은 몇 번 듣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암군의 선견지명이 엿보였던 일이기 때문에 불만 없이 사탕발림할 수 있었다.
암군은 전대 회주가 허무하게 죽은 것을 보고 정보력의 중요함을 눈치챘는지 고려로 내려오기 전이나 내려오고 나서나 언제나 주위를 항상 살폈다. 덕분에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근데 왜 그녀는 고려에 있는 것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그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전부 원나라에 의해 목숨을 잃었거나 암군에게 직언을 하다 처참하게 죽었거나 둘 중 하나기 때문이었다.
“예끼. 못난 놈.”
암군은 그런 사정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를 욕하기만 했다. 그에 그도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암군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계속 그녀라 하심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살짝 아니, 엄청 두려움에 휩싸였다. 암군의 눈빛도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뒤에서도 숨을 참기라도 하는 것인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흘렀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죽을 땐 죽더라도 노력은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름이 아니라 ‘너’와 같이 부르면 별로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내가 회천회의 회주이며 고려의 왕이 아니, 세계의 왕이 될 것인데 감히?”
그 말에 그는 뒷골이 당겼지만 일단 암군을 진정시키는 게 중요했다.
“암군님. 고작 이름입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암군님의 세상을 빨리 당겨올 수 있습니다. 그녀를 데려오면 그녀에게 직접 강시를 맡겨야 합니다. 근데 그녀가 수작을 부리면 크게 당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녀의 쓸모가 다하기 전까진 그녀를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크음.”
암군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짜증 내는 기색을 보였지만 다행히 그에겐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의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에게서도 안도의 한숨이 들리는 거 같았다.
“그래. 현명한 왕은 아랫것들을 잘 살피기도 해야 하는 법이지.”
‘지랄.’
방금의 실수가 있었던지라 그는 다행히 그 말을 속으로만 내뱉을 수 있었다.
“그래.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그는 살며시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말했다.
“경애. 최 경애라 하옵니다.”
“그래. 경애라….”
밖에서 우리의 시간을 만들어준 헤아가 돌아온 것은 슬슬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을 때였다. 헤아가 돌아왔을 때 나는 경애의 계속된 권유로 등에 처음 만들어진 화살 구멍부터 공저 스님에게 당한 팔의 화상까지 모두 알 수 없는 약초로 만든 약을 그녀가 발라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헤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이불로 가 그것을 꾹꾹 눌러댔다.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괜찮니?”
“몰라요.”
틱틱 내뱉는 것이 말은 ‘몰라요.’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확실히 ‘기분이 나빠요.’였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헤아를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소용없을 텐데.”
조용한 방 속에 헤아는 갑작스럽게 말을 열었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헤아야!”
내 큰 소리에 헤아는 움찔거렸다.
찰싹.
그리고 경애는 내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아야야.”
그리고 자신이 더 아파했다. 당연하지만 말이다.
“조용히 좀 해요. 애 놀라겠네.”
내가 더 놀랐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놀란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나는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소용없는 일은 없어.”
경애는 계속 내 등에 약을 발라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헤아는 푹 꺼진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죄송할 거까진 없지요.”
그러면서 약을 다 발랐는지 내 몸에 붕대를 감아주기 시작했다.
“이 상처들은 꼭 낫을 테니 말이죠.”
경애의 말에는 묘한 확신이 들어있었다. 그 말에 나와 헤아는 멍하니 경애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절 만나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나요?”
나는 그 말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의 목표는 그녀에게 돌아간 다였지 돌아가서 무얼 어떻게 한다는 더 미래를 생각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도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쓸쓸해 보였다.
착.
경애는 이번에도 내 등을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는지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고, 그녀도 아파하지 않았다.
“자 다 끝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으며 옷을 입었다.
“옷이 여기저기 망가졌네요. 새로운 옷을 갖다 드릴까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괜찮소.”
“아저씨는 왜 그 옷만 입어요? 저는 만날 갈아입히면서.”
매번 옷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시 새 옷에 넣는 작업이 귀찮은지 헤아는 작게 투덜거렸다.
“이건 약속 같은 것이야.”
“약속이요?”
“그래.”
이 옷은 창식이와의 약속이다. 처음에는 받아온 것이지만 나중에 내가 그들에게 돌아갔을 때 만약 내 얼굴에 상처를 입어 고쳐지지 못한다면 그들이 나를 알아볼 방법은 이 곰가죽 옷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그들을 찾아가겠다는 나의 약속이었다.
“사정이 있는 옷 같네요.”
헤아는 뭔 소린지 몰라 갸웃거리고 경애는 나를 믿어주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왜?”
나는 오늘 아니, 이제 항상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다는 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요. 그것을 서둘러야 해요.”
“그럼 식사라도 함께….”
나에게 음식은 필요 없는 것이다.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하지만 먹을 순 있다. 씹고 삼키는 것 정도는 말이다. 그 뒤에 음식들이 안에서 썩어 몸에서 냄새를 풍기기 전에 잘 처리해야 하지만 경애와 함께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먼저 가볼게요.”
하고 그녀는 방을 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날 여자로도 안 본다는 거야?”
그 모습에 나는 당황스러웠고, 헤아는 살짝 분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