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큰 소란을 일으켰던 모양이구나.”
작은 방. 폭풍우는 고사라고 여우비에도 쓰러질 거 같은 위태로운 작은 오두막 안에 두 스님이 있었다. 한명은 아 오두막과 같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고승이었고, 다른 한명은 아직 약관(弱冠)이나 됐을법한 스님이었다.
“마(魔)를 물리치는 일이었습니다.”
젊은 스님은 고승의 질타에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들 또한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고승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젊은 스님은 그러든 말든 백성들에게 교리를 설파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들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즐기고, 생명을 먹어 치우는 것을 즐기는 존재입니다. 저희와 같이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어찌 교화시킨단 말입니까. 저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고통 없이 숨을 끊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누군가를 죽이므로 자신을 증명하거나 혹은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자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럼 그들 또한 기회를 주지 않고 모두 죽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부처가 존재합니다. 다만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존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아니라 모든 존재라 생각할 수 없겠느냐.”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수도 선해질 수 있지요. 하지만 마물이나 짐승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을 어찌 가르치고 불성을 일깨운단 말입니까. 애초에 생각이 없는 마물들을 법당에 가뒤두고 기회를 준다 하여도 그것은 마물에게도 저희에게도 괴로울 뿐입니다. 혹 실수라도 마물이 도망친다면 다른 백성들에게 큰 피해가 생길 겁니다. 한 마물의 불성을 위해 수많은 부처를 위험에 도사리게 할 수 없습니다.”
고승은 그 말을 눈을 감고 차분히 들었다. 젊은 스님은 고승이 그 말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마물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가 고통 없이 숨을 끊어 저승시왕 앞에서 최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고 선한, 불성을 얻을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이 모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력은 해 보았느냐.”
고승은 눈을 뜨지도 않고 젊은 스님에게 물었다.
“예.”
젊은 스님은 이번에도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하였다. 고승은 천천히 눈을 떠 젊은 스님을 바라보았다. 젊은 스님도지지 않겠다는 듯이 같이 눈을 마주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늙은 스님이었다.
“그래. 고생했다. 내가 방금 돌아온 너를 너무 오래 잡아두었구나. 가서 쉬어라.”
“예.”
그 말에 젊은 스님은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한 발짝 밖으로 발을 옮길 때 고승이 젊은 스님을 불렀다.
“공저(恐抵)야.”
그 불음에 공저는 고개를 돌려 늙은 스님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을(恐) 몰아내거라(抵).”
“… 그리 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반 안에 늙은 스님만을 남겨두고 문이 닫혔다.
-1. 고려로-
둥근
달이 하늘 정 중앙에 밝은 구멍을 뚫은 시간. 나는 달과 반대되는 숲속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헉… 헉….”
사실 지치지는 않는다. 아니, 지치고 안 지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숨조차 쉴 필요가 없는 ‘죽어버린’ 몸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죽고 난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내 기준으로 죽고 난 뒤 잠에서 깨듯 바로 눈을 뜬 나에게 있어서 숨을 쉬는 것과 조금 달렸다고 피곤해 하는 것은 잠들기 전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죽은 것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쏴라!”
아니면 내가 잠들기 전 까지 동료였고, 등을 맞댔던 고려군이 나를 사냥하듯이 몰아붙이는 모습에 진이 빠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퍽. 퍽. 퍽.
그리고 내가 죽기전 그렇게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화살에 생체기도 잘 생기지 않는 내 몸에 두려움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도망치는 동안에도 화살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날카로운 촉도 내 얇디얇은 살을 뚫지 못했다. 그냥 등을 몽둥이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물론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아팠다. 수십 발이나 내 몸에 맞았지만 몸에 꽂힌 것은 단 몇 발이었다. 그것이 더 마음을 쓰리게 만들었다. 완벽한 괴물도 되지 못했고, 인간도 아닌 내 몸뚱아리에 말이다.
“그만!”
뒤에서 추격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간 뒤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새도, 짐승도 없는 고요한 산 속에서 나는 큰 나무 밑에 앉았다. 서글프고… 또 서글펐다. 그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속에서 울컥거리며 무언가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물이 없는 오열 속에서 나는 차라리 그 관을 열지 않았다면, 그 동굴의 벽을 누르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혼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잡은 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벌써 달이 지고 해가 무거운 빛을 끌어올리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위에서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내가 혼란을 수습하고 정신 차린 뒤에 이것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이 소리 때문에 정신이 든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놈은 누구냐.”
늑대 무리처럼 내 주위를 빙빙 맴돌던 녀석들 중 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몇 번이나 치룬 듯한, 거적때기 같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사내였다. 그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의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먼저 나타난 사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탈영병이었다.
탈영병들은 나에게 창과 칼과 같은 날붙이들을 들이댔다. 나는 그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로웠다. 꼭 그것이 날이 상해있고, 몇몇 개는 녹이 슬어있어서가 아니었다. 잘만 쏘면 저 멀리에 있는 사람의 갑옷도 꿰뚫는 것이 고려의 화살이다. 근데 그런 화살도 수십 발 중 고작 몇 발만 내 몸에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근데 칼과 창은 명백히 찌르고 베기 위한 것들이다. 그런 것은 전혀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다만 창 뒤에서 날 노려보고 있는 도끼와 몽둥이들은 잘 모르겠다. 그러니….
턱.
나는 빠르게 창날을 하나 잡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니 다들 살짝 움츠려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모두 당황해 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힘을 주어 창을 뺐었다. 그 다음 창대를 가볍게 부러트렸다.
나름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쉽게 부러지지 않는 창대가 내 손에 가볍게 뚝 부러지니 그들의 혼란이 한층 커졌다. 하지만 아직이다. 저들에게 더 큰 공포를 주어야 한다. 감히 나에게 대들 수 없는 공포를 말이다.
나는 먼저 나왔던 대장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간간이 창과 칼을 찔러보지만 내 몸엔 아까의 화살처럼 생체기만 생길 뿐 내 몸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다들 미끄러지듯 내 몸을 타고 흘러가는 자신의 무기를 회수하기에 바빴다. 대장 녀석은 도망치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곳은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대장의 뒤를 막은 것이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일이 쉽게 흘러간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도망을 포기한 그는 허리춤에 있는 칼을 빼 나에게 겨누었다. 역시 대장이라 그런지 칼도 다른 것 보다 좋아 보이고 자세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나는 녀석의 칼을 맨손으로 잡았다. 대장은 그것을 보고 당황했지만 오히려 기회라 여겼는지 내 손에서 칼을 빼기위해 힘을 꽉 주었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었지만 나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그 힘을 견뎌냈다. 대장은 당황한 듯 작게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면서 칼을 맨손으로 휘었다.
내가 힘이 쌔진 것은 알았지만 철을 휜다는 것이 될지 안 될지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해내고 나니 약간의 뿌듯함이 들었다. 그리고 탈영병들의 표정을 보니 목적도 이룬거 같고 말이다. 나는 더 완벽한 기선제압을 위해 대장 녀석의 뒤를 막은 커다란 나무를 주먹으로 힘껏 쳤다.
쾅.
전쟁 속에서 몇 번 들어본 소리. 언뜻 화약(火藥)이라 들었던 것이 터지는 소리가 내 주먹에서 울려 퍼졌다. 탈영병들은 바로 눈앞에 번개라도 떨어진 듯 화들짝 놀랐다. 몇 명은 무기를 놓고 주저앉아 벌벌 떨기도 하였다.
내 손은 나무에 거의 손목까지 들어갔다. 다행히 나무가 컸기 때문에 이 정도에 쓰러지진 않았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쉽게 나무에서 주먹을 빼냈다. 내 손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그것을 보니 또 쓸쓸함이 밀려들어왔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대장 녀석이 사라져서 찾아보니 어느새 내 발 아래서 큰절하듯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녀석들도 냅다 나에게 큰절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두목님을 뵈옵니다!”
나는 그저 녀석들을 쫓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흐름이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든 간에 다른 녀석들은 알게 뭐냐는 듯이 대장을 따라 크게 외쳤다.
“새로운 두목님을 뵈옵니다!”
탈영병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장 아니, 두목 아니, 그것도 아니다. 전 두목이 벌떡 일어나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외쳤다. 그렇게 나는 산적두목이 되었다.
“야.”
“예.”
“이게 뭐야?” 솔직히 말하자면 싸움에서 기선제압을 한 뒤에 절을 받고 전 두목이 인사를 하고 나를 끌고 이곳으로 와 나를 여기에 앉힌 건 전부 기억한다. 다만 어안이 벙벙해서 지금에서야 물어볼 만큼 정신을 잡은 것뿐이었다. 물론 악의가 있었거나 내가 뭘 해야 한다는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이 조잡한 산채에 끌려오듯 와서 가장 상석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전 두목이 몇몇 사람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말할 때쯤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 수 있었다.
“헤헤. 제가 두목이었습니다만 저를 이기셨으니 저희를 이끌….”
“개소리!”
솔직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매우 심란했고, 기분이 나빴다. 그것을 풀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던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분노는 애꿎은 바닥에 향했다.
내가 발을 크게 구르니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산채 바닥이 작지만 쩌쩌적하고 금이 갔다. 그 모습에 다들 다시 내게 큰절을 하였다. 물론 나도 내 힘에 다시 놀라서 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의식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저, 저, 저, 그, 그게….”
나는 그저 내가 죽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지만 저들은 진짜 내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터였다. 때문에 전 두목은 두려움에 휩싸인 듯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나는 분노를 조금씩 삭이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방금 갑자기 욱해서 그랬지만 아무도 헤칠 생각은 없다. 그러니 떨지 말고 말해.”
“아, 예.”
아직 두려움은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것 같지만 그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래도 군에서 십인장으로 몇 년을 지내면서 사람을 다뤄봤다는 점에 감사하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희는 고려의 탈영병들입니다. 저는 정찰대였는데 크게 습격을 받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본진에서도 크게 전투가 있었던 터라 몸을 숨기고 시간이 지나 안전해진 후에 본진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탈영병으로 낙인찍힌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거기다 탈영병은 즉결처분이지 않습니까. 우연찮게 먼저 들어간 놈이 있어 그 모습을 보고 냅다 도망쳤지요. 그리고 저와 비슷한 사연의 사람들을 모아 산채 하나를 지어 산적노릇이나 하고 있지요.”
“그곳이 이곳이고.”
“예. 물론 지금 원나라와 홍건적 때문에 저희도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긴 한데 목숨은 붙어 있으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하나 둘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머리에 든 것이 없어 알아듣지 못했지만 최대한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인지 그도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연기속에 나는 쓴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목숨은 붙어 있으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
그럼 그에게 한번 묻고 싶었다. 그러면 죽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말이다.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듯 이런 저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녀석이라면 충분히 대답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끝내 입이 열리지 않았다. 굳이 남에게 내가 죽은 인간이라고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고려군의 그것과 같을 거 같아 두려워졌다. 그러면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계속 물었다. 죽은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때 때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고, 산채 안이 한순간 고요에 휩싸인 듯 한 착각이 들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고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나는 다급해졌다.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죽기 직전이라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을 텐데 말이다. 아내. 아내를 보러 가야한다. 그것이 나의, 죽은 자의 할 일이 되었다.
“물론 있긴 합니다만…”
“그럼 날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나?”
“안됩니다!”
그는 무지 다급해보였다.
“왜?”
“저… 그게….”
나는 살짝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다시 찍을까?”
“그냥…. 저희와 있으면 안 됩니까?”
그 모습이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다.
“무슨 일 때문이지?”
역시 녀석은 날 그냥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말이 두목인 자신을 이겨서 데려온 것이지 누가 졌다고 당신이 두목 하라면서 저렇게 바짝 엎드리겠는가. 저들이 내게 필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창을 부러트리고 칼을 휘고, 나무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나의 무력일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칫밥을 얼마나 얻어먹어야 하는데 고작 이정도로 날 속이려들어?
쾅!
나는 괘씸한 죄와 이유를 듣겠다는 무언의 시위로 아까보다 약하지만 다시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정보에 의하면 곧 홍건적이 다시 국경을 침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저흰 정말 살아남기 힘듭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국경을 침범한다? 그럼 내가 목숨을 잃었던 그 때 홍건적이 고려를 포기했었단 말인가?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한다고?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저번 침공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지?”
“약 두해 지났습니다.”
그 말에 전 두목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해라…. 두해.”
“두목. 이번엔 저번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만 해도 10만입니다. 10만!”
10만이 어느 정도의 병력인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홍건적과 마주쳐봐서, 그리고 죽어봐서 안다. 누누이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그들은 이미 도적 떼가 아니다. 어떤 녀석이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여태까지 받아먹은 녹봉을 빼앗고 흠신 두들겨 패서 내쫓아야 한다. 배울 만큼 배운 녀석이 도적하고 군대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다.
“왜 다시 고려를 공격하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그들의 목표는 원나라다. 고려는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근데 자꾸 고려를 노리다니. 왜?
“아마, 강시 때문일 겁니다.”
“강시?”
처음들 어보는 이름이다. 강시… 강시라… 어떤 느낌인지도 감도 안 잡히는 이름이었다. 강시 때문에 홍건적이 온다니 병기나 첩자의 이름이라도 되나?
“예. 저도 이번에 원나라의 국경부분에서 터진 사건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본래 강시란 타지(他地)에서 죽은 자들을 고향으로 옮기는 주술입니다. 사술처럼 보이지만 시작은 도가(道家)의 도술(道術)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 망할 회천회라는 조직이 강시를 전투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를 한겁니다.”
“어떻게 시체를 고향으로 옮기는 주술이 전투용이 되는 거지?”
머릿속에 든 것이 없어서 그런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시술의 요는 시체가 도사의 뜻에 따라 스스로 타지에서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시체가 스스로 간다는 것인가.”
“예.”
나는 그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계속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단지 시체이므로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 회천회는 그 점을 이용하여 강시를 창, 칼이 통하지 않게 단단하게 만들고 여러 주술을 이용해 주술사의 뜻에 따라 사람을 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치지 않고 단단한 시체…. 그건 바로 나 아닌가. 내가 그 강시라는 것인가.
“그런 회천회는 강시를 이용해 홍건적을 도와 원나라를 몰아낼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원나라에게 걸려 사라졌긴 하지만 말이죠. 물론 이 정보들은 저희가 전문 정보원이 아니고, 원나라에서 고의로 퍼트린 정보가 있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획득한 바로는 이렇습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도술, 주술이 적혀있는 책의 사본을 입수했지요!”
자신들과 함께 있어달라는 듯 산채의 정보력을 한껏 자랑했지만 그의 말은 오히려 나를 심란하게만 만들 뿐이었다. 나는 이미 정신이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몇 번 있는지라 빠르게 정신을 회복하고 입을 열었다.
“그 강시란 놈하고 홍건적이 고려로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회천회는 홍건적을 도와 원나라를 몰아낼 생각이었습니다. 즉, 둘은 동맹관계였다는 것이죠. 근데 강시가 갑자기 고려에 나타났습니다.
그 말에 난 뜨끔했다. 아무리 말을 들어봐도 내가 강시인데 말이다. 내가 홍건적을 불러 왔다는 것인가?
“혹시 산성 근처에 가보셨습니까? 가면 땡중들도 잔뜩 있잖습니까. 그게 다 강시가 고려로 넘어가서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이미 고려로 넘어갔다고? 난 여기 있는데?
홍건적이 다시 몰려오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안도감 생겼다.
“근데 홍건적은 왜 오는 거야. 회천회는 사라졌다며. 저 강시가 회천회하고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잖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마 홍건적은 회천회가 사라진 것을 믿지 않는 거 같습니다.”
“믿지 않는다?”
“예. 그저 들켜서 꼬리자르기로 일부분만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리고 고려로 넘어온 강시는 먼저 고려를 치자는 신호로 받아들인 거 같습니다.”
그럼 정말 많은 병력이 올 것이다. 아까 전 두목이 말했던…. 시… 십만? 병력이 정말로 내려올지도 모른다. 물론 저 숫자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니 내가 죽은 그 전쟁의 크기보다 더 큰 병력인거 같긴 하다.
근데 강시는 창, 칼이 들지 않는 단단한 피부를 가진 시체라.
“내가 강시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나?”
“예?”
“나도 창, 칼이 들지 않는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원래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안다. 하면 들킬 테니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잘 모르겠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긴 하니까 말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도 회천회의 정보를 듣고 강시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도술서나 주술서를 끌어 모은 것도 그 일환중 하나지요. 근데 어느 문서나 소문에서도 강시가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사지를 구부릴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두목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굳건하게 믿었다. 물론 틀렸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니고 강시라고 밝히면서 그의 지식을 무너트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누군가 나를 사람으로 봐준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시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계속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일 내가 지금 눈물을 흘렸다면 저 사내는 똑똑하니까 내가 강시인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들은 날 어떻게 바라볼까. 내가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덕분에 그들을 속일 수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어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