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 언제나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요 근래 홍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아래에선 왜가 소란을 일으킨 데다가 반원파와 친원파의 경쟁으로 궁내부가 소란스럽고 흉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특히 지금은 더 하였다. 마치 홍건적에게 한 번 더 서경(西京)을 빼앗길 위기에게 처한 것처럼 내 전체가 떠들썩했다. 대신들의 발걸음은 빨랐고, 병부(兵部)의 인물들은 가만히 서 있지를 못했다. 모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폐하! 서둘러 병사들을 파견하셔야 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서로 같은 곳엔 있지 못하지만 나는 가기 싫으니 네가 가라면서 서로 으르렁 거리는 웃지 못 할 창극을 보여주던 권문세족(權門勢族)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가 같은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면서 공민왕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한쪽이 의견을 내면 다른 한쪽이 어떤 개소리를 내더라도 막는 게 보통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신진사대부는 몰라도 원나라만 믿고 자신들 하고 싶은 데로만 하는 저 돼지들도 신진사대부의 말에 공감한다는 것이 현재 고려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민왕도, 권문세족도, 신진사대부도 모두 이 상황에 큰 위기를 느낀 것이 같다. 하지만 다 같이 문제만 공유했을 뿐 딱히 방도가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였다. 국경에선 방법을 모색해달라고 하면서 슬슬 내려올 기미가 보이는 홍건적을 견제하면서 통통 뛰어다니는 창도, 칼도 통하지 않는 괴물, 강시라고 불리는 존재를 상대할 방도를 마련해달라고 아우성이고, 아래에선 그래도 잘 버텨주고는 있지만 기마병에 갑옷까지 갖춰 입은 군대 규모의 왜구들이 들끓고 있었다. 원나라는 한차례 홍건적을 크게 물리치고 다시 고려를 자신들 손에 쥐려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생각만 하고 있어도 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공민왕은 한숨을 쉬면서 조용히 해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에 맞춰 대신들도 조용해졌다. 공민왕은 그 조용함 속에서 울렁거림을 달래고 다시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방법은 뭐가 있느냐.”
“병사들을….”
그놈의 병사 병사 병사! 공민왕은 이번엔 울렁거림이 아니라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저들에게 몇 번이나 당해봐서 그는 알았다. 여기서 분노를 하면 안 된다.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은 이미 한수 지고 들어간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사병.”
공민왕의 그 한마디에 권문세족 측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감히 왕이 앞에 있는데 원의 권세만 믿고 이곳을 시장바닥으로 만든다고 공민왕은 생각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내놓을 수 있느냐?”
“사병이라뇨. 어떻게 폐하를 두고 저희 같은 일개 신하가 병사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가뜩이나 신돈이라는 자가 별의별 이유를 대면서 노예까지 풀어주는 마당에 말입니다.”
그 말에 공민왕의 이마에 내천(川)자가 깊게 파였다. 신돈이 풀어주는 노예. 그 노예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줘서 병사로 키운 자들이 누구이며. 감히 고려의 왕인 내가 직접 등용한 신돈을 ‘자’라 칭하는 저자는 도대체 어느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근본적 물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말로 신돈이 설치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에 큰 피해를 입은 자들은 없을 것이다. 아니, 풀어줬어도 왕인 자신의 권세를 뛰어넘는 그들은 지금도 수많은 사병을 가지고 있을 거라 공민왕은 생각했다. 아니, 그것뿐이면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군부에도 그들의 손길이 끼치지 않는 곳은 찾기 힘들 지경일 테니 말이다.
공민왕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의 말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왕에게 말하는 말투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공민왕은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내심 신진사대부가 이기길 원했지만, 그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큰 사달이 일어나기 전에 중재에 나섰다.
“그만. 서로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좋지만 이곳이 장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둘의 대답은 같았지만 신진사대부는 공손하게, 권문세족은 불만을 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민왕은 불만을 품은 권문세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시 본론을 꺼내들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지금 이 상황부터 타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분위기가 축 처진 느낌이 들었다. 신진사대부는 이미 강시라는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어 말을 아끼고 있으며, 권문세족은 이미 내가 그들과 적이라는 것을 알고, 사병으로 한차례 대였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폐하.”
영겁과 같던 잠시의 침묵이 끝나고 누군가 공민왕을 불렀다. 그자는 권문세족 측 인원이었다. 그 순간 공민왕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느낌만으로 그의 말을 제지할 힘은 그에게 없었다.
“말해보아라.”
“신돈의 말이 나와서 그런데 그를 불러 대책을 내놀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돈을?”
그 말에 신진사대부나 권문세족 할 것 없이 분위기가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예. 옛 설화에도 보면 많은 승려가 퇴마행을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강시라 하니 승려인 신돈을 부르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의 반응은 확연히 갈라졌다.
권문세족은 신돈이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 무능하다 내쫓으면 될 것이고, 실패하거나 피해가 커지면 그것을 빌미로 그를 내 쫓으면 된다. 거기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고려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권문세족 아닌가. 성공할 수 있는 계획이라도 충분히 방해하면 됐다.
반면 신진사대부는 고개를 절래 저었다. 누군가 작은 말로 그들의 심경을 말했다.
“쯧쯧.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하였거늘….”
처음부터 강시란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그들은 승려가 불(佛)의 힘으로 강시라는 마물을 퇴마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권문세족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공민왕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그에게 기회를 주어 큰 공을 세우게 하심이 어떠하십니까.”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말투 속에 비웃음이 들어있는 것을 공민왕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민왕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밖에선 신돈을 데려오기 위해 서두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공민왕은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나라가 망해가도 욕심은 버리지 않는구나.’
라면서 속으로 욕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경들 마음대로 하게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돈은 서둘러 이곳에 도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권문세족의 비웃음을 띤 얼굴과 신진사대부의 불쾌함을 느끼고 대충 무언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신을 부르셨다고 하여 서둘러 왔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면서도 신돈은 극진히 공민왕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
“…”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한 침묵이 이 공간을 지배했다. 신진사대부는 사상적으로 그와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불러온 권문세족은 아마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을 원할 것이다. 내가 그에게 명령하고 그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그로인해 쫓겨나거나, 압박감에 실수를 범하고 내 손에 의해 죽는…. 그런 이야기를 말이다.
계속된 침묵 속에 공민왕의 입이 어쩔 수 없이 열렸다.
“신돈. 자네는 요즘 고려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신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예. 위에선 강시와 홍건적이, 아래에선 왜구들이, 그리고 조금 더 깊숙한 곳에서 원이 고려를 위협하고 있지요.”
신돈은 그 말을 하면서 권문세족을 바라보았다. 권문세족들도 지지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몇몇은 신돈의 시선을 가소롭게 느꼈는지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래.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하는 것은 그 중 강시라네. 행동을 예측할 수 없고, 위협적이지. 그리고 인간의 공격이 아닌 마물의 공격인지라 민심도 크게 흔들리고 있어. 강시의 침입으로 국경에도 문제가 생겼고 말일세.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강시를 제거하고 싶어서 자네를 불렀네.”
그리고 공민왕은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누군가 옛 설화를 보면 승려가 마물을 퇴마한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하더군.”
하면서 공민왕은 그 말을 꺼냈던 권문세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승려인 자네에게 그 강시를 처리할 계획이 있나 해서 불러보았네.”
신돈은 공민왕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공민왕과 다른 대신들은 그 침묵을 기꺼이 기다려주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신돈은 입을 열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스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분께 말씀드려서 몇몇 스님들과 수원승도(隨院僧徒)들을 모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신진사대부들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고, 권문세족은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공민왕 본인도 당황스러워서 그 권문세족들의 그런 행위를 탓할 겨를도 없었다.
“정말 그 정도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공민왕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지만 신돈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예. 가능합니다. 과거 여진족을 물리칠 때 만든 별무반(別武班)에 괜히 항마군(降魔軍)이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도 퇴마행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항마군을 다시 부활시켜 강시를 막겠습니다.”
공민왕은 고민에 빠졌다. 항마군이 존재했음은 알고 있다. 윤관이 기병 위주의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부대를 개편하였고,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해 별무반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존재에 관해 불법(佛法)의 힘으로 여진족을 몰아내겠다는 의지만 보이지 그들의 위상이 크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공민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여진족과 싸우면서 공식적인 전적도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도 많은 공을 올렸습니다. 저희의 적은 양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돈은 공민왕의 고민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강조했다.
신돈의 말에 신진사대부들은 혀를 끌끌 찼고, 공민왕은 고민에 빠졌다. 저 계획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해야 하는지 감이 서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권문세족은 그 잠시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했다.
“폐하. 그의 말대로 해보시지요. 지금은 무엇이라도 해 봐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아니, 권문세족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다른 대비책을 정하더라도 지금에서는 이것이 최선일 듯하옵니다.”
신진사대부 또한 공민왕 아니, 신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었다. 그래도 공민왕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폐하.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보통은 옳은 말이라 생각 할 테지만 저 말이 나온 자가 권문세족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공민왕은 개소리라고 말하려는 것을 꾹 참았다. 다들 보채고 있고, 계획을 발의한 신돈 또한 받아 들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공민왕이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일이 시작하면 뒤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신돈을 살리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공민왕은 신돈을 다시 바라보았다. 신돈은 그런 공민왕의 시선을 느끼고 작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공민왕은 한숨을 크게 쉬고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왕의 위엄을 보이듯 웅장하게 외치듯 말하였다.
“신돈은 지금부터 항마군을 부활시켜 고려를 위협하는 강시를 무찌르라! 그리고 대신들 또한 신돈을 적극적으로 도와 이 상황을 빠르게 타개할 수 있도록 도와라!”
그 말에 모든 대신들이 공민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명(命). 받들겠나이다.”
“명. 받들겠나이다.”
진심으로 대답하면 한 명과 속과 겉이 다른 대신들의 말이 궁을 울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장(方丈)님.”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문을 연 고승은 그곳에 있는 익숙한 얼굴에 그를 크게 반겼다.
“이거 사부(師傅)아니신가. 허허. 어서 안으로 들게.”
그러면서 방장이라 불린 고승은 직접차를 따를 준비를 하였다.
“죄송합니다. 방장님. 오늘은 급한 일 때문에 온 것이라 농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방장은 손님의 자리에 차를 한잔 놓으면서 말했다.
“요즘 것들은 여유를 몰라 편조(遍照) 네 놈이나. 공저 저놈이나. 쯧쯧.”
“안 그래도 그 재미없는 공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말에 방장은 인상을 한번 찡그렸다.
“퇴마행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그 말에 신돈은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갑작스레 입안에 침까지 다 말라버린지라 힘겹게 차를 한입 마셨지만, 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신돈은 방장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방장이라는 직책에 오른 분의 모습인가.’
딱히 어딘가에 우위를 점하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편조와 고승의 대화에서 사부와 방장의 대화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돈이 느끼는 부담감은 훨씬 강해졌다.
“안 되네.”
방장의 단호한 거절에 신돈은 힘겹게 마른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신돈은 방장의 도움이 절실했다. 단지 한 커다란 절의 방장이 아니라 그는 고려 전역에 영향력이 있는 존경받는 스님이었다. 거기다 공저의 스승이기도 했다.
공저는 신돈이 아는 바로 현재 가장 활발하게 퇴마행을 하고 있는 승려였다. 이번 항마군을 이끌 사람으로 알맞은 인재였다.
“그 겁쟁이는 퇴마행을 할 자질이 안 되네. 대신 내가 다른 인물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네.”
그 말을 신돈은 믿을 수 없었다.
“겁쟁이라뇨. 지금 공저보다 뛰어나고 많은 퇴마행을 한 인물이 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지금 북에서 강시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서둘러서….”
“그러니 서둘러서 다른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하지 않느냐. 나도 아직 귀는 먹지 않아 위에서 들리는 고통이 들린다. 그러니 자네를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네.”
신돈은 방장의 말에 침음을 흘렸다. 도와주는 건 좋지만 구지 뛰어난 공저를 빼야만 하는 이유를 신돈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공저를 막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에 신돈은 방장이 잠시 고승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승은 차로 입을 한번 축이고 열었다.
“공저는 위험하네. 그는 아직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 그러니 주위까지 모두 위험하게 만들 수 있네. 그게 이번일 수도 있고, 다음번일 수도 있고,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네. 하지만 나는 그가 더욱 성장하기 전까지 퇴마행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네. 공저는 아직 기다려야 해.”
그 말에 신돈은 더 이상 공저를 영입하는 것을 포기했다.
“크흠….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먼저 들어온 놈은 강하긴 하나 이성이 없어 저희가 가담하면 금방 잡겠지만 다른 한 놈은 이성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그 놈은 뛰어….”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방장이 신돈의 말을 끊었다.
“방금 뭐라 했는가.”
신돈은 방장이 이렇게 타인의 말을 끊는 모습을 처음 봐서 살짝 놀란 상태로 그의 질문에 답하였다.
“예. 한 놈은 이성이 없지만 한 놈은 이성이 있어….”
“공저를 내어주마.”
신돈은 손을 뒤집듯 자신의 결정을 바꾼 방장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보다 뛰어난 인재인 공저를 영입하는데 성공하고,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스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성공적인 거래에 기분이 날듯이 좋았다.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아까 말했다시피 공저는 자네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그제야 신돈은 자신의 마음을 추수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승냥이 같은 정치인들이 아닌 맑은 느낌의 고승과 함께 있으니 쉽게 흐트러졌나보다 하면서 신돈은 조금 자신의 상황을 비관했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부신 겁니까.”
방금 전 까지 공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던 모습과 다르게 이성이 있다는 강시의 얘기를 듣고 바로 공저를 내주었다. 신돈은 여기서 고승이 무엇을 봤는지 알고 싶었다.
“그저, 그저 이 늙은이의 바람이 들어있을 뿐이라네.”
하지만 고승은 하나하나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신돈은 그 말에 그저 감사하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수행이 얕다 방장의 큰 뜻을 알지 못할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지간히 바쁜가 보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금 바쁩니다.”
“그래. 그래도 여유는 잃지 말고 살아가거라.”
“알겠습니다.”
신돈은 그 말을 일단은 대충 흘려들은 뒤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나가진 않으마. 조심히 가거라.”
신돈은 그 말에 합장하며 예를 취하고 낡은 문을 닫았다.
“정말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래.”
“꼭이요.”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들이 그렇게 나를 원하는 이유를 안다. 사방에서 자신을 죽이려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휩쓰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집단들이 모이는 곳에 존재하는데 이곳엔 특출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두더지처럼 몸을 잠시 피할 수 있는 땅굴을 몇 개 파놨을 뿐이다. 그것으로 수만은 인간들이 부딪히는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들도 그런 점 때문에 날 이렇게 붙잡는 것이다. 창, 칼이 잘 들지 않는 단단한 몸에 나무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나를 말이다.
“알겠다니까.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저희도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알았다니까.”
내가 슬슬 짜증내는 기미를 보이자 그제야 전 두목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잡고 있던 옷깃마저 놓아주었다. 전 두목은 그런 나를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가 입고 있는 옷일 수도 있다.
이 옷은 녀석들이 잡은 곰으로 만든 옷이라 했다. 하지만 내가 녀석들의 창고를 뒤지다 내 몸 전체를 다 가릴만한 것이 그 옷이 나와서 나의 권한으로 가지고 나왔다. 딱히 탐이 났던 건 아니고 날씨도 겨울이 다가오니까 슬슬 입기에도 알맞지 않았나 해서 의심받지 않을만한 복장을 고른 것뿐이었다.
“야, 근데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근데 부를 때마다 야라뇨. 두목이 전부 야, 야 하니까 누가 누군지 모르잖… 혹시 저희 이름도 모릅니까.”
그 말에 나는 살짝 움찔했지만 나름 당당했다.
“아무도 말해준적 없지 않아?”
“끄응.”
그런 그랬다. 내가 아무한테도 묻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말이야.
“너희도 내 이름 모를거 아니야.”
“그, 그런...”
두목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명인데 누구 두목, 누구 두목 하면서 이름붙혀서 부르는 것도 웃겼다. 때문인지 아무도 나에게 이름을 따로 묻진 않았다. 내가 다가오지마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 것도 있지만 말이다.
“이참에 알아 두십시오. 제 이름은 김 창식입니다.”
“그래.”
나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을 넘겼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볼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도 없고 말이다.
“그나저나 두목님의 존함(尊銜)은 어찌됩니까.”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릴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저게 뭘 뜯하는 단언지는 몰라도 딱 들어봐도 이름을 물어보는 아주 고급진 단어 아닌가. 나는 솔직히 김 창식이라는 이름보다 존함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남을거 같았다.
“내 존함은….”
“예! 존함은…!”
내가 한 박자 쉰 것은 기대감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존함이라는 말을 올리고도 아차 싶었다. 왜냐하면….
“돌쇠.”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돌쇠 두목….”
내 뒤에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나는 속도를 더 높였다. 몸이 강시인 게 이처럼 다행인 점은 처음인 거 같았다. 아니었으면 밤이고 뭐고 작은 태양처럼 온몸이 붉게 변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