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위치한 뷰티타운.
건물의 1층에는 쥬얼리샵. 2층에는 뷰티살롱. 3층은 스파와 커피숍.
4층과 5층은 소소한 사무실들이 들어와 있다.
마치 해외의 어느 도시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건물.
168cm의 키에 볼륨감 있고 탄탄한 몸매. 구리 빛 피부.
이국적인 마스크에 시크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
수란이 살롱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타이트한 블랙 원피스의 실루엣에서 그녀의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남녀불문. 그 누구라도 그녀의 실루엣에 눈길이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또각또각”
꼿꼿한 자세와 걸음걸이. 그리고 하이힐.
스텝인 혜지는 살롱문을 열고 들어서는 수란에게 냉큼 달려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혜지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수란은 잠시 혜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혜지를 길 위에 지나가는 행인 1쯤으로 여기는 수란.
그러나 혜지는 그런 취급에 익숙하였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자신이 을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쳇! 인성 *가지!’
혜지는 속으로 가볍게 욕이라도 해주니, 덜 억울하였다.
‘저 계집애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인성은 밥맛인데, 외모 하나는 ......’
혜지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수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57cm 의 단신에 그저 그런 평범한 외모를 가진 혜지.
혜지는 수란을 바라볼수록 자신이 너무 초라해보였다.
살롱의 실장, 민채가 수란의 곁으로 다가가
“차 한 잔 드릴까요?”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물었다.
“아니! 됐고!”
“나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 스타일 좀 바꿔봐.”
수란은 민채에게 단호한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수란은 흑갈색의 윤기 나는 긴 웨이브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그녀에게 선뜻 어떤 스타일을 추천할지 막막한 민채.
사실 수란의 행동으로 보아 자칫 잘못 추천을 했다가는 날벼락 맞을 것만 같았다.
“나 머리 자를까? 단발머리 하면 어울릴 것 같아?”
수란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물었다.
“워낙 예쁘시니까 뭐든 다 소화하실 것 같은데요?”
민채는 고객의 비유를 잘 맞추는 프로였다.
“뭐 그런 식상한 표현 말고 다른 표현 없어?”
수란은 민채를 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예? 다른 표현...... 음......”
순간 당황한 민채는 그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아 손에 땀이 흥건하였다.
능수능란하고 순발력 좋은 민채도 하늘을 찌르는 시 건방 앞에서는 절절매었다.
“됐고! 그냥 머리나 잘라!”
수란은 더 이상의 의견은 필요 없다는 듯 오른 손을 들어 까딱거리며 말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 본 혜지는 마치 고구마를 먹은 듯 속이 꽉 막혀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이네? 인생 저 혼자 사는 *! 왕 재수! “
혜지는 이런 말들이 목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
“고객님. 여기 앉으세요.”
혜지의 친구이자 역시 스텝인 혜란이 방긋 웃으며 수란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까만 천이 수란의 목덜미를 둘러 에워쌌다.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물방물의 포말에 수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저만치 한 남자가 걸어온다.
185cm 정도의 키에 잔잔한 근육, 뚜렷한 이목구비.
바로 뷰티살롱의 원장 도경민이다.
“안녕하세요?”
스위트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수란은 슬며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수란의 젖은 머리카락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리는 그의 팔. 잔잔한 근육.
수란의 심장은 ‘두근두근’ 작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 은은한 섹시함......’
그러나 수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래봬도 DK 그룹의 재벌 2세인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부류의 남자라고 생각했다.
수란은 다시 한 번 자세를 고쳐 앉으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린 시절부터 대 재벌가의 가정에서 수없이 들었던 말들 중 하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마라. 감정보다 이성에 충실해라.’
수란은 대재벌가의 맞춤형 인간으로 자라난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고객님. 단발 컷 하실 거죠?”
“네......”
경민의 꿀 성대가 수란을 순식간에 요조숙녀로 만들었다.
“머릿결도 좋고, 지금 스타일도 잘 어울리시는데.”
경민은 수란의 풍성한 모발을 쓸어내리며 말하였다.
“그냥......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요.”
살롱에 등장한 후 수란의 입에서 처음으로 흘러나오는 존댓말.
그 모습을 지켜 본 민채와 혜지는 어이없다는 듯 썩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사이코패스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경민의 섬세한 가위질이 시작되었고, 수란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수란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외모.
수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가장 근거리에서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남자.
경민을 힐끗 쳐다보았다.
외적으로는 자신과 나란히 서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남자.
다만 그의 직업이 뷰티살롱의 원장이라는 게 못내 아쉬운 수란.
수란은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오가는 잡다한 생각에 ‘피식’ 하고 웃었다.
수란의 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잘려나갔고 파마 끼 하나 없는 단발머리가 완성되었다.
“어떠세요?”
경민은 거울에 비춰진 수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수란은 좌로 우로 고개를 돌리며 전혀 다른 스타일이 된 머리를 살폈다.
그리고 혜지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샴푸실로 향했다.
“고객님. 샴푸 시작하겠습니다.”
혜지는 최선을 다해 상냥한 목소리를 이끌어 냈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란의 얼굴에서 귀티가 흘렀다.
‘감히 나 따위는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몸에 지니고 태어난 분위기......’
혜지는 자신도 모르게 수란의 외모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있었다.
하얀 거품 속으로 혜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박박 긁어 씻어내 듯 거품을 헹구어 냈다.
혜지는 수란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 마사지 하였다.
수란은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객님. 샴푸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혜지는 타올로 수란의 머리를 감싸며 상냥하게 말을 하였다.
“야! 이게 뭐야? 옷이 젖었잖아!”
수란이 원피스의 목 부분을 털어내며 버럭 화를 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당황한 혜지는 대역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였다.
“이게 샴푸 하나 제대로 못해? 이깟 샴푸 하나 제대로 못해서 무슨 미용을 한다고. 쳇!”
“이런 고급 살롱에서 일 할 자격이 없어!”
수란의 입에서 막말이 터져 나왔다.
수란의 말이 혜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혜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어린 시절 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건축현장에서 뒷모도 일을 하시던 아버지.
어느 추운 겨울 날,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다가 사고를 당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혜지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지방의 동네 미용실에 취직을 했다가 야간 대 미용학과를 졸업하였다.
동네 미용실 강원장의 권유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혜지.
어려운 환경에 처한 혜지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강원장의 충고.
미용도 주먹구구식으로가 아닌 체계적으로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강원장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혜지.
혜지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너무 속상하고 분했다.
저만치 서둘러 달려오는 도경민.
“죄송합니다. 저희 스텝이 실수를 하였군요.”
허리를 숙여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스위트한 중저음의 목소리. 예의바른 태도.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
그런 남자가 사과를 하니 수란은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 됐어요! 차가 우니까 얼른 머리나 말려주세요!”
“또각또각”
수란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거울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휴~~”
민채와 혜란은 이쯤에서 일이 마무리가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저런 진상손님들 때문에 분위기 싸해지는 해프닝.
“쳇! 눈은 높아가지고. 원장님 때문에 수그러들은 거겠지.”
민채는 수란을 째려보며 자신의 직감이 옳다고 판단했다.
살롱에서 7년째 일을 하고 있는 실장 오민채.
원장 도경민을 짝사랑 하고 있다.
경민과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소소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민채는 경민의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자, 다 끝났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혜란이 드라이기를 정리하고 수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수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살롱 안에 등장했을 때와는 약간 다른 분위기.
파마 끼 없는 단발 스타일.
더 도도하고 시크해보이면서 묘한 매력이 흘렀다.
하긴 어떤 스타일이든 소화해 낼 외모를 타고 났으니까.
수란은 반짝반짝 빛나는 클러치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아무 말 없이 내밀었다.
민채는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카운터로 향하였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은 눈치 빠르게 갑의 속마음을 읽어내고 행동을 한다.
수란은 쌩하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살롱을 빠져나갔다.
***
뷰티타운의 옥상.
수란이 돌아가고 혜지는 옥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굳이 한 계단 한 계단씩 걸어 올라갔다.
혜지는
“네 까짓 게 뭘 알아? 내가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얼마나 절박하게 살아왔는데. 네가 뭔데 내 꿈에 대해 평가를 하는 거냐고!”
아까 속으로 묻어 두었던 말들을 꺼내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혜지의 우울한 마음과 달리 쾌청한 파란 하늘.
그 순간 혜지의 어깨를 살며시 터치하는 손.
경민의 손은 혜지의 어깨를 세 번 ‘토닥토닥’ 거리며
“혜지야. 많이 속상하지?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곳이다. 난 더한 일도 숱하게 겪었어.”
“힘들 때마다 내가 정상에 오르는 꿈을 상상했지. 그러면 내가 억울한 일도 덜 억울한 일이 되고, 내가 아픈 일도 덜 아픈 일이 되었으니까.”
경민은 평소보다 더 스위트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혜지는 경민이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네. 원장님. 죄송해요. 이런 꼴 보여서.”
혜지는 얼룩 진 눈가를 닦으며 살짝 미소를 보였다.
눈가에 번진 마스카라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
경민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혜지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자신의 몸과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서 있는 경민.
단추 하나 풀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다부진 몸.
혜지는 경민에게 났던 익숙한 향수의 향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은은한 향기가 묘하게 혜지의 몸을 휘어 감았다.
‘나혜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원장님을 상대로......’
혜지는 자신의 생각을 들키기 싫었다.
“원장님. 고맙습니다.”
혜지는 이렇게 인사를 해야 경민에 대한 선을 정확히 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히 나 따위가 넘지 말아야 할 선.
꿈을 이루기 전까지는 밟지 말아야 할 선.
경민은 혜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지었다. 세상 달달한 미소를.
따뜻한 햇살이 경민의 미소 띤 얼굴에 조명을 비췄다.
그의 얼굴이 더 눈부신 설레임으로 혜지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쿵쾅쿵쾅’
혜지의 작은 심장에 웅장한 클래식이 큰 파도를 친다.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더 꽁꽁 싸매야겠다고 다짐하는 혜지.
아니,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혜지야. 오늘 나랑 술 한 잔 어때?”
경민의 뜻밖의 물음에 혜지는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주가 여주에게 하는 멘트?
‘아~ 어쩌지? 좋다고 해야 하나. 싫다고 거절을 해야 하나.’
‘단 둘이 술을 마시자고?’
혜지의 머릿속에 경민에 대한 감정들과 현실에 대한 이성들이 뒤엉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