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안의 밤
또다시 그곳이다. 은우는 다시 그렇게 아이가 되어 있었다. 기억도 없을 때의 모습이다. 자신의 흔적이, 자신의 아픔이 온몸을 훑고 지나갈 때이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을 감고 수면이라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어김없이 이곳에 당도한다.
바다일까? 강일까? 한 치의 떨림도 몸부림도 없으니 눈앞에 펼쳐진 곳은 바다가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곳이 익숙해져만 간다. 아니 익숙함보다는 몽롱함에 가깝다. 술에 만취해서 침대에 누울 때와 비슷하다.
이곳이 편안해지기 시작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그녀가 온다. 하지만 오늘의 이곳은 이상하다. 평소의 그 느낌도 없다. 주변에 익숙한 것들, 하지만 익숙지 않은 것들, 겉은 똑같아 보이지만 알맹이가 다른 그것들이 보이질 않는다. 줄을 서서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 익숙한 것들이 없기에 오는 불안감일까? 은우는 추위를 느꼈다. 몸이 추운 것이 아니다. 가슴 한쪽에서 시작되는 신경 하나하나가 차갑고 아프다.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파서가 아닌 혼자라는 생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아이가 된 은우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지는 병원에 올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병원 특유의 알코올 향이 항상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은우는 지현의 곁에 있겠다며 병원에 있었고, 민지역시 그런 은우를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병원에 있었다. 하지만 논문관련으로 약속이 있었던 민지는 병원을 나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린 논문 관련 회의가 끝나고 시계를 보았을 때 자정을 넘어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늦어 집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병실에 지현과 은우가 둘이 있겠다는 생각에 민지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새벽이라고는 하나 정신병동은 너무 조용했다. 정신병동 입구의 경비원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민지는 그런 분위기에도 별 대수롭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현씨 병실이 육층이었나?”
민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 6을 누르곤 계기판을 바라보며 멍하게 서 있었다.
지이잉.
육중한 기계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었다. 승강기의 문이 열린다. 하지만 층수는 2층.
덜컹.
그녀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복도뿐이었다.
“장난인가?”
민지는 무심하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 서두를 일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아무도 없는 복도가, 시선이 놓인 그곳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져 그녀는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지이잉. 덜컹.
빨간 불이 3층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은빛 문이 열렸지만 그곳에도 아무도 없었다.
“아 뭐야? 누가 장난이라도 치나?”
민지는 짜증을 내며 다시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조금 전과 똑같이 냉랭한 복도를 보기 싫었던 것이다.
끼이익.
문이 닫히는 순간 그 좁은 틈새로 하얀 무엇이 그녀의 시야에 걸렸다. 놀란 민지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문이 닫혀버렸고, 좁은 직사각형 안에는 그녀만 멀뚱히 서 있었다. 아니, 한구석에 알 수 없는 얼굴이 숨어 민지를 보고 있었다.
“허억!”
숨이 오랫동안 막혔다가 뚫린 것처럼 의자에 기대어 있던 은우는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또 그 꿈을 꿨다는 것은 눈가를 적신 습기와 아직 가슴 구석에 있는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하지만 이걸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20년 가까이 느끼던 감정이지만 오늘은 왠지 달랐다.
은우가 그곳에서 벗어나 다시금 돌아올 때쯤이면 항상 가슴에 각인되어 있던 그 여자의 얼굴이 오늘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그 꿈에 다녀오면 그 여자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잠시 동안 멍하니 꿈을 되새김질하려던 은우는 몰려오는 역한 기운과 이질감이 올라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지현을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그녀는 도무지 환자 같지 않았다.
은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댔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이렇게 아름다운데 누가 널, 무엇이 널 그렇게 힘들게 하니…….”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던 은우는 어느 순간 이 방 안에 자신과 그녀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차가운 병실 바닥에 웬 형체가 보인 것이다. 은우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러곤 조용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것에게로 다가가는 몇 걸음 동안 은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남자로 어렴풋이 확인되는 순간 은우는 단정 지었다.
‘혹시, 저 자식이 지현이가 말하던 그놈? 아니야. 하지만 왜? 만일 그놈이라면 저렇게 널브러져 있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준혁의 말로는 과대망상이라고…….’
은우는 최대한 이성을 끌어올려 생각했다. 하지만 금세 떠오른 지현의 아파하던 모습에 이성은 곧 사라졌다.
‘그래! 이 병실에, 여기에 들어올 놈은 그리고 이 시간에 이렇게 올 놈은 그놈뿐이다.’
지현을 괴롭히던 원인인 그놈으로 단정 지은 순간 은우의 머릿속에서 이성은 이미 사라지고 분노만이 남았다.
퍼어억!
은우는 바닥에 널브러진 놈을 있는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러곤 놈의 몸 위에 올라타 멱살을 잡으며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두 번째 주먹이 다다를 쯤에 놈의 얼굴이 은우의 눈에 보였다.
“어?”
순간 은우의 머릿속엔 여러 장면이 떠올랐고, 그중 한 장면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저기, 미친놈 취급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잠시만 제 이야기 들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병원 로비에서 만난 아이, 눈이 참 큰 아이였다. 그 기억이 은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 그의 시야에 아이의 큰 눈이 들어왔다.
아이는 은우를 멀뚱히 그냥 바라볼 뿐이었다. 퍽 우스운 모양새다. 유독 눈이 큰 아이는 모양새가 자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은우를 보고 있었고, 그러한 아이를 내려다보는 은우도 아이가 눈을 뜨자 놀란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묘한 어색함이 병실 안을 가득 채울 쯤에 먼저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일어나도 될까요?”
아이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은우도 자의에 의하여 판단하던 분노가 무너지고 이성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성이 돌아오니 더더욱 아이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니, 이상한 일이다. 웬 이상한 애가 병실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난 그 의심스러운 놈을 잡았다. 그러므로 이 녀석은 의심스러운 놈이다.’
놓아선 안 된다고 머리는 결론지었지만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은우는 잡았던 멱살을 놓고 일으켜주기까지 했다. 아이도 일어나더니 옷을 털고 해맑게 웃으며 은우를 보았다.
은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웃으며 은우의 입을 막았고 한 손으론 침대를 가리켰다.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아이는 이어 싱긋 웃더니 밖에서 이야기하자며 은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꽤 긴 복도를 지나 병원의 외부 계단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외면하며 한참 서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냥 잠들어버렸네요.”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은우에게 말을 건넸다. 은우는 뭐 이런 놈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아이를 보며 물었다.
“너 뭐하는 놈이야? 왜 여기에서 자고 있는 거야!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이는 또다시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씩 차근차근 말씀하세요.”
“빨리 말해!”
은우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아, 일단 저는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에 은우가 아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돕긴 무엇을 돕는단 말이야?”
아이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 갑자기 이런 말하면 안 믿으시겠지만 저기 병실에 있는 예쁜 누나 괴롭히는 놈, 제가 잡을 수 있거든요.”
은우는 아이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네가 어떻게 지현이의 일을 알지?”
은우는 또다시 흥분하여 아이의 멱살을 잡았다. 아이는 잠시 풀 죽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 누나 매일 밤마다 이상한 게 와서…….”
아이는 얼굴을 잠시 붉히더니 말을 이었다.
“나쁜 짓을 한다고 말하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 혹시 정말 네놈이!”
은우는 잡은 멱살을 더욱더 움켜쥐며 물었다. 아이는 웃음기가 사라진 채 거의 울먹거리며 말했다.
“제가 그런 짓을요? 아니에요! 그리고 혹여나 제가 그런 짓을 했으면 거기에 그렇게 있었을 것 같아요?”
그것은 은우도 아까 전부터 계속 생각하던 것이었다. 일단 지현이 말하던 그놈이 이 아이라면 거기서 그렇게 잠들 이유도 없었다.
“그럼 너 거기서 왜 그렇게 잠들어 있던 거야?”
아직은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은우는 멱살을 놓지 않았다.
“아까 말했잖아요! 그 녀석 잡으려고 왔다고. 그리고 그놈이랑 싸우다가 지쳐서 잠들었다고요!”
아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렇다면 넌 그놈 얼굴을 아는 거야? 그럼 지현이가 한 말이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야?”
은우의 물음에 아이는 이번엔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그놈이…… 아, 그러니까 귀신…….”
거의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이야기를 하자 은우는 거칠게 아이를 벽으로 밀쳤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뭐? 귀신?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 이런 미친놈, 너 일단 경찰서부터 가자!”
은우는 다짜고짜 아이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얼굴이 벌게져 아무 말 못하고 은우의 손길에 이끌려갈 뿐이었다.
하얗고 긴 복도 안을 빠르고, 약간은 흥분된 발자국 소리가 가득 메우고 있다. 은우는 점점 스스로의 판단에 의구심이 불어나고 고민도 증폭되어가고 있었다. 앞장서 아이의 손목을 잡아끌고 가는 동안 은우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자꾸만 그 아이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무언가와 닮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은우의 머릿속, 아니 가슴속에서 본능보다도 조금 더 깊은 감각이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지 말라며 명령하는 듯했다.
그러한 이질감이 자신의 가슴을 망치질할 때마다 은우는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어댔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그런 은우를 다시 현실로 당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그 아이 잠시만, 잠시만.”
둘의 앞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현이었다. 병실에서 복도까지는 금세였지만 그녀는 힘이 들어 보였다. 은우의 손에 끌려가던 아이는 금방 울상이던 표정을 바꿔 해맑게 웃으며 지현에게 말을 걸었다.
“예쁜 누나 잘 잤어요? 헤헤.”
그녀는 단지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전날보다는 조금 더 좋아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야위고 창백한 얼굴과 생기 없는 모습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힘겹게 걸음을 옮겨 아이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하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어깨를 꼭 잡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