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윈-드-워-즈-님!”
리안느는 이 한밤중에 발가벗고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불렀다.
고목에 앉아있던 새들이 리안느의 목소리에 놀라 푸드덕 날아갔다.
“아.”
레온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을 리안느는 놓치지 않았다.
“아? 지금 이 상황에 아, 라고 하셨나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쓴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하지?”
레온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잘 어울리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주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 참았다.
“지위 깨나 있으신 분이! 이런 밤중에! 그것도 숙녀들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리안느는 하고 싶은 말을 강조하듯이 딱딱 끊어서 말했다.
“훗.”
레온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리안느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덧붙였다.
“성격이 다양해서 보는 즐거움이 있네.”
“누구한테 하는 말이죠? 알아듣게 말씀해 주실래요?”
“방금 전까진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정색하고 화내는 리안느 영애 말이야.”
리안느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커졌다.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전 공작님께 제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는데요.”
“본인이 스스로 말해놓고 말한 기억이 없다네.”
“제가요? 제가 언제 말했죠?”
리안느는 혹시 과거에 레온을 만난 적이 있었나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기억이 없었다.
이런 초절정 미남을 만났다면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다. 아니, 잊어버릴 수가 없다.
문제는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언제 통성명을 했다는 거지?
레온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리안느의 모습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리안느가 다시 턱에 힘을 주었다.
“논점을 흐리시네요. 지금 중요한 건 공작님이 왜 그런 흉한 모습으로 여기 계시냐는 겁니다!”
“전부 너 때문인데?”
“너 때문? 제가 공작님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가요? 제가 언제요?”
누명도 이런 누명이 없다. 만난 건 겨우 몇 분 전이었다. 그런데 옷을 벗겼다고?
‘혹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리안느는 의심쩍은 시선으로 레온을 힐끔거렸다.
반면, 레온의 시선은 호감 어린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시선이 심히 부담스러웠던데다 정신 상태가 의심되는 수준이기도 해서 리안느는 빨리 그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홱, 등을 돌려 빠르게 걸었다.
그 순간, 뒤에서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 들렸다.
“리안느 영애,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우뚝.
리안느는 빠르게 옮기던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방금……뭐라고 하셨죠?”
리안느는 뻑뻑하게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잘못 들었을 거라고, 착각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세상에 알몸으로 프러포즈하는 인간은 없다.
리안느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도 있는 듯 했다.
“결혼해 달라고. 내 신부가 되어줘.”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빠지직, 갈라지면서 꾹 참고 있던 독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쳤습니까! 누가 당신 같은 야외 노출증 환자하고 결혼합니까!?”
“야외 노출증?”
레온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러면 이런 밤중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돌아다니는 게 야외노출증이 아니고 뭡니까?”
“이건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이런 게 아니라…….”
“변명은 됐습니다, 됐어요! 더 이상 그 망상 장애 같은 발언은 듣고 싶지가 않아요!”
리안느는 레온의 변명 어린 말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물론 마지막에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독설도 잊지 않았다.
“왜 12번이나 이혼 당했는지 알겠네요!”
리안느의 메아리가 조용한 숲에 울려퍼졌다.
“…….”
레온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숲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리안느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리안느의 모습은 이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스락.
뒤에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동시에 차분한 저음이 들렸다.
“여기 계셨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레온의 벗은 몸 위에 양털 가운을 살포시 덮었다.
“아인스.”
돌아본 그곳에 검정 연미복을 입은 금발 청년이 서 있었다.
안경 속 녹안이 아름다운 이 청년의 이름은 아인스 엘드레드. 윈드워즈가에서 일하는 집사였다.
“손님들이 레온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습니까?”
“실비아가 여기에 왔을 줄 몰랐거든.”
레온은 가운 끈을 조이면서 대답했다.
수도에서 순진한 남자들을 농락하고 행방불명되는 수법으로 유명한 실비아 라임스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아무리 결혼이 급해도 실비아는 안 된다.
“제 불찰입니다. 초대객 명단을 제가 꼼꼼이 살폈어야 했는데……. ”
“네 잘못이 아니야. 이 도시에 있는 귀족 영애들을 전부 초대하라고 한 건 나니까.”
그 수많은 여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
“솔직히 이런 방식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폐하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어.”
여자들로 우글거리는 파티회장의 문을 연 순간, 도망치고 싶었다.
플로렌에 가서 13번째 아내를 맞으라는 황제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파티를 열었지만, 막상 여자들을 보니 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수많은 암사자들에게 둘러싸인 숫사자의 심정이 이럴까.
물론 정글의 왕인 숫사자는 이런 하렘이 익숙할런지 모른다.
문제는 레온은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개였다. 그것도 12번이나 부인들이 도망간 개.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았거든.”
레온은 리안느가 사라진 숲 저편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던졌다.
“그 분이 레온님을 이렇게 탈바꿈시킨 장본인입니까?”
눈치가 빠른 아인스였다.
그는 레온이 왜 벗고 있는지, 그렇게 만든 게 누군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응. 그런데 뭔가……좀 이상해.”
“뭐가 이상합니까?”
레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두 손을 폈다가 쥐었다, 를 반복했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이런 감촉을 느껴봤던 것 같아.”
“예전에요?”
아인스는 감도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주종관계가 된 것은 겨우 5년 전이었다.
레온의 과거는 거의 몰랐다.
“응. 아주 예전에.”
……내 인생이 암흑 속에 있었을 때.
레온은 소녀가 사라진 숲 저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바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
한편 그 시각.
부랴부랴 자택으로 귀가한 리안느는 마부가 내리기도 전에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라울! 라울, 어디 있어!?”
그녀는 저택 안으로 들이닥쳐 이 집안의 총괄 집사부터 찾았다.
“아가씨?”
예상보다 일찍 귀가한 리안느의 모습에 라울의 흑요석 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까무잡잡한 피부색과 흑발이란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외지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이 나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캐플라인가의 핏줄.
그는 아버지와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서출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디 계셔?”
리안느는 흰색 장갑을 벗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랑감 좀 찾으라고 파티에 보낸 장본인이 아버지였다.
득달같이 달려와 어떻게 됐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그래야 할 사람이 안 보이니 의아할 수 밖에.
“백작님과 마님은 저녁쯤에 루비르해로 향하는 선상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선상 여행!? 난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이미 지난달에 예정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오늘 갑작스럽게 들은 일이라 아가씨께 말씀 드릴 경황이 없었습니다.”
빠직!
리안느의 관자놀이에 미세하게 경련이 일었다.
‘이 인간이! 나를 그런 이상한 남자한테 보내놓고 룰루랄라 여행을 가?’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고 눈물 연기까지 펼치는 모습에 마지못해 간 파티였다.
그게 실수였다.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의 젊은 유망주가 사실은 야외노출증에다 망상 장애까지 있는 남자였다.
어떻게 그런 남자를 차기 신랑감으로 점찍을 수 있냐고 따지려고 했더니만…….
“도망을 갔어?”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당사자는 지금 여기에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분노를 참았다간 화병 나서 죽는다.
그래서 대타를 찾았다.
“오빠는? 오빠는 집에 있지?”
“네. 자작님은 지금 방에 계십니다.”
타겟 변경.
리안느는 회심의 미소를 씩, 지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아서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안됩니다! 자작님께서는 절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뒤에서 라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리안느의 귀에 그의 충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끼이이익.
떡갈나무 재질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촛불 한개만을 밝힌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리안느는 그런 방 안을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걸음을 멈춘 곳은 중후한 진녹색 커텐 앞이었다.
촤악!
리안느는 양쪽으로 커텐을 확, 쳤다.
그러자, 별이 촘촘이 박힌 밤하늘이 격자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발 청년을 발견했다.
“오빠.”
“하, 하하. 리안느, 안녕?”
아서는 여동생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내면서 인사를 했다.
“나와.”
리안느는 강아지 부르듯이 손가락 하나만 까닥거렸다.
약점이 단단히 잡힌 아서는 순순히 리안느의 말을 따랐다.
“실비아는? 실비아는 만났어?”
“실비아가 궁금해? 그렇게 당해놓고도 실비아부터 찾아?”
리안느는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실비아가 궁금한 게 아니라, 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나 걱정이 되어서…….”
“오빠가 돈 걱정을 했다고? 그런 사람이 그런 꽃뱀한테 그런 거금을 덜컥 내주냐?”
“그건 실비아가 병에 걸렸다고 우니까…….”
“에휴.”
이 부분에서 리안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병약했던 아서는 아픈 사람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것이 여자라면 더욱 그랬다.
실비아는 아서의 그런 점을 노렸던 것이다.
“오빠에게 상처될까봐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실비아의 실체를 밝혀서 정을 확 떼버리게 만들어야지.
“실비아가 뭐랬는지 알아? 오빠가 여동생에게 시시콜콜하게 자기랑 있던 얘기를 말하는 남잔 줄 몰랐대. 실망했대!”
“시, 실망!”
아서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실비아는 처음부터 오빠의 돈이 목적이었어. 마음 줘봤자 소용 없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그럴 리가 없어. 실비아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고!”
이 순진한 오빠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여자를 좋아하는 아버지 같은 남자도 문제지만, 순정파인 오빠 역시 문제다.
“오빠! 꽃뱀들의 사용 빈도 수 1위 말이 바로 그 ‘사랑해’야. 아마 다른 남자들한테도 수없이 말했을걸?”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네 말 안 믿어. 안 믿어. 안 믿어.”
아서는 리안느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두 귀를 막았다.
“하아…….”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리안느는 아서의 방을 나왔다.
‘총체적 난국.’
이 집에 대해 그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다.
부인을 7번이나 갈아치운 아버지.
여자에게 번번이 속아서 재산 탕진을 밥 먹듯이 하는 오빠.
역시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결혼 실패 경력만 4번인 이복 언니까지.
이 집은 문제가 많다.
물론 거기에는 리안느도 포함이다.
지금은 19살이 먹도록 결혼하지 않는 귀족 영애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세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백작 아버지가 딸을 줄기차게 사교계에 내보내는 이유다.
문제는 리안느는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총체적 난국인 집안을 놔두고 어떻게 시집을 가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은 결혼은 글렀다.
리안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계단으로 내려왔다.
“첼시 아가씨! 기다리세요!”
바로 거기에서 술래잡기를 하듯 어린 여자아이와 하녀가 뛰고 있었다.
“첼시!”
리안느는 옆구리에 손을 짚은 채 크게 외쳤다.
“언니…….”
첼시는 리안느의 얼굴을 보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멈춰!”
“싫어! 절대 머리 안 감을 거야!”
첼시는 등을 휙, 돌리고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총체적 난국 1인 추가.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동생 첼시 캐플라인이었다.
이 아이의 가장 큰 난점은 씻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 이런 술래잡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잡았다!”
다년간 단련된 술래잡기 신공으로 리안느는 단번에 첼시를 잡아버렸다.
“싫어! 씻기 싫단 말이야!”
“안 씻으면 나중에 시집 못 간다고 했지?”
“거짓말. 언니는 잘 씻어도 시집 못 가잖아.”
촌철살인 한마디에 반박할 수가 없다.
“어쨌든 씻는 건 중요해.”
리안느는 팔을 걷어부치고 첼시의 머리를 감겼다.
곱슬거리는 백금발인 첼시의 머리는 부드러워서 꼭 어린 강아지 같았다.
‘그 개도 이렇게 부드러웠어.’
아까 만난 대형견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개는 누구 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