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담이 들어왔다는 믿겨지지 않는 라울의 말이 사실인지 알고 싶었던 리안느는 당장에 아버지의 서재로 달려갔다.
머리에 희끗희끗한 백발이 섞이기 시작한 50대의 버킨스 캐플라인 백작은 화색을 띠고 리안느를 반겼다.
“어서 와라, 리안느. 마침 부르려던 참이었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리안느는 드레스 치맛자락을 넓게 펼치고 몸을 숙여 며칠만에 보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 여행이 문제가 아니다. 너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혼담이!”
백작은 마치 자신에게 혼담이 들어온 것처럼 감격에 겨워 외쳤다.
“네, 라울에게 방금 들었어요. 그 얘기가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마다! 그동안 너를 파티에 꾸준히 보낸 보람이 있었다. 명문가 귀족 집안에서 너를 신부로 맞고 싶다는구나!”
오랜 염원을 드디어 이뤘다는 기쁨에 백작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반면, 리안느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말 제가 맞아요? 동명이인이 아니고요? 제 소문 못 들었대요?”
리안느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질문이 터져 나왔다.
“진정해라, 진정해. 차근차근 하나씩 대답해 주마.”
백작은 침착하라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동명이인이 아니다. 정확히 리안느 캐플라인이었다. 여길 봐라.”
백작은 책상 서랍에서 편지 봉투를 꺼냈다.
“처음 보는 문장이네요.”
편지 봉투를 봉납한 문장이 눈에 설었다. 적어도 이 지역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그러면 그렇지.’
타지 사람이라면 이번 혼담이 이해가는 부분이 있다.
리안느의 평판을 모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난 선상 여행 중에 이 편지를 받고 급히 배를 돌렸다.”
“선상 여행 중에 어떻게 편지를 받아요?”
“올빼미를 통해서 배달이 왔더구나.”
그 올빼미의 주인이 혼담을 청한 사람인가?
“그까짓 선상 여행이야 또 가면 되지. 허나, 네 혼담은 다르다. 이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횡재야!”
딸의 결혼을 횡재로 표현하는 아버지가 조금 저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얼마나 딸의 결혼을 원했으면 저럴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런 정에 흔들렸다가는 이 집안은 끝장이다.
리안느가 없으면 이 백작가는 폭삭 주저앉는다. 가족들과 영지민들이 길가에 나앉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래서 리안느는 결혼할 수 없다.
“아버지, 이번 혼담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전 결혼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영지 타령이냐? 걱정하지 마라. 네가 시집을 가도 영지는 내가 잘 돌볼테니.”
“영지에 얼굴 한 번 안 비치시는 분이 어떻게 영지를 돌보겠다는 거죠? 아버지가 선박 사업이 소중하듯이 저도 영지가 소중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정 그렇다면 레온님과 함께 의논을 해보자.”
방금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들은 것 같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또다시 불길하게 뛰었다.
호밀 고구마를 수확하러 갔던 그 날처럼.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그 레온이란 분이……레온 윈드워즈님은 아니겠죠?”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아버지 백작에게서 돌아온 것은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이었다.
“어찌 알았냐? 맞다. 레온 윈드워즈 공작님이시다. 지난번에 레온님이 주최하신 파티에 초대받질 않았냐? 그 때, 널 예쁘게 보셨다더구나.”
리안느는 책상 위의 편지 봉투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녀의 눈이 잡아먹을 듯이 편지 봉투의 겉면을 확인했다.
필기체로 정확히 ‘레온 윈드워즈’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 안의 내용은 볼 필요조차 없었다.
봉투를 쥔 리안느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머릿속에 파티날 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결혼해 달라던 남자.
<리안느 영애,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 기상천외한 프러포즈를 받고 뒤로 넘어갈 뻔해더랬다.
그런데 이 남자, 집요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나한테 안 먹히니까 이제 아버지를 공략하시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아버지, 죄송합니다만. 만약 그 상대가 레온 윈드워즈님이라면 더더욱 이 결혼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더더욱? 그건 무슨 뜻이냐?”
백작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게…….”
리안느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뭔데 그러냐? 괜찮다. 말해 봐라.”
아버지의 나긋나긋한 종용에 리안느는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제게 남의 약점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만, 이건 제 일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사설이 길구나.”
백작은 허얘지기 시작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온 윈드워즈 공작님은 병이 있습니다.”
“병? 무슨 병?”
‘병’이란 말에 백작도 차분한 태도를 잃었다.
리안느가 말한대로 딸의 일생이 달린 문제다. 아무리 윈드워즈가 명망 있는 공작 가문이라지만, 병이 있는 남자를 사위로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리안느는 자신감이 생겨 사실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았다.
“레온 윈드워즈님은 야외노출증입니다.”
“…….”
순간, 서재에 정적이 흘렀다.
“리안느, 너에게 실망했다. 아무리 결혼이 하기 싫어도 그렇지, 없는 사실을 말해?”
백작은 호통을 치면서 딸을 다그쳤다.
“없는 사실이 아니에요! 정말 봤다고요. 알몸으로 저에게 결혼하자고 했어요.”
“아니, 이미 구혼을 받았단 말이야? 왜 진작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
백작은 구혼을 받았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졌다. 레온이 알몸이었다는 것은 아예 흘려들었다.
“지금 구혼이 문제가 아니에요. 알몸이었다고요, 알몸!”
“난 그 말이 믿기지 않을뿐더러,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이 결혼은 성사되어야 하지 않겠냐?”
“그건 왜죠?”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남자의 알몸을 봤다. 이게 소문이라도 나봐라. 우리 백작가의 체면이 뭐가 되겠냐?”
그런 체면을 아시는 분이 장가를 7번이나 가셨어요?
그렇게 비꼬고 싶은 걸 꾹 참고, 리안느는 레온과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피력했다.
“게다가 레온님은 12번이나 결혼에 실패했어요. 12번이나 부인이 도망갔다는 건 뭔가 하자가 있는 거라고요. 아버진 그런 남자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으세요?”
그러자, 백작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미안하다, 리안느. 네가 남자에게 불신을 가지게 된 건 전부 나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자주 실패하는 바람에…….”
백작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어깨까지 가늘게 떨면서 우는 백작의 모습에 리안느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번 결혼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네 어머니가 병석에 있을 때 약속한 게 있다. 너를 꼭 좋은 남자에게 시집 보내달라고 했어.”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줄기차게 리안느를 사교계에 내보내는 이유가 첫 번째 부인과의 그 약속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리안느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레온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리안느. 아버지가 못나서 너에게 짐만 지우는구나.”
“짐? 무슨 짐이요?”
“사실은 말이다…….”
백작은 말끝을 흐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염전 사업을 하면서 난 수익으로 무역 상선에다 투자를 좀 했거든. 그런데 상선이 해일을 만나서 가라앉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래서 그 손해를 메우려고 돈을 좀 빌렸는데…….”
“설마 그 빌렸다는 데가 레온 공작님은 아니겠죠?”
“미안하다, 리안느!”
백작은 아까보다 더욱 심하게 어깨를 떨면서 흑흑거렸다.
“얼마나 빌렸는데요?”
“8천만 마르…….”
“8, 8천만? 그 돈은 영지랑 저택 다 팔아도 못 갚을 돈이잖아요!?”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다.”
백작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죄했다.
리안느는 절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최악의 상황이다. 돈에 팔려가게 생겼다.
귀족 사회에서는 흔이 있는 얘기다.
집안이 몰락해 자기 아버지뻘 되는 귀족과 정략결혼을 하는 어린 영애들의 얘기.
물론 레온이 아버지뻘 되는 귀족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나은 경우라고도 볼 수 없다.
12번이나 부인을 갈아치운 결혼 이력과 노출증 습관.
거기에다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려는 인성까지.
‘최악의 결혼 상대다.’
최악의 결혼 상대지만, 선택지가 없다. 8천만 마르는 시골 귀족이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알겠어요. 결혼하겠습니다.”
“……정말이냐?”
백작은 눈만 빼꼼 내보이며 물었다.
“결혼 안 하면 그 돈을 다 갚으라고 할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죠.”
이건 함정이다.
아버지도, 리안느도, 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그 파티를 연 것도, 리안느를 그 파티에 초대한 것도 그 함정의 일환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것도 모르고 백작은 입이 귀에 걸렸다.
“경사다, 경사야! 내가 윈드워즈 집안 사위를 맞다니! 이게 꿈은 아니지?”
방금 전까지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것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결혼 문제가 더 급했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면 쉬세요.”
리안느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래, 잘 자거라.”
백작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흡족한 결과를 얻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반면, 리안느의 얼굴은 어둡게 그늘이 져 있었다.
결혼을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충격이 컸다.
이런 최악의 상태로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머나, 세상에. 리안느 캐플라인에게 혼담이 들어왔어?”
복도로 나온 순간, 어디에선가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느는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복도에 걸린 초상화 옆쪽에서 드레스 치맛자락이 흔들렸다.
“나와. 숨어 있지 말고.”
리안느는 불쾌함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후후, 혼담이 들어왔는데 왜 얼굴이 죽을상이야?”
붉은 융단 위를 사뿐사뿐 걸어와 리안느 앞에 선 인물은 티아나였다.
“남의 얘기를 몰래 엿듣다니, 예의가 없어도 정말 없다.”
“예의? 네가 예의를 말해? 아까 식당에서 나한테 한 행동을 생각해 봐. 그건 예의가 있는 행동이었어?”
“난 지금 언니랑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야. 나중에 얘기해.”
지금 리안느는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건드리면 폭발하는 다이너마이트와도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티아나 옆을 스쳐서 계단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도 입찬 소리를 하길래 얼마나 대단한 남자랑 결혼하나 했더니……후처야? 그것도 13번째? 쿡쿡쿡.”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리안느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티아나의 도발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들린 말에는 도저히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네 엄마가 아시면 하늘에서 정말 슬퍼하시겠다. 어쩜 좋니, 쯧쯧.”
우뚝.
리안느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홱, 뒤돌아보았다.
도발에 성공한 티아나의 입꼬리가 씨익, 치켜올라갔다.
“우리 엄마 얘기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지?”
“뭘 함부로 해? 내가 뭐 틀린 사실을 말했어? 후처를 후처라고 하는데 뭐가 잘못됐어?”
“후처가 뭐 어때서? 몰라? 언니 엄마도 후처야! 7번째 후처!”
티아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뭐? 너, 지금 우리 엄마를 모욕했어?”
“언니랑 똑같이 해준 거야. 기분 나쁘지?”
가뜩이나 누구와 싸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에서 가장 눈엣가시 같은 티아나가 싸움을 걸었다. 아주 잘 걸렸다, 싶었다.
“언니처럼은 안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절대 소박맞고 돌아오는 일 없을 거야.”
그 말에 티아나는 코웃음을 쳤다.
“과연 그럴까? 네 성격 때문에라도 그 결혼 오래 못 간다. 누가 너 같은 독설녀를 견뎌?”
그러더니 작정한 듯이 리안느를 비아냥거렸다.
“네가 결혼 생활을 안 해봐서 그러는데 결혼은 인내의 연속이야. 그런데 넌 성격상, 인내가 불가능하잖아?”
인내심 강한 너는 왜 매번 실패하는데?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꾹꾹 집어넣었다.
그런 리안느의 속마음도 알 리 없는 티아나는 이번에야말로 이겼다고 생각해 거만하게 말했다.
“이번 혼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테니까 잘 해. 풍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너한테도 이런 날이 온다? 후후후!”
티아나는 복도가 울려퍼지도록 웃으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다.
리안느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굼벵이다, 이 멍청아.”
속담 하나 제대로 모르는 언니를 두고 어떻게 결혼을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