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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소녀
작가 : an3375
작품등록일 : 2016.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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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그 이방인, 적응(適應) (7)
작성일 : 16-09-28     조회 : 482     추천 : 2     분량 : 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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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만 말하자면 하엘에게서 맛없는 차와 달콤한 과자를 대접받기로 약속해 들떠 있던 유리의 기대는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난 얼음조각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유리는 하엘이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그가 주는 차와 과자를 기숙사 방에서 느긋이 즐길 수 없다는 것을 하엘보다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오.”

 

 

 

 그렇기에 유리는 지금-흔치 않게- 하엘에게서 동정어린 시선을 받기에 이른다. 오후의 교양 수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유리는 기숙사 로비에서 저와 눈을 마주치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엘을 보며 쉬이 말문을 열지 못했는데 그것은 유리가 어째서 지금, 하엘이 이곳 여자 기숙사에 있는 지에 대해 물어봐야 할 지 아니면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녀석을 보듯이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봐야할 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가 하엘에게 다가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유리가 눈치 챈 사실이 딱 두 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하엘이 서 있는 곳이 여자 기숙사 전용 게시판 앞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유리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이들도 기숙사 게시판 앞에 있는 학생들이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리의 눈이 게시판으로 돌아가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왁! 유리, 잠깐, 잠깐만!!”

 

 

 

 오히려 이상한 것은 하엘의 행동이었다. 유리가 게시판으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유리의 시야로 펄쩍 뛰어 들어온 하엘은 발꿈치와 양팔을 들어 올리는 괴이한 형태로 유리의 시야를, 정확히는 유리가 게시판을 보는 것을 막아버렸다.

 

 

 “물론 어차피 나중에는 보게 될 거지만 널 가장 아끼는 친구로서 충고하건데 이런 충격적인 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라는 걸 하는 게 좋을 것 같……!”

 

 

 “하엘 가넥스는 여자 기숙사 로비에서 만세를 하고 다닌다는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리본첼 영애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비켜, 하엘.”

 

 

 

 그리고 하엘은 빛보다도 빠르게 팔을 내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

 

 

 

 어차피 닥칠 일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본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시라도 빠르게 알고 싶어 다급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정말로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는 하엘의 모습을 보며 유리는 자신이 지금 하엘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졸업하고 바로 아버지의 상회를 물려받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정말로 학부에서 1등을 할 모양인지 점심시간에 책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났을 때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아니, 사실은 어젯밤 은빛 여우를 잡겠다고 통금 시간을 어기고 자신을 끌고 기숙사 밖을 뛰쳐나갔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지만 어느새 리본첼 영애는 저 고집 세고 자기중심적인 하엘의 행동양식을 바꾸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리?”

 

 

 

 카릴 폰 리본첼의 정체가 사실은 남자고 그것도 보통 남자가 아닌 바탈리온 제국의 그 소문 무성한 제 3황자라는 사실을 아는 유리로서는 이 순간 계약서고 뭐고 간에 정말 진심으로 하엘에게 리본첼 영애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소꿉친구가 리본첼 영애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진심인 가에 대한 것이 지금에서야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하엘이 리본첼 영애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행동들은 단순히 가지고 싶은 건 뭐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하엘의 집착적인 성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작 리본첼 영애를 ‘가지고 싶은 것’만으로 하엘이 이만한 노력과 수고를 들인다는 게 이상했다. 운동하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하엘의 입에서 운동을 하겠다는 말을 내뱉게 하고 귀찮은 걸 싫어하는 하엘에게 공부도 열심히 하게 만드는 걸 보면 분명 하엘이 리본첼 영애에게 가지는 감정은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게 분명했다.

 

 

 

 “유리, 갑자기 왜 그래?”

 

 

 “…….”

 

 

 

 아니면 모르는 건 자신뿐이고 본인은 이미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하엘을 바라보는 유리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하엘, 나는 네가……헉!”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눈을 굴리던 유리는 순간 게시판 쪽으로 눈을 돌려버리고 말았고 그곳에 붙어있는, 아침에 기숙사 밖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벽보를 보고 숨을 들이쉬었다.

 

 

 

 “아이고.”

 

 

 

 눈을 크게 홉뜬 채 숨을 들이키는 유리를 보며 하엘이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니깐…….”

 

 

 

 [지난 밤, 특별동 여자 기숙사에 침입한 유리시아 폰 다리엔은 시가 5만골의 물건을 파손한 죄로 파손시킨 물건의 값을 배상하거나 기숙사를 특별동 기숙사로 옮겨 5년간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난 아무것도 안 부쉈어!”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이며 계속해서 벽보를 반복해서 읽던 유리가 돌연 소리를 빽 지르자 하엘을 포함해 그녀의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 중 몇몇 학생은 유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슬슬 자리를 피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흥분한 유리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가 5만골이라니! 유리는 입을 딱 벌렸다. 아스테리아 학원의 1년 치 학원비가 대략 천 골드이고 사치스러운 유리의 어머니가 한 달에 쓰는 돈이 약 6백 골드인 걸 감안할 때 5만 골드는 아무리 유리네 집안이 귀족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기엔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유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 본인이 그만한 액수의 물건을 파손시킨 기억은 없었다.

 

 설마 이게 어젯밤 에시단 황자가 이야기하던 특별동 기숙사로 옮기는 절차의 일부인 걸까? 유리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없는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자신의 거처를 강제로 특별동 기숙사로 옮기려는 모습에 유리는 화가 나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다리엔 가문이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의 말썽에 5만 골드를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귀족인 건 아니었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가볍게 5만 골드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부자인 집안도 아니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가 학원 밖으로 퍼져나가 유리의 부모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렇지 않아도 유리가 아스테리아 학원에 입학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부모님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참에 유리로 하여금 학원을 나오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이 벽보를 읽었기 때문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고 유리로선 상상할 수 있을 법한 생각들이었다.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일의 주도자가 저를 특별동 기숙사로 옮기게 하려는 에시단 황자의 명령임을 생각하자, 그리고 덤으로 그 황자가 오늘 아침에 식당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떠올리자 절로 골치가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역시 특별동 기숙사에 들어가면 안됐던 거였어…….’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제가 멍청하게도 통금시간을 어겨가며 기숙사를 나와 특별동 기숙사에 들어갔기 때문임을 떠올리자 유리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유리는 5만 골드까진 아니어도 목숨을 위협받고 강제로 두꺼운 계약서에 서명을 한 자신이 배상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 돈을 배상해야 할 쪽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서러운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리는 제 입안에 달콤한 과자가 물렸을 때 하마터면 모두가 있는 로비에서 울음을 터트릴 뻔하였다.

 

 

 

 “맛있지?”

 

 

 

 하엘의 손에 작은 과자박스가 들려 있었다. 유리는 그 과자가 하엘이 자신에게 대접하기로 약속했던 과자라는 걸 깨달았다.

 

 

 

 “베노스 산 홍차는 내가 이용하는 상점에는 없는 모양이라 못 구했어.”

 

 

 

 피나는 조기 교육 덕에 여전히 눈에선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유리는 어째서인지 여전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유리는 생각했다. 어쩌면 어제부터 꽤 고단한 하루였기 때문에 입 안에 감도는 이 달콤한 과자가 위로가 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신 과자를 두 상자 줄게. 괜찮지?”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아무리 하엘이 값비싼 아타락샤산 홍차를 내놓아도 그것이 유리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엘의 제안은 괜찮은 것 이상이었다.

 

 

 “짐 쌀 거지? 도와줄게.”

 

 

 

 유리는 벽보 밑에 작은 글씨로 돈을 배상할 거면 1년 내에, 기숙사를 옮겨 봉사활동을 할 거면 오늘 내로 짐을 싸서 이동해야 한다는 유의사항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엘도 이미 유리가 부모님에게 부탁해서 5만골을 배상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좀 아쉬운 건 말이야.”

 

 

 

 유리의 방을 알고 있는 하엘은 유리보다 앞장서서 두세 칸 씩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넘어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유리는 막 기숙사 사감이 자리에 없어 그 조교에게 거처를 옮기겠다는 말을 전했고 하엘은 유리의 짐을 싸는 걸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여자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허가증을 받은 참이었다. 깐깐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숙사 사감과는 다르게 조금 엉성한 기숙사 사감의 조교는 명목만 있으면, 그리고 통금시간을 지키기만 한다면 쉽게 허가증을 내주곤 하였다.

 

 

 

 “네가 특별동 여자 기숙사로 거처를 옮기면 거기는 허가증만 받으면 들어올 수 있는 일반 여자 기숙사와는 달리 남학생들은 원천 출입금지 구역이니 수업 후에 볼 기회가 좀 적어지겠다.”

 

 

 “어차피 허가증이 유효한 시간은 한 시간 안짝이잖아. 정 만나고자 한다면 식당이나 휴게실에 가도 되고 내 쪽에서 네게 찾아갈 수도 있잖아.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뭐가 아쉬워?”

 

 

 “하지만 좋은 점은 말이지.”

 

 

 

 유리의 말은 못들은 척 하엘이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하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리는 그제서야 그에게 무슨 속셈이 있다는 걸 깨닫곤 눈을 가늘게 뜨고 하엘을 노려보았다. 하엘은 그런 유리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능청스럽게 생글생글 웃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이제 네가 특별동 여자 기숙사에서 지내니 너는 매일 같이 리본첼 영애를 볼 거란 말이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지금 이 대화로 내가 너랑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진다는 걸 기쁘게 받아들인다 의미?”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리! 이건 내 친구가 리본첼 영애의 곁에 있음으로서 내가 다른 녀석들보다 그녀의 정보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의미잖아!”

 

 

 

 계단참에서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하게 외치는 하엘을 보며 유리는 그가 리본첼 영애를 스토킹하는 걸 그만두겠다고 말한 지 몇 시간이나 되었는지 계산해 보았다. 유리의 계산으로는 아직 24시간이 되기까지 약 2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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