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유모가 읽어 준 제국 개정판 버전의 동화책 속 엘프는 잔인하고 냉정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종족으로 묘사되었지만 그들이 정령술이나 마법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이야기에 유리는 마음 한 구석으로 엘프들은 무척이나 신비하다고 생각했었다.
유리는 검술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지만 마법과 정령술엔 손톱만큼의 재능도 없었고 인간들 중에서도 마법과 정령술을 쓸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아스테리아 학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유리가 마법을 접할 수 있었던 건 고작 해봐야 가넥스 상회에 상품으로 들어왔던 마법 도구들뿐이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유리는 자신은 할 수 없는 마법이나 정령술을 동경했고 마력의 축복을 받아 구성원의 대다수가 마법과 정령술을 쓸 수 있다는 엘프들에게 제멋대로 환상을 품었을 지도 몰랐다.
“유리, 뭘 보고 있는 거야?”
“…환상이 깨지는 순간.”
유리의 대답과 동시에 휴게실을 장식하고 있던 커다랗고 값비싸 보이는 도자기 하나가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 사이 에시단 황자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았지만 깨진 도자기 소리에 묻혀 유리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아니, 사실 유리는 지금 황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호전적으로 게일드의 결투를 받아들인 엘렌도 그렇지만 냉정하고 이지적으로 보였던 이브릴이 눈 깜짝할 사이 분노의 화신이 되어 활활 타올라 날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리는 제 안에 있던 ‘엘프’ 라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방금 깨진 도자기만큼이나 산산조각 난 것을 느꼈다. 정의로운 자가 언제나 승리한다든가 왕자님은 멋있고 공주님은 예쁘다와 같이 어릴 적 품어온 환상이란 건 대부분 허황되고 오래 가지 못하곤 하지만 유리는 이런 식으로 엘프들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부서질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환상이냐니깐? 응?”
“…….”
순간 에시단 황자가 유리의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되물었다. 아까 도자기 깨지는 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던 질문이 저 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눈앞에서 흡사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섬세하고 아름다운 비스크돌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기묘한 이질감에 유리는 곧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별 거 아니야.”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학원 제일의 미녀 카릴 폰 리본첼이 사실은 바탈리온 제국의 3황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단 덜 충격적이었다. 유리는 살면서 이 사실에 깨달았을 때 받은 충격에 버금가는 느낌을 다시금 받을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그보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정확히 말하자면 ‘묻고 싶은 것’이 아닌 ‘따지고 싶은 것’이었지만, 그리고 멱살을 잡으며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계속해서 일고 있었지만 유리는 지금 자신이 반말을 쓰고 있긴 해도 눈앞에 있는 이가 제국의 황자이고 그에겐 최소한의 예를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 중이었다.
“뭔데?”
이런 유리의 노력을 모를 것이 분명한 황자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유리에게 되물어왔다. 이제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에-물건이든 물건이 아니든- 신경 쓰지 않으며 유리가 입을 열었다.
“우선…이 5만 골은 대체 어디서 나온 숫자인 거야?”
유리의 손에서 팔락거리는 물건은 기숙사 게시판에 붙어 여러 방면에서 그녀를 경악시켰던 바로 그 종이였다. 커다랗게 써져 있는 자신의 이름과 5만골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유리에게선 작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금액…….”
“난 아무것도 안 부쉈어!”
유리의 말에 눈을 덱데굴, 굴리며 곤란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 에시단 황자에게 드디어 참지 못한 유리가 멱살을 잡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아무리 저를 특별동 기숙사로 옮기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이런 거짓말을 쓰다니!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려고,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온 유리에게 부서진 벽 너머로 예상치 못하게 끼어든 이가 에시단 황자 대신 유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 5만골은 제가 계산해서 낸 숫자입니다.”
그 예상치 못한 인물은 세디넬이었다.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알 수 없는 그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저를 노려보는 유리에게 눈 한번 깜짝 안하며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유리는 서류 위에 큼직하게 써져 있는, 저도 몰랐던 자신이 부순 물건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담벼락?”
“그렇습니다.”
“내가 언제 담벼락을 부쉈다는 거야! 아니, 애초에 그 담벼락을 힘으로 무너트릴 사람이 있긴 해?”
유리는 어젯밤 제가 넘어야 했던 그 크고 무지막지하게 높은 담벼락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침입자를 막는 보호 마법이 걸려있다는 그 담벼락은 아무리 유리라도 쉬이 깰 수 없을 기물이 아니던가? 게다가 유리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담벼락은 유리가 넘을 때만해도 상처하나 입지 않은 채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저는 당신이 그 담벼락을 무너트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디넬은 손짓으로 유리에게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겨보라 재촉했다. 유리는 얼빠진 얼굴로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당신은 그 담벼락을 파손시켰죠.”
“…….”
“정확히는 그 담벼락에 새겨져 있던 엘프들의 마법과 정령술을 파손시켰죠. 그 담벼락을 넘어올 수 있는 건 ‘이종족’ 뿐. 당신이 아무리 은빛 여우와 함께이기에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종족이 아닌 이가 벽을 넘어 왔기에 새겨진 마법에 부하가 걸리고 이상이 생겼습니다.”
“아니, 무슨 마법이 그렇게 쉽게 부서지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마법이란 지극히 섬세하고 잘 짜여 진 탑 같은 겁니다. 밖에서 공격할 땐 제 능력만큼 버틸 수 있지만 안에서 약점을 찌르거나 수식 자체에 모순이 발생해 버리면 쉬이 붕괴해버리죠. 유리시아, 당신이 저지른 일은 벽에 새겨진 마법의 모순, 그 자체입니다.”
“…….”
조목조목 유리의 잘못을 읊어주는 세디넬의 말에 유리의 입이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설명은 길었지만 마법에 대해선 기초도 알지 못하는 유리로선 세디넬의 설명에 뭐 하나 대꾸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사실 유리는 지금 그의 설명과 더불어 서류의 두 번째 페이지에 적혀 있는 글의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벽을 수리하기 위해선 원래 이보다 더 많은 금액이 요구되지만 몰랐던 보안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기도 했고 당신이 협정의 관계자가 되었기도 하고, 황자님께서도 선처를 구하셨으니 물어야 할 비용을 최대한 깎은 겁니다.”
“…원랜 얼만데?”
유리의 질문에 세디넬이 잠시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더니 펜을 꺼내 유리가 들고 있던 서류 위에 숫자를 적어주었다.그리고 그 숫자를 본 유리의 눈이 순식간에 유리 구슬마냥 동그랗게 커졌다. 앞에 붙은 숫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에 달린 0의 개수에 금액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던 유리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한 이정도……?”
“청소 열심히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독기가 빠져 고분고분한 양이 되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리를 보며 그녀의 옆에 있던 에시단 황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악덕 수금업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으로 세디넬을 바라보는 황자에게 세디넬은 ‘왜 그러십니까?’ 라고 되려 질문함으로써 자신이 제 3자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 전혀 알지 못한 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 주목!”
복도와 휴게실 안에 흩날리던 흙먼지가 모두 가라앉고 몸에 성한 구석이 과연 남아 있을까, 싶은 세디안이라는 조인족이 최후의 저항-“이 폭력 엘프야!”-을 마치고 기절하자 휴게실에 모여 있던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쓰러진 그를 바라보았지만 감히 누구도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목하라니까.”
“…….”
그 원인이 되는 가녀리기 짝이 없어 보이는 엘프가 주먹을 쥐어 우득, 소리를 내자 모두의 시선이 절로 그녀에게 꽂혔다. 물론 유리도 그 모두 중 한 명이었다. 이브릴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침에 이야기했다시피 우리에게 새 인간 조력자가 들어왔다.”
이브릴의 말에 휴게실에 있던 이들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남들의 눈을 꺼리는 유리로선 그들의 시선이 일순 저에게 꽂히자 심장이 크게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유리는 이브릴이 저를 향해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할 때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자기소개를 해줘, 유리시아.”
“…….”
검술부 수업에서도 하지 않았던 자기소개를 이종족들 앞에서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하였다. 특히 10쌍이 넘는 호기심 어린 눈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유리에게 있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유리는 이브릴의 손짓에 따라 무너진 벽의 잔해 위로 올라가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리시아 폰 다리엔입니다. …유리시아, 라는 이름은 기니 유리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사이좋게 지냈으면 합니다.-기절한 세디안을 다시 한 번 힐끗 바라보며 유리는 간절히 바랬다.-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검술부 1학년생이야. 카릴에게 듣자하니 우리들에 대해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니까 서로서로 잘 도와주길 바라. 혹시 질문 있어?”
“나! 나! 나 질문 있어!”
펄쩍펄쩍 뛰며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의 모습에 유리는 화들짝 놀랐다. 여자의 긴 푸른 머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밝은 노란 눈의 검은 동공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고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피부에는 보기만 해도 이질적인 비늘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브릴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질문을 허락했다. 샛노란 넥타이를 매고 책과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재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그녀는 경영학부 2학년 학생이었다.
“나 1학년 때부터 인간이랑 같이 한 방을 쓰고 싶었는데 유리는 음, 사인족이랑 방을 같이 쓰는데 거부감 같은 거 있어?”
“어…아뇨…….”
사인족이 무슨 수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종족과 함께 방을 쓰는 것 자체에 별다른 이견이 없던 유리가 고개를 젓자 초롱초롱, 유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빛내고 있던 그녀가 환호했다.
“신난다! 이브릴, 나 유리랑 같은 방 써도 되는 거지?”
“뭐…그래, 본인인 괜찮다고 하니까 상관없겠지. 다 좋은데 비디아엘, 인간을 너무 괴롭히면 안 돼.”
“안 괴롭혀!”
“또 질문 있는 사람 있어?”
이번에 손을 든 것은 초록색 넥타이를 매고 검과 드래곤의 형상이 수놓인 재킷을 입은 엘프였다. 그는 검술부 3학년 학생이었다.
“우리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고 했는데 얼마나 모르는 거야?”
남자의 질문에 이브릴도 궁금한지 유리를 바라보았다. 이종족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표현할 적절한 수준을 고민하던 유리는 이내 오늘 아침 내내 궁금하던 점을 그에게 묻기로 하였다.
“저기, 책을 읽는 게 왜 엘프들에겐 벌인가요?”
“…거기서 부턴가.”
유리는 저 뒤에서 에시단 황자가 자신의 질문에 소리 죽여 웃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질문이 적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