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들은 모두 적당히 나이가 들면 속독(速讀)을 할 수 있어. 아주 어릴 때부터 책 읽는 법은 부모님이랑 선생님에게 배우거든. 그러니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건 아주 어린 아이 때나 하는 일이지. 아이가 아닌 이에게 책을 읽게 시키는 건 결국 읽는 사람이 소리 내어 책을 읽어야 할 정도로 미숙하다는 걸 지적하는 거야.”
“…….”
남자 엘프의 말에 다른 엘프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이는 걸 보며 유리는 저 처벌 방법이 엘프 외의 종족에게는 썩 훌륭하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이브릴은 다시 한 번 질문이 있는지 다른 이들에게 물었고 이번에는 손을 드는 이가 없자 해산을 외쳤다.
“다른 애들을 한 명씩 소개해주곤 싶은데 이제 슬슬 이 사고를 뒷수습해야 하는데다가 지금 여기 휴게실에 있는 애들이 전부가 아니거든.”
유리는 저들 사이에 리오넬과 엘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간으로 봐선 아마 아직 수업이 다 끝나지 않은 이들이 있거나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애들 수도 많지 않으니 나중에 천천히 본인들에게 소개받도록 해. 아, 방 열쇠는 카릴에게 받도록 하고.”
이브릴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에시단 황자가 유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방 열쇠는 다른 방에 있어. 안내해 줄 테니 날 따라오면 돼. 비디아엘,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해. 난 통금 시간이 되기 전에 유리에게 열쇠를 줘야하니까.”
“앗! 앗! 잠깐만, 잠깐만! 짧게 인사할게!”
이브릴이 해산을 외치자마자 유리와 같은 방을 쓰고 싶어 했던 여자가 눈을 빛내며 다가오고 싶어 하였다. 에시단 황자가 그녀를 막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즉 유리에게 돌진하고도 남을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저기! 난 비디아엘이라고 해! 경영학부고, 올해 2학년이야!”
물론 유리는 재킷에 새겨진 문양과 넥타이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을 비디아엘이라고 소개한 여자에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와와! 인간이 내게 인사했어! 으 역시 작은 인간은 귀엽구나! 인간이랑 같은 방이라니, 너무 좋아! 그럼 있다가 봐, 유리!”
‘정신없다……!’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는 비디아엘을 보며 유리는 과연 그녀와 같은 방을 쓰는 게 좋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편 유리를 잡아끌던 에시단 황자는 무너져 내린 벽을 넘어 복도로 나왔다. 어느새 다가온 세디넬이 조용히 황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를 보던 에시단 황자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발랄하지? 비디아엘은 사인족인데…아, 사인족은 뱀 수인이야.”
“…뱀 수인?”
그래서 몸에 비늘이 붙어 있었구나. 유리는 그제서야 그녀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의 모양도 이해했다.
“응, 뱀 수인. 그녀는 이브릴처럼 인간을 특히 좋아하는 수인 중 한 명이야. 뭐, 교환학생으로 온 이종족들 중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애들은 없지만 그래도 비디아엘은 그 중 상위권에 속하지.”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교환학생으로 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하며 에시단 황자는 찌푸려져 있는 유리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펴 주었다. 펴주는 대로 인상을 풀던 유리는 문득 황자의 손가락이 저보다 가늘다는 걸 깨닫곤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같이 지내긴 불편하진 않을 거야.”
무너진 벽과 깨지고 뒤집어진 휴게실의 물건을 바라보며 유리는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이런 게 특별동 기숙사의 일상인 것인가? 유리는 어쩐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불안한 듯이 몰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리의 모습을 본 에시단 황자가 그녀의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입을 열었다.
“조인족은 원래 바깥이 보이는 탁 트인 공간을 좋아해. 세디안은 특히 조인족 중에서도 성격이 나쁜 편인데다 1학년이라 아직 이 기숙사에 적응을 못해서 난리를 치는 거야. 일단 닫힌 공간에 익숙해지면 이런 난동도 안 부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게 언제쯤인데?”
“글쎄…한 반 년?”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에시단 황자의 말은 유리의 귀엔 앞으로 반 년 간은 기숙사가 부서지는 꼴을 봐야한다는 걸로 들렸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세디넬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가 속삭였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내년부터는 조인족을 교환학생으로 받아들이는 걸 다시 고려해 봐야 할 겁니다.”
“이런, 너무 그러지 마 세디넬. 조인족은 그렇지 않아도 수인들 중에서도 폐쇄적인 성격이라 교환 학생 중에서도 수가 가장 적은 걸?”
“…보고서를 보면 조인족은 매년 닫힌 공간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이런 크고 작은 사고를 쳐 왔습니다. 특히 세디안은 현재 일부 수업도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업까지 거부하고 있단 말에 유리는 저 멀리 보이는 기절한 조인족, 세디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하긴, 야외수업이 아닌 이상 수업도 교실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하는 셈이니 닫힌 공간에 질색하는 이라면 수업을, 아니 교실을 거부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다만 학생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문제가 될 뿐이었다…….
“매번 파손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수가 적은 것에 비해 조인족은…….”
“세디넬.”
유리는 에시단 황자의 홍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하엘이나 다른 아이들이 매번 넋을 잃는 그 아름다운 눈웃음이었다. 다만 세디넬은 다른 아이들처럼 그 눈웃음에 넋을 잃는 게 아닌 다른 이유에서 말을 잃었다. 세디넬의 바라보는 황자의 시선에 유리는 그제서야 에시단 황자가 그를 부드럽게 질책하기 위해 부른 것임을 깨달았다.
“아스테리아 학원의 교환학생 제도는 30년간 지속되어왔어. 조인족이 매번 기숙사를 파손시킨다는 걸 황제께서 모르셨을까?”
“…….”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걸 잊지 않도록 해, 세디넬. 그건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걸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니 말이야.”
“…주의하겠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에시단 황자를 보며 유리는 감탄했다. 한없이 가벼워만 보였던 그가 이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없이 진중하고 사려 깊어 더더욱 놀랐다. 머리위에 단 커다란 리본만 없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황족의 귀감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여태까지 유리가 봐온 에시단 황자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건 무리일 거 같았다…….
“아, 도착했다. 여기야. 이쪽으로 들어와.”
황자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유리는 에시단 황자와 세디넬의 뒤를 따라 이름 모를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이 없어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방은 어두컴컴해서 문을 닫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곧 세디넬이 불을 밝히자 기이한 방의 모습이 유리의 두 눈 안에 들어왔다.
“여긴 관리실이야.”
방 안에는 작은 물건들을 수납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서랍들이 일렬로 늘어져 서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는데 그 아래는 무엇이 있는 건지 서늘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푸른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계단 쪽을 힐끔거리며 그 작은 방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여기선 기숙사 내의 방 열쇠라든가 분실물, 그리고 우편물들을 보관하고 있어.”
“우편물? 설마……?”
“응, 맞아. 엘바니움 제국을 오고가는 거야.”
열리지 않는 서랍을 만져보던 유리가 채 질문을 끝마치기 전에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소파에 앉은 황자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밑에 엘바니움 제국으로 향하는 마법진이 있거든.”
“…….”
“가볍고 작은 물건들을 한 달에 한 번, 무리 없이 옮길 수 있어.”
이동 마법진이라니.
제국에, 아니 이 세계에 마법이 무척이나 희소하고 귀중한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특히 이동 관련 마법은 그 가치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유리는 방금 자신이 무언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 사실을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에시단 황자 때문에 이야기의 경중이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옆에서 차를 끓이고 있던 세디넬도 유리와 같은 생각인 모양인지 찻잔을 집어 들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 좀 하지 마세요. 무게가 없지 않습니까.”
“으응? 뭐 어때? 어제 줬던 계약서에도 적혀 있는 이야기잖아?”
계약서의 한 페이지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던 유리로선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었지만 아무래도 황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방 열쇠야.”
흠 잡을 데 없는 우아한 자세로 세디넬이 타 온 차를 홀짝이던 황자가 역시 세디넬이 서랍 속에서 가져 온 물건을 유리에게 건네주었다. 부드러운 보라색 벨벳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였는데 입구를 열어 뒤집자 작은 은색 열쇠 하나가 유리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이브릴에게 휴게실로 오는 열쇠는 받았지? 거기에도 마법이 새겨져 있으니 이브릴에게서 받은 열쇠랑 같이 잘 보관해야 해.”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데?”
“음, 빚이 좀 더 늘어나겠지?”
“…….”
마법 물품은 신기하고 신비롭기 짝이 없지만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다는 게 단점이었다. 휴게실에서 세디넬이 적어주었던, 제 용돈만으로 갚기엔 어림도 없었던 담벼락의 파손 금액을 떠올리며 유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방 열쇠와 휴게실에 오는 열쇠를 함께 벨벳 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다. 이건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참, 오늘 하루는 어땠어? 리오넬은 잘 다니고 있으니 그리 걱정이 되진 않지만 엘렌은 어때? 잘 적응할 거 같아?”
열쇠를 잃어버리고 하루아침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빚진 빚쟁이가 되서 하엘에게 돈을 빌리는 볼썽사나운 자신을 상상하던 유리는 에시단 황자의 질문에 몸을 딱 굳혔다. 오늘 오전 수업 중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한도 끝도 없었지만 정작 유리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첫날부터 큰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유리는 무슨 말을,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탁자 위의 씁쓸한 아타락샤 산 홍차의 향기만이 계속해서 유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쓸어내리며 유리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응? 뭔데?”
“엘프들에게…결투는 어떤 의미야?”
“어엉?”
사건사고를 감지하는 레이더라도 달린 모양인지 유리의 질문에 에시단 황자의 뒤에 서 있던 세디넬이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유리의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는 에시단 황자와는 다르게 유리를 노려보며 빨리 잘못한 게 있으면 순순히 불라는 기운을 풍기며 유리를 압박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세디넬의 시선을 받는 유리에게 황자가 말했다.
“엘프들의 결투는 서로 간의 우열을 가리고 상하관계를 명백히 하자는 뜻인데 보통은 한 쪽이 죽거나 거의 죽을 때까지 진행되곤 해.”
“…….”
“웬만큼 사이가 나쁘거나 호전적인 성격이 아닌 이상에야 엘프들 사이에서도 결투는 잘 안 거는데……. 어…설마 엘렌이 결투를 했니?”
자신이 설명하면서도 못 믿겠는지 황자가 그 큰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유리가 거기에 쉬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유리의 침묵만으로도 이미 대답을 알았는지 에시단 황자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고 세디넬의 눈에선 불꽃이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겁니까.”
“…….”
얼음장보다 차가운 세디넬의 말에 결국 유리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순순히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스린느 선생이 결투의 내용을 바꿔서 누구 한 쪽이 죽거나 빈사상태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