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여자는 성가시기 짝이 없다.] …라는 말을 누가 했더라?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리본으로 묶여지길 거부한 수많은 긴 금빛 머리카락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그녀가 고개를 기울인 방향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굳이 제 어깨와 목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건드리지 않았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새파란 벽안이 단단한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다기(茶器)에 닿았다. 한 스푼에 금 한 돈은 쥐어야 얻을 수 있다는 최고급 아타락샤 산 찻잎으로 우려낸 짙은 홍차는 붉고 선명하기 짝이 없었다. 그 붉은 홍차가 담긴 찻잔은 대륙 제일의 장인, 마이아가 만든 12개의 역작 중 하나인 티세트, [찰나의 시간] 이었다.
감히 돈으로 액수를 매길 수 없는 영롱한 푸른색과 황금빛이 뒤섞인 찻잔과 그 찻잔에 담긴 금처럼 비싼 홍차를 바라보던 유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그녀가 이 사치의 극을 달리는 찻물에 입도 대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실수를 하여 찻잔을 깨트릴까 봐도 감히 저 금보다도 비싼 홍차에 입을 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단순히 차에서 몹시 쓴 맛이 나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찻잎의 희소성 때문에 아타락샤 산 홍차에서 나오는 쓴맛을 고급스럽다고 평하며 언제, 어디서나 세 명이상 모이기만 하면 저 ‘빌어먹을’ 차를 즐겨 마셨지만 부모님과 집사의 눈도 없는데다 하물며 격식 있는 자리에 온 것도 아닌 유리는 자발적으로 나서 제 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취향은 부모님이 아시면 대노하실 ‘귀족답지 않은’ 싸고 적당히 단맛이 묻어 나오는 보급형 베노스 산 홍차였다.
“오, 그녀는 정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리는 30분째 같은 말을, 혹은 비슷한 말을 늘어놓으며 기숙사 방을 왔다갔다하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한 자신의 소꿉친구가 제 취향의 홍차를 알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아니, 그 이전에 그가 베노스 산 홍차의 존재는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웃을 땐 또 얼마나 빛이 나는지!”
금이 발에 채인다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가넥스 상회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하엘은 가넥스 부부가 늘그막에 얻은 아이라 그런지 퍽 애지중지 길러졌다.
‘사실 애지중지한다는 말도 좀 약하긴 하지…….’
유리는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도 과거, 주최자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파티에서 ‘아들을 굉장히 아끼시네요.’ 라는 어느 귀부인의 말에 수줍게 볼을 붉히며 ‘누구나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나요? 부모마음이란 다 그런 거겠죠. 전 제 아이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들을 제공하고 싶답니다.’ 라고 대답한 가넥스 부인, 즉 하엘의 어머니의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엘의 가문, 가넥스는 웬만한 귀족들보다도 돈이 많았기 때문에 하엘은 정말로 부인의 말처럼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지냈던 것이다. 귀족인 유리조차 가질 수 없는 고가의 물건을 하엘은 애교 한 번으로 턱턱, 부모님에게서 얻어내곤 하였다.
“그 어떤 보석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할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유리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생일 파티 때마다 가장 먼저 초대장을 쥐는 권한을 얻었던 유리는 하엘이 부모님에게서 받은 수많은 선물들 중 레드 다이아몬드, 알렉산드라이트 등등 소국의 왕들도 가지기 힘든 진귀하고 값비싼 보석들이 꼭 섞여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 그는 이 학원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보석들을 보고 자라왔을 것이다.
부모님을 조금만 조르면 하엘은 언제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왔다. 유리는 그가 가넥스 상회의 후계자답게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과 동시에 그가 몹시 유치하고 응석받이란 사실 역시-슬프게도-알고 있었다.
그런 소꿉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그러니까 그녀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가지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유리는 강제로 타의에 의해 지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진귀하다면 진귀하고 지겹다면 또 지겨운 장면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오, 물론 평범한 보석이나 꽃다발은 안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니 고국에서도 값비싼 선물 같은 건 많이 받아 봤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부모님이 강요하는 신부수업 및 사교활동을 피하기 위해 이 아스테리아 학원에 입학할 때만해도 유리는 친구의 이런 멍청한, 그리고 한심한 모습을 보기되리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사랑에 빠진 친구의 혼잣말을 들어주기.’ 는 그녀의 자유로운 학원 생활엔 없던 계획이었다.
다 식어 빠진 홍차에 손을 대는 대신 유리는 찻잔 너머에 보기 좋게 놓여 있는 달콤한 과자에 손을 뻗었다. 하엘조차 아타락샤 산 홍차를 즐겨 마신다는 건 기운이 빠지다 못해 실망스러웠지만 고급스러운 걸 당연한 듯이 즐기는 그에게 있어 홍차와 과자의 가격은 거의 동등했고 비싼 값을 하는 것만큼 과자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달았다. 유리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과자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난 말이야, 그녀가 날 특별하다고 여겼으면 좋겠어. 다른 놈팽이들보다 훨씬 더 잘나고 다정하고 뛰어난 사람이란 걸 알아줬음 좋겠단 말이야?”
마침내 장장 30분이 넘는 긴 연설 끝에 유리의 맞은편에 털썩 앉은 하엘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의 없게 손가락에 붙은 과자가루까지 핥아 먹던 유리는 친우의 진지한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최면술사를 고용해 그녀에게 최면을 걸지 그러니?”
가넥스의 돈이라면 없는 최면술사도 나타나게 만들 것이었다. 제 딴에는 제법 진지하게 한 말이었지만 하엘은 유리의 말이 장난인줄 아는 모양인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경청했지.”
“…….”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곳, 손이 닿은 물건, 입에서 나온 목소리, 그 모든 걸 지켜봤어.”
유리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의 혀끝에서는 ‘스토커’, ‘미쳤냐?’, ‘징그러!’ 등등 따위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유리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정확히는 마지막 친구로서의 도리로 그 말만은 꾹 참으며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만큼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뻔뻔스런 철면피를 소유한 하엘은 유리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말든 제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그 곱디고운 입에서 말한 거야!”
[학원의 동쪽 숲에 산다는 신비한 은빛 여우가 보고 싶어. 하, 누가 내게 이 여우를 잡아만 준다면 당장에 내 몸과 마음을 바칠 텐데…….]
마치 그녀가 직접 말하던 걸 재현이라도 하듯이 두 손을 곱게 가슴위로 올리고 시선을 살짝 기울여 하늘 위로 바라보는 하엘을 보며 유리는 다시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것은 옛날부터 그녀가 표정관리에 서투른 탓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표정을 관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본첼 영애가 그렇게 말했다고?”
유리는 하엘이, 아니 온 학원의 남자들이 푹 빠져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유리가 아는 리본첼 영애는 절대로 남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그랬다니깐!”
유리는 하엘과 자신이 지금 같은 인물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그 사이 좋아하는 사람이 바뀐 건가?’
희박하지만 지금 이야기 하는 걸로 봐선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유리의 의심스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하엘은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자.”
“……?”
아니, 어디 신경 쓰지 않을 뿐인가? 하엘은 유리에게 튼튼한 그물망이 달린 긴 채집채를 건네주기까지 하였다. 유리가 하엘이 건넨 채집채의 의미를 깨닫는데는 조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야, 너…….”
마침내 그 의미를 깨달은 유리의 안색이 희게 질렸을 때도 하엘의 의기양양한 얼굴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철부지 도련님의 자신감이, 아니 실제로도 여지껏 바라는 것은 뭐든 손에 넣어 온 하엘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은빛 여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동쪽 숲으로 가자, 유리시아! 은빛 여우가 우릴 기다려!”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멍청아!”
결국 유리는 꾹꾹 참아 눌렀던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채집망을 바닥으로 집어 던진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소리쳤다.
“그럴거면 그냥 사람을 구해서 잡으라고!”
“본인이 잡지 않고 사람을 쓰면 무슨 의미가 있어!”
“날 쓰는 건 의미 있는 일이고?”
유리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못해 코웃음이 나왔지만 하엘의 마음은 완강했다.
“너는 내 친구잖아! 친구는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도와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 도와줘야 할 목록에 네 연애를 위해 통금시간을 어겨가며 여우를 잡는다는 선택지는 어디에도 없거든!”
“…이거 도와주면 올해 여름 방학은 우리 집에서 머물 게 해줄게.”
매섭게 하엘을 바라보며 ‘절대 안가!’ 라고 외치던 유리의 냉정한 눈이 그의 제안에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유리의 안에서는 이대로 하엘을 모른 척하고 방학 동안 집에서 예절교육을 받는 것과 하엘을 도와주고 방학 동안 편히 하엘의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 사이에서 맹렬한 갈등이 서로 대립하며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인의 아들답게 영특하고 총명한-그리고 유치한-하엘이 내놓은 조건은 유리의 마음에 쏙 들어 마지않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하엘을 돕는 것에 찬성하였다.
“좋아. 하지만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둬.”
접시 위에 올려진 마지막 과자를 집어 들며 유리가 딱 잘라 말했다.
“그 여우, 듣자하니 엄청 빠르다던데.”
“뭐, 그거야 나보다 달리기가 빠른 네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그 발언에 유리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금 난생 처음으로 가넥스 상회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내 선물에 기뻐할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군……. 자, 가자 유리! 내가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가장 먼저 너에게 청첩장을 보내줄게!!”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스프부터 들이킨다는 건 바로 이 놈을 보고 하는 말을 것이다.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운차게 창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하는 하엘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에 빠진 남자도 귀찮다.
이름 모를 옛사람의 말을 고쳐 쓰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보름달의 빛이 너무 밝았다. 왠지 모르게 긴 밤이 될 것 같다고 유리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