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릴 폰 리본첼.
하엘 가넥스가, 아니 아스테리아 학원의 대다수의 남자들이 반한 여자의 이름이었다. 마력을 품은 새하얀 꽃이 피어난다는 신비한 북쪽의 작은 왕국, 사타리안에서 온 이 백작 영애는 입학식 때부터 한 송이의 가련한 백합 같은 모습으로 신입생들, 상급생들을 가리지 않고 학원 내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유리 역시 자신의 입학식 때부터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이 아름다운 영애에 대해선 남들이 아는 만큼은 알고 있었으나 특별히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지도, 조금 더 나서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오늘 리코타 샐러드를 먹었어.”
유리는 주머니에서 하엘의 방에서 챙겨 온 간식을 꺼냈다. 그것은 그녀의 부모님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달고 살찌기 쉬운, 맛있는 과자였다.
“그런데 토마토를 먹으면서 그녀가 새침한 얼굴로 건포도를 걸러내는 게 아니겠어? 아아,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절대 눈치 채지 못했을 거야. 리본첼 양이 건포도를 싫어한다니…….”
유리는 앞서서 메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밟고 나아가는 하엘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자의 식감이 그녀의 기분을 한층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그녀가 싫어하는 건포도 따윈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었을 텐데……. 아, 또 그거 알아? 그녀는 말이야…….”
사랑에 빠진 친구를 옆에 두다 보면 굳이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 특히 그 친구가 돈도 많고 인맥도 웬만한 귀족 자제들보다 빵빵하고 권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었다. 유리는 그저 옆에서 친구, 하엘의 푸념을 듣기만 해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리본첼 영애에 대해 더욱 많고 풍부하고, 그리고 쓸데없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리본첼 영애가 건포도를 싫어한다던가 등의 사실을 말이다.
정말이지 쓸모없고, 필요도 없는 정보였다.
‘나라면 누가 나를 감시하거나 관찰한다면 기분 나쁠 거 같은데…….’
무신경한 것인지 사람이 좋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워낙 많이 겪은 일이라 익숙한 건지……. 남들의 시선에 예민한 유리와는 다르게 리본첼 영애는 남들의 끈질긴 시선과 구애와 관심에도 매일 같이 생글거리며 다녔다. 얼핏 보면 그녀는 남들의 이목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익숙한 거겠지만.’
유리는 제 3가지 가설 중 마지막 것이 가장 그럴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외모니까.’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게 예쁜 것이나 아름다운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그녀조차도 입학식에서 리본첼 영애를 본 순간 넋을 잃었었다. 어디에서도 돋보이는 존재감.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도, 복도에서 스쳐지나갈 때도 그녀는 항상 유리의, 아니 곁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강탈했다.
“…이번에도 도서관에서 수예 잡지를 빌려가더라니깐? 저번엔 제빵책이었는데. 아아, 뭐든 좋으니 그녀가 수제로 만든 것들 중 하나라도 가져보고 싶다…….”
“…불쌍하네.”
이 학원 내에서 잠시라도 그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엘 같이 설레발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리본첼 영애도 참 피곤하겠다 싶었다.
“응? 뭐라고 했어 유리?”
“리본첼 영애가 불쌍하다고 했어.”
혹시라도 지나가는 은빛 여우를 발견할까 싶어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유리가 속삭였다. 보름달이 밝은 밤은 은빛 여우의 활동량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오늘은 유달리 달빛이 강하니 여우를 발견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지도 몰랐다.
“매일 같이 관찰 당하는데다 뭘 하기만 하면 소문을 타니 영애는 아마 재채기도 마음대로 못할 거야.”
“…어, 그건 그렇겠네.”
정말 리본첼 영애가 재채기를 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 하엘이 머리를 긁적이며 유리의 말에 긍정했다.
“그래도 난 그녀에게 나쁜 짓 하는 건 없어. 지극히 무해하고 영애를 좋아할 뿐인 남자라고!”
“그런 말을 할 거면 스토커짓부터 그만두지 그래?”
“…….”
유리는 정말이지 친구를 가리키는 대상으로 ‘스토커’ 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진 않았지만 자신이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하엘의 주장에 저도 모르게 가시 돋힌 말이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정말 스토커 같은걸.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징그럽단 말을 꺼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친구의 도리는 다했다고 여기곤 말을 계속하였다.
“사교계에서도 무해한 스토커 같은 건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애초에 대체 어딜 봐서 네가 무해하다는 거야?”
핵심을 꿰뚫는 유리의 말에 하엘은 할 말을 잃어버렸는지 멍청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제법 충격 받은 얼굴로 고뇌하던 그는 마침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좋아. 내가 한 짓은 찌질한 스토커들이나 할 법한 일이야.”
잠시간 넋을 잃은 하엘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유리는 그가 금방 정신을 수습해서, 그리고 자기가 한 일을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상 친구의 스토커 짓은 옆에서 지켜보는 그녀도 힘들었다….
“이번에 은빛 여우만 잡은 후에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스토킹하지 않을게.”
“…그리고 하루 종일 나에게 그녀에 대해 떠들지 않는 것도.”
“야! 그것까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해?”
목소리를 낮추라느니 너는 너무 매정하다느니 같은 말들로 투닥거리며 풀숲을 해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들 사이로 순간 높고, 애처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은빛 여우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았어도 서로를 바라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리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빠르게 방향을 틀어 뛰어갔다.
“으악! 잠깐만, 야! 기다려! 같이 가!!”
뒤에서 하엘이 절박하게 소리치며 따라왔지만 평소 땀나는 게 싫다고 제대로 된 운동도 하지 않는 그가 검술부인 유리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곧 하엘의 목소리는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묻혀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난 나뭇가지들과 긴 풀들을 헤치고 나아가던 그녀는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대로 꽉 잡아! 놓치면 안 돼!”
‘이게 대체…무슨…….’
그물에 갇힌 흰 털의 여우 한 마리를 감싼 한 무리의 남학생들을…….
“하하, 드디어 이걸로 여신님에게 고백할 수 있어!”
“크흑. 얼마나 힘들었던 시간인가……. 하지만 우린 해냈어!!!”
유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들도 하엘처럼 리본첼 영애의 환심을 사기 위해 통금시간을 어기고 출동한 멍청이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