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디넬은 이제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인 사람처럼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유리는 어쩐지 그런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은 첫째로 에시단 황자는 본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한 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날 봐봐! 도자기 장인이 만든 비스크 돌도 나보다 예쁘진 않을 거라고!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나와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겠어? 아마 신이 다른 인간들을 대충 하룻밤 만에 뚝딱 만들었다면 나는 열흘 밤낮을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거야!”
…그의 외모와 비례하는 잘난 척이 황자로서의 품위란 품위는 모조리 깎아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세디넬이 손으로 이마를 짚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럼 그 때부터 여자처럼 하고 다녔다는 거야?”
“물론이지.”
질문을 던진 유리를 향해 자랑스럽게 콧대를 세우며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자는 자신의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름다운 걸 보는 일이고 예쁘게 치장한 나보다 아름다운 건 없는 걸? 너도 내가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입학식 때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본 경험이 있는 유리는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우습게도 지금 그가 말하고 있는 명제 ‘에시단 카릴 라 바탈리온은 아름답다.’ 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명제만큼이나 참이었다.
“…황녀님께서 이 일의 시초인 게 믿어지지 않는 군요.”
“아, 그건…뭐 누님도 처음에는 남자인 내게 여자 옷을 입힌다는 게 양심에 찔려하시는 거 같더라고. 하지만 내가 봐도 드레스를 차려입은 내가 눈 돌아갈 정도로 예뻤는데 누님에겐 어땠겠어? 누님도 눈이 있으니 계속 내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정말…믿어지지…않는군요…….”
유리는 세디넬이 이를 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 눈앞의 사람 한 둘쯤은 간단히 태워죽일 수 있는 빛이 나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시단 황자도 그런 그의 흉흉한 안광의 기운을 느꼈는지 세디넬과 눈을 마주치길 피하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누님께선 나를 만족시킬만한 수준 높은 장신구와 드레스가 충분히 있었고 덕분에 내 유년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지…….”
그런 그를 옆에서 보좌해야하는 세디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결국은 들통 나서 황성에는 있을 수 없게 됐지만.”
“누구에게 들켰는데?”
“폐하께.”
“…….”
그거 가장 들키면 안 될 이에게 들킨 거 아닌가? 유리는 오늘 아침식사는 무얼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을 꺼내는 황자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 정말 괜찮을 걸까……. 유리는 생각했다.
“아하하, 그게 간만에 예쁘게 차려입어서 이대로 산책을 가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재수 없게도 폐하께 딱 걸려버리고 만 거야. 황자의 모습일 때랑 여장했을 때랑 분위기가 꽤 달랐는데 어떻게 한 번에 눈치 채신 건지 참…….”
“그럼, 황자님 황성에서 나가 그간 수도 외각에서 숨어 지내신 이유가…….”
“아, 너한테도 말 안했었나? 그거 폐하께 들켜서 그랬어.”
“…….”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지 흡사 야생 부엉이처럼 눈을 크게 홉뜬 세디넬에게 황자가 웃으며 말했다.
“황실의 권위를 떨어트리니까 더 이상 여장을 하지 않을 지 아니면 밖에 나가 조용히 없는 듯이 숨어 살며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정하라 하시기에 나는 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걸 포기할 순 없다고 했지. 보다시피 이런 외모를 꾸미지 않고 썩히는 건 낭비잖아?”
이제껏 3황자가 어째서 공식석상에, 아니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 지 알 수 없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유리는 차라리 세간에서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이 더 신뢰성이 간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을 닫았다.
“어차피 황위에는 관심도 없고 예법 따지며 사는 게 귀찮다고 생각한 참이니 옳다쿠나, 하고 나왔지. 뭐, 이 비밀을 아는 게 가족 중에서는 폐하랑 누님밖에 없어서 황성을 나갈 때 어머님은 좀 의아해하셨지만 그대로 황명이니 말리진 않으셨어.”
“자, 잠깐…잠깐만요! 그럼 아스테리아 학원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간다고 나서셨을 때는요? 저는 황자님께서 황성 밖에서 숨어 지내심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하셔서 마침내 그 성과를 폐하께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도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던 겁니까?”
“어…….”
세디넬의 비명과도 같은 말에 에시단 황자가 멍청하게 눈을 잠시 깜빡이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폐하께 임무를 받으셨다 하시기에 저는 당연히 당신의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음, 그런 거 아냐. 어머니께서 폐하께 내가 뭘 잘못했기에 황성 밖으로 내보냈냐고 물으셨나봐. 폐하는 어머니에게 내가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고 말했는데 거짓말을 한 게 싫다면서 진짜로 날 비밀 임무에 보내신 거야.”
“…….”
“마침 나이도 딱 학원에 입학해도 좋을 나이인데다 마법에 재능도 있었으니 비밀 협정의 협력자가 되기에도 좋은 조건이잖아? 조건도 되고 난 여전히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수 있고 폐하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고 일석 삼조인 셈이지!”
세디넬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게 얼굴에 보였지만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니, 어쩐지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 세디넬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혹 그도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에시단 황자는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럼 궁금한 건 그게 다야?”
“…하나 더 있는데.”
“뭔데? 뭐든 물어봐!”
세디넬을 한 번 힐끔 보던 유리가 다시 시선을 에시단 황자에게로 고정시켰다. 유리의 머릿속에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리본첼 영애에 대해 줄줄이 떠들어 대며 들떠 있던 하엘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이기적이고 뻔뻔한데다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유일하게 함께 보내 준 소꿉친구였다.
“너는 네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싶어서 여장을 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거잖아. 내 친구를 포함해서 이 학원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를 여자라고 알고 있어. 실제로 네가 머무는 곳도 특별동의 ‘여자 기숙사’ 이기도 하고…….”
그런 친구가 거짓말도 이런 보통 거짓말이 아닌 일에 꾀어들어 속고 있는 사실을 안 이상 머릿속에 떠오른 이 생각을 무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리가 말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네가 받은 임무는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을 속여 가면서까지 여자인척하고 너를, 아니 리본첼 영애를 좋아하고 숭배하는 이들의 마음을 농락할 필요가 있을까?”
다행히 학기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즉, 누가 학원을 자퇴하고 편입해도 전혀 이상한 시기가 아니란 뜻이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동안 하엘이 리본첼 영애에게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과연 그녀를 쉬이 잊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카릴 폰 리본첼은 가상의 인물이다. 유리는 하엘의 상처는 시간이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에시단 황자에게 리본첼 영애의 모습을 버릴 걸 권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도덕적인 기준으로 봐도 유리는 자신이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에시단 황자도 양심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계속해서 학생들을 속일 리 없을 것이다, 라는 게 유리의 생각이었지만…….
“…싫은데?”
에시단 황자는 양심이 없었다.
“애들이 ‘카릴 폰 리본첼’ 을 숭배하고 여신처럼 여기는 건 알고 있는데 그건 내가 부탁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 적도 없는 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여장을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가 여장을 하는 건 지극히 예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내 취미일 뿐이야. 누구에게 피해를 주거나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이 학원에서 리본첼 영애에게 홀딱 빠진 사람이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 네가 모습을 속였기에 일어난 일인 거잖아. 그리고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잊어버렸어? 네 한 마디에 그 잡기 힘들다는 은빛 여우를 붙잡기 위해 몇 명이나 기숙사를 빠져나왔는지 알아?”
“오, 유리. 너는 지금 내가 나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 질문에 대답해 봐. 너는 내가 남자였으면 학원 내의 다른 사람들이 내게 더 이상 반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
유리는 그 질문에 곧장 ‘아니.’ 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를 여자라고 여겼을 때도 유리는 저 빛나는 외모에 홀딱 시선을 뺏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모에 흥미가 없는 그녀의 시선으로 봐도 에시단 황자의 외모는 눈부실 지경이었다. 빛이 닿기라도 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금실 같은 고운 머리칼에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보석 같은 홍안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신성함마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남자로서 활동한다고 해도 유리는 그에게 더 이상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당연하지만 ‘아니오’ 였다.
유리는 자신도 그의 외모에 넘어갈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은 그러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가 없었다. 좋든 싫든 간에 그의 외모는 사람을 잡아끌었다. 숭배할 사람은 얼마든지 다시금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받들어 모실 것이다.
“그리고 저 은빛 여우 말인데, 내가 애들한테 시켜서 잡아달라고 한 거 아니야! 난 그저 은빛 여우가 보고 싶다고 했고 그것도 리오넬이랑 세디넬에게만 말했었어! 네가 왜 여기에 있게 됐냐고? 그걸 묻고 싶은 건 오히려 나야! 저 두 사람이 내가 말한 걸 남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성격은 절대 아닌데 네 친구들은 대체 어떻게 내가 한 말을 듣고 은빛 여우를 잡은 거야?”
아주 정확하고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하엘의 멍청한-그리고 징그러운-스토커 짓을 아는 그녀로서는 입이 백 개가 있어도 그에게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내가 나를 꾸미고 싶은 건 평범하진 않아도 엄연한 취미의 한 종류일 뿐이야. 여자로 변장하고 있는 건 내 취미를 다른 이들이 곱게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고. 딱히 이 모습으로 사람들을 홀리거나 농락할 생각은 없어. 남자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받들어지는 건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너는 달여우가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주변의 인간들이 네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가던 황자는 두 친구의 폭로에 화들짝 놀라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꾹 누르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이미 그들의 말은 쏟아져 유리의 귀에 들어온 후였다. 유리는 못미더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였다. 따가운 그녀의 시선에 황자가 어색하게 입술 끝을 끌어 올려보였다.
“하하, 그러니까…음…이건 내 외모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본 거랄까……. 아니 사실 진짜로 누군가 은빛 여우를 잡아 기숙사 벽을 넘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
유리 역시 본인이 그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었지만 원인이 된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으, 양심에 찔릴 만한 나쁜 짓은 안 할 테니 너무 화내진 말아줘. 다음부턴 나도 가급적이면 말을 조심할 테니까.”
그 말에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유리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 소꿉친구의 부끄럽기 짝이 없는 스토커 짓을 떠올려 버린 그녀는 황자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