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에시단 황자였다.
“자,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그만 네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경비병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통로를 알려줄 테니까 그 쪽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배웅해 줄게. 분명 특별동의 여자기숙사와 남자기숙사 사이에 길이 있었던 거 같은데…….”
“…황자님.”
“아, 아까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는데 특별동의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 건물은 서로 떨어져 있는 걸로 보이지만 마법으로 인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기숙사 내에 관계자가 나랑 세디넬, 둘 뿐인데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도움을 주기 어렵잖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몸은 이곳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머무는 곳은 특별동의 남자기숙사란 말씀!”
“에시단 황자님!”
신이 나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를 가로막은 건 여지껏 충격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던 세디넬이었다. 어느새 정신적인 충격에서 회복되었는지 유리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에시단 황자를 붙잡은 그는 그녀를 향해 고급스런 깃펜과 두꺼운 양피지 더미를 건네주었다.
“다리엔 영애는 이 계약서에 전부 사인을 하기 전까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건네받은 서류는 어찌나 양이 많던지 양손에 들려진 무게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휘청 일 뻔하였다. 유리는 제 손에 들린 종이 위의 글씨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인간과 이종족의 원만한 관계를 위한 계획이 담긴 비밀 협정과 비밀 협정의 관계자가 지켜야 할 504가지 규칙…….”
제 눈을 의심한 유리는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가 다시 뜨곤 종이의 맨 위에 적힌 글씨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종이 위에 적힌 활자는 유리의 바람대로 변하지도 지워지지도 않은 채 그녀가 읽은 그대로였다.
세상에.
그녀는 기가 막혀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54가지도 아니고 504가지라니! 설마 이걸 전부 다 외워야 하는 걸까? 유리가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겨보니 거기엔 실제 바탈리온 제국과 엘바니움 제국이 거래를 했던 협정의 내용과 협정의 관계자가 지켜야 할 자잘한 규칙들이 적혀 있었다.
대충 눈으로 훑어보면 협정과 학생들의 정체에 대한 비밀 엄수와 그들의 안전에 대한 내용이 대다수였고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만약 위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비밀을 발설했을 때 얻는 위약금과 패널티였다. 채 한 줄도 되지 않게 짤막히 적힌 규칙들은 유리가 납득할만한 것들도 있었지만 ‘조인족과 묘인족을 결코 한 방에 배치하지 않는다.’ 와 같은 이해 못할 규칙들도 있었다.
“황자님, 아니 카릴의 정체도 발설하면 안 된다고?”
아니, 어디 그 뿐이랴. 협정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규칙들도 보였다. 계약서의 이름을 그냥 유리시아 폰 다리엔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지켜야 할 504가지 규칙으로 바꿔야하지 않을까? 유리는 생각했다.
“…이미 황자님께서는 정체를 감추고 입학해 버리셨으니까요.”
본인도 넣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세디넬이 말했다.
“황자님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큰 소동이 벌어질 겁니다. 왜 모습을 감춘 3황자가 이런 모습으로 학원에 있는지에 대한 조사가 귀족들 사이에 비밀리에 벌어질 지도 모르고요.”
세디넬의 설명에 납득한 유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구었다. 문득 학원을 다니는 4년간은 관계자로서 교환 학생들의 학원 생활을 돕고 보호하는데 힘쓸 것이며 졸업 후에도 반드시 이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 라는 규칙을 읽던 유리는 고개를 들어 세디넬을 바라보았다.
‘졸업 후까지라고?’
깐깐한 세디넬의 성격상 분명 유리가 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종이를 치워버릴 것 같은데 졸업 후까지라니? 유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 계약서의 규칙을 전부 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설사 외웠다 하더라도 졸업 이후까지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유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친 세디넬은 놀랍게도 고작 눈빛만으로 유리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아채곤 바로 대답해 주었다.
“예, 그렇습니다.”
“…….”
“규칙은 전부 외우고 계셔야 합니다.”
유리는 이대로 그냥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싶었다. 차라리 이 모든 걸 꿈으로 취급하면 이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그들에게서 미친년취급은 받겠지만 504가지나 되는 끔찍하게 많은 규칙을 외우기 위해 공부하는 것보단 나았다. 유리는 암기 과목에 약했다…….
“아,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부분은 비밀을 지켜야 한다! 뭐 이런거고 정말 중요한 건 50개 정도 밖에 안되니까…….”
“50개나…….”
외워야 할 게 10분의 1로 줄어든 건 좋았지만 여전히 골치가 아프다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거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유리의 얼굴에 에시단 황자가 펄쩍 뛰며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외우고 있으니 모르는 게 있으면 도와줄게!”
“규칙에는 이종족 간의 관계 도나 생활양식에 관한 부분도 있다. 그 부분은 인간에겐 낯선 부분일 테니 내가 도와주겠다.”
“…고마워요.”
얼굴은 무표정한데 머리칼 사이로 솟은 검은 귀가 쫑긋거리는 리오넬의 모습에 유리는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어릴 적 저택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 받을 때,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단 이유로 부모님에게 이런저런 벌을 받은 기억이 떠올라 속에서부터 올라왔던 불안감이 저 복슬복슬한 귀 덕분에 가라앉은 것이다.
‘역시 한 번쯤 만져보고 싶다…….’
언젠가 친해지면 부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유리는 역시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엘렌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유리의 인사에 엘렌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인간은 부족한 점이 많은 생물이라 한데 뭉쳐 살고 있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 부족한 점중 암기력이 좋지 않다는 게 포함되어 있는 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고 우리가 협력 관계에 있는 이상 둘 중 더 뛰어난 이가 도와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
그러고 보니 저 엘프, 아까도 자신의 턱을 가지고 쉽게 부서지느니 어쩌느니 했었던 것 같다. 유리는 그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인간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는지 의아해졌다.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에시단 황자가 속삭였다.
“저런 고정 관념이나 지식을 고쳐주는 것도 관계자가 해야 할 일이야. 아, 그리고 저 말투도 가능하면 고치는 게 좋을 거 같아…….”
말없이 긍정하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엘렌과 조금 더 친해지면 이곳에 오기 전에 대체 누구에게 인간에 대해 배웠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