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녀와 사랑에 빠지건 말건 관계없어!”
분해하는 하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유리는 저를 노려보고 있는 하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지간히도 특별동을 청소하는 벌을 받은 유리가 부러웠는지 콧김을 씩씩 뿜으며 괜시리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든 감탄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너도 리본첼 영애가 지나갈 때면 시선을 떼지 못하잖아!”
“…뭐, 그건 그렇지만.”
실제로 리본첼 영애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유리는 그의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엘이 말하는 리본첼 영애의 성격이나 마음씨는 의심해 볼 수 있어도 그가 찬양하는 그녀의 외모만큼은 유리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너는 그런 그녀의 외모를 매일, 실시간으로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데 어떻게 네가 우리 중 가장 낫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 너는 이 벌을 받은 거에 불평할 자격도 없는 거라고!”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야박하다고 생각했지만 하엘은 그녀가 지난 밤 맺은 504가지나 되는 규칙에 관련된 계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말다툼을 이어나갔다간 실수로라도 계약에 대해 슬쩍 말을 흘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젠장! 분해! 완전 분해! 나도 특별동 청소하고 싶다!!”
복도를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치는 하엘을 미친 사람처럼 바라보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유리와 자신의 벌을 바꿀 수 있을 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말이야.”
같이 지내 온 세월만큼 그의 머릿속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던 유리가 덧붙였다.
“내게 부탁해서 몰라 벌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해……. 어제 들어가 봤는데 기숙사 내부나 외부나 경비가 장난 아니더라.”
물론 기숙사 내부에도 경비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하엘은 유리의 말을 순순히 믿었는지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리에게 부탁하는 방법 역시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특별동 관리자들에겐 뇌물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한담?”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싫어.”
현실적인, 그리고 친구를 위한 사려 깊은 충고를 던지는 유리를 향해 하엘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차라리 나도 너처럼 건물 안으로 숨어들어 똑같은 벌을 받는 게 낫겠어!”
“너한텐 담벼락이 너무 높을 걸…….”
“상관없어! 필요하다면 오늘부터 운동이라도 할 거야!”
결의에 불타 이글거리는 하엘의 눈동자를 보며 유리는 에시단 황자에게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충고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담벼락의 마법을 다시 고쳐 쓰던가…….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하엘이 정말로 기숙사에 침입해 그녀처럼 504가지 규칙이 적힌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로 그 담벼락을 넘을 생각인 건지 아니면 관리자를 매수할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여러모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하엘과 함께 유리는 기숙사 식당으로 들어갔다.
“저기 봐…….”
“게시판에 붙어 있던 애들이야.”
아스테리아 학원을 다니는 학생은 크게 특별동에 머무는 학생들과 일반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렇게 생활하는 곳이 나뉘어져 있는 이들도 식사는 모두 기숙사 식당에서 함께 먹었다. 그리고 유리는, 과장하지 않고 말 하건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일반 기숙사 학생들, 그러니까 인간들의 시선과 특별동 기숙사의 학생들-이종족들의 시선을 동시에 느꼈다.
“저 옆에 보여? 갈색 머리 옆에 있는 금발 머리 여자애……. 쟤가 그 특별동 기숙사 안에 들어간 애래.”
“…대단하다. 경비가 삼엄할텐데 대체 어떻게 들어갔데?”
시선만으로 사람의 몸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면 온 몸이 치즈처럼 구멍이 송송 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리는 앞을 보지 못하고 기둥을 향해 돌진하는 하엘의 뒷덜미를 잡고 이동했다. 그녀가 식사를 가져가 빈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그들의 시선은 끈질기게 유리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와 저를 향해 힐끔힐끔 돌아보는 눈빛들.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에 속이 거북해진 유리는 맛을 알 수 없는 질긴 종이 같은 질감의 토스트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이대로 계속 식사를 했다간 분명 체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제 몸 상태를 잘 아는 유리는 물만 홀짝이며 하엘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렸다.
“먹어둬.”
토스트에 먹음직스럽게 마멀레이드 잼을 듬뿍 바르던 하엘이 언제 상념에서 빠져나왔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기숙사 게시판 앞에 이름이 붙어 있었잖아. 게다가 넌 그 난공불락의 특별동 기숙사에 침입한 사람이라고. 주목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런다고 속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유리가 여전히 식사엔 손도 대지 않자 하엘은 그녀를 향해 직접 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를 나눠주었다. 물론 유리는 그것이 전혀, 손끝만큼도 반갑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부모님의 원수인 양 토스트를 노려보는 유리의 모습에 하엘은 딱 잘라 말했다.
“안 먹으면 우리 집에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
유리는 기가 막혔다.
“…너 남은 학기 내내 날 그렇게 협박할 거니?”
“네가 먹지 않는 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빨리 먹어. 남들의 시선 받아보는 게 어디 이번이 처음이야?”
아무리 그래도 유리는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게 싫었다. 이건 하엘이 얼마나 협박하고 괴롭힌다 하더라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방학 동안 집에 가기 싫은 유리는 하엘의 토스트를 받아 들었다. 잼의 지독한 단맛이 그녀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고 있긴 했다. 조금이지만…….
“자, 그보다 우린 중요한 과제에 직면해 있어.”
입 안에 가득 담긴 토스트를 우물거리느라 유리는 하엘에게 무슨 과제냐고 질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물을 찾는 사이 하엘은 잔뜩 들뜬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게시판에 붙은 부당한 벌의 내용 때문에 물어보는 걸 잊고 있었는데 그래서?”
“…뭐가 그래서인데?”
겨우 물과 함께 입 안 가득 담긴 토스트를 삼킨 유리가 물었다.
통금시간을 어긴 것 치고는 벌의 내용이 전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유리는 그 부분을 굳이 꼬집진 않았다. 하엘은 이미 자신이 아닌 유리가 특별동 청소를 맡은 데서부터 그가 받은 벌을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물었다간 리본첼 영애를 곁에서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럽고 즐거운 일인지에 대한 찬미의 말들을 듣게 될 게 뻔했으므로 유리는 제게 던져진 질문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아니 내가 왜 저런 부당한 벌을 받으면서까지 한밤중에 밖에서 뛰어다녔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리본첼 영애 말이야!”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하엘의 말에 아까보다 집중되는 시선이 양이 더 늘은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이 수많은 시선들에 신경 쓰는 건 오직 유리뿐이었다. 유리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하엘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녀에게 여우를 전해 줬어? 내 이름은 말해줬어? 영애가 뭐래? 오, 제발 그녀가 나를 선택했다고 말해줘!!”
어디선가 쨍그랑, 하고 식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가 슬쩍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체격이 좋은, 어두운 적발을 가진 남학생의 뒷모습이 있었다. 유리는 그 남학생이 떨어트린 식기를 주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다는 것에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 그 어디에서 권세 높은 이실도르 후작의 차남이자 검술부의 차기 기대주 레온하트 폰 이실도르의 이런 얼빠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겠는가?
하엘과 그녀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얼굴이 낯익은 학생들이 특히 더 숨을 죽이며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는 도저히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지만 웃는 건 웃는 거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대로 해야 했다. 오, 지금 이 자리에 유리와 하엘, 단 둘뿐이었으면 자신은 제 말 한마디에 백조마냥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그를 실컷 놀려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유리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그녀의 인생에서 하엘의 이런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을 지 의심이 갈 정도로 드문 그의 얼굴을 보며 유리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어렵사리 담벼락을 넘어 기숙사에 침입했지만 아쉽게도 은빛 여우는 리본첼 영애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리본첼 영애는 여우를 받…….”
“좋은 아침이야, 유리.
정확히는 전해지긴 했는데 가져간 사람은 다른 인간, 아니 엘프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난 밤 사인한 두껍고 긴 계약서의 내용과 악마보다 무서운 세디넬의 얼굴을 떠올린 유리가 진실은 저 뒤로 놔두고 그냥 리본첼 영애가 여우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어제 잠은 푹 잤어?”
어깨에 올려 진 부드러운 손의 감촉과 동시에 유리는 코끝에서 간질거릴 정도의 옅은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꽃내음을 맡았다. 낯익은, 하지만 어젯밤과는 느낌이 몹시 다른 그 목소리에 말랑말랑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자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몸이 절로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기숙사에 들어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게시판 봤어. 많이 혼났어?”
기분 좋은 향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 목소리는 이제 바로 자신의 귀 옆에서 들리고 있었다.
유리는 친근하게 제게만 말을 걸어오는 리본첼 영애, 아니 에시단 황자의 행동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바로 제 옆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하엘의 경악어린 시선에서 ‘이 배신자! 영애가 나는 아는 척도 안하잖아! 우리, 아니 내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너 혼자 리본첼 영애와 친해졌구나!’ 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건 비단 하엘 뿐만이 아니었는데 레온하트를 포함해 어젯밤 은빛 여우를 잡기 위해 뛰어다녔던 남학생들의 눈은 거의 질투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특별동의 기숙사 담벼락을 얼마나 힘들게 넘어가고 들어가서 고생했는지 전혀 모르는 이들로서는 본인들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 리본첼 영애와 친분을 쌓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을 것이었다.
유리는 리본첼 영애에게 눈이 먼 그들을 한심하게 여겨야할지 가여이 여겨야 할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와중에도 에시단 황자는 계속해서 유리에게 말을 걸어 주변 학생들의 질투를 한층 더 부추 키고 있었다.
“저런, 안색이 안 좋네. 역시 너무 많이 혼난 거 아니야? 괜찮아?”
“…….”
안 괜찮았다. 이마 위로 올려 진 고운 손 때문에 유리는 리본첼 영애를 좋아하는 많은 학생들의 질투심어린 시선에 자신이 폭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시선이 따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