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하룻밤사이 자신의 이상형의 여자와 친분을 만든 유리에게 하엘은 아낌없이 ‘부럽다!’ 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영리한 그는 이내 유리를 질투하는 것보단 그녀를 통해 리본첼 영애와 가까워지는 게 현명한 선택임을 깨닫곤 테이블 밑으로 몰래 유리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뭐야?’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같이 지내온 세월만으로도 하엘은 유리의 표정을 읽곤 눈으로 리본첼 영애를 한 번,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당연하지만 하엘이 유리의 표정을 읽은 것처럼 유리도 하엘의 제스쳐의 의미를 단번에 눈치 채곤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다, 싫다, 네 눈엔 내가 정말 리본첼 영애랑 친한 것 같냐…등등의 말들이 유리의 눈빛만으로도 느껴졌지만 지금의 하엘에겐 입 한 번 벙긋 하는 것만으로도 유리를 굴복시킬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가 존재했다.
‘우리 집?’
하엘은 유리가 귀족 영애로서는 차마 담지 못할 비속어를 중얼거렸다고 확신했다.
‘저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학기가 시작한지 채 얼마 되지 않아 확신하건데 유리가 가장 자주 어울리는 친구는 하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엘은 맹세코 유리가 방금 입 밖으로 내뱉었던 저 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유리의 앞에서 그 욕을 내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리본…아니, 카릴…이쪽은 내 친구인 하엘 가넥스.”
하엘은 방금까지 생각하던 의문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마나 친해진 건지 벌써 이름까지 부르며 말을 놓는 두 사람이 하엘로선 그저 부럽기만 했지만 그 친구가 자신에게 리본첼 영애를 정식으로 소개시켜주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제 네가 보고 싶어 했던 은빛 여우를 잡기 위해 노력해 준 애들 중 하나야.”
‘배신자!’ 라고 생각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역시 내 가장 친한 친구!’ 라고 생각하며 하엘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멋진-유리가 보기엔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표정을 짓곤 자리에서 일어나 리본첼 영애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타오르는 다른 이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양식 삼아 하엘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하엘 가넥스라고 합니다, 영애. 은빛 여우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제가 잡은 은빛 여우가 영애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갑작스런 에시단 황자의 등장으로 결국 그녀, 아니 그가 여우를 받지 않았다고 말을 하지 못해 한숨을 쉬던 유리는 버터 한 접시 가득 바른 듯이 느끼한 하엘의 목소리에 안 그래도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더더욱 일그러트렸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람? 그렇지 않아도 없던 식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면서 뻔뻔스럽게 ‘제가 잡은 은빛 여우’ 라니……. 당당한 그의 모습에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꿈의 이상형을 눈앞에 둔 하엘이나 그런 하엘의 시선을 즐기는 에시단 황자나 유리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제게 여우를 잡아 가져와주신 분이시군요. 후후, 유리가 말한 대로 멋진 신사분이시네요.”
유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저를 위해 애써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눈이 무척 즐거웠답니다. 안타깝게도 기숙사엔 동물을 들일 수 없어서 하룻밤의 즐거움일 뿐이었지만……하엘, 당신이 저를 위해 노력해 주었던 마음은 제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거 에요.”
“…….”
‘지금이야! 어서 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해! 아니면 진짜 구역질을 하던가!’
유리의 머릿속에선 순간 정체 모를 누군가의, 혹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녀가, 아니 그가-솔직히 이젠 어느 쪽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살며시 미소 짓는 순간 유리는, 아니 식당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은 몸을 굳히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식당 안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제 소원을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살짝 내려앉은 긴 속눈썹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그리고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올라간 입술 끝이, 그 모든 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명화 속 여인이나 아름다운 예술품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거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멀리 있던 사람들도 옴짝달싹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인데 바로 눈앞에서 수줍은 그 미소를 본 하엘은 과연 어떻겠는가? 에시단 황자의 눈부신 미소에 넋을 놓고 있던 유리는 마치 최면에서 깨어난 것 마냥 화들짝 놀라며 하엘을 바라보았다.
‘오, 이런…….’
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하엘의 벌어져 있는 입이라던가 넋이 나간 눈동자는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영혼이 빠져나갔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다시…….”
그 순간, 하엘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시 언제든 제게 부탁하셔도 좋습니다!”
침이 흐를 정도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그가 돌연 눈을 빛내며 에시단 황자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 하엘의 모습에 유리는 화들짝 놀랐지만 두 눈을 번뜩이며 황자의 두 손을 꽉 붙들고 있는 하엘은 유리처럼 최면에서 깨어났다기 보다는 한층 더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리본첼 영애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어서 저야 말로 영광이었습니다! 또 무언가 바라시는 일이 있으시면 언제고 좋으니 제게 꼭 말씀해 주세요! 제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의 부탁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영애!”
“저도요!”
“저도……!”
“어머.”
하엘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유리는 소름이 오싹 돋아왔다. 물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 중에는 레온하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일어나있는 학생들에게 호된 꼴을 당할 것 같아 감히 입도 벙긋 할 수 없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유리는 자신의 옆으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그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세디넬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 식당 안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 정말 친절하시군요.”
감동 받은 눈으로,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음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눈으로 환하게 미소 지은 황자를 보며 유리와 세디넬은 서로를 향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지금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물론입니다, 영애!”
“개처럼 편히 저를 부려주세요!”
“제 두 눈과 귀는 언제나 당신을 향해 열려있답니다!!”
왜냐하면 넋이 나가 외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이 똑같이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심에 찔릴 만한 나쁜 짓은 안 한 다며……!’
사람들을 홀리거나 농락할 생각은 없다더니 아무리 봐도 에시단 황자는 학생들을 유혹할 생각이 만만하였다.
‘아니, 고작 저 모습만으로 넋을 잃는 학생들의 정신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에게 푹 빠져있는 학생들과 생글생글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황자, 어느 쪽을 탓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유리는 결국 머리를 짚었다. 아마 이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리를 아프게 할 것 같다고, 유리는 어렴풋이 미래를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