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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소녀
작가 : an3375
작품등록일 : 2016.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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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그 이방인, 적응(適應) (3)
작성일 : 16-09-17     조회 : 510     추천 : 2     분량 : 5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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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아야 100년, 길면 500년까지도 산다는 이종족들에 비해 인간은 채 100년도 안 되는 수명을 가지고 살아야하지만 인간인 유리는 결코 그 삶이 짧거나 허망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게 주어진 삶의 반도 살아보지 않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혹자는 성급하고 우스운, 그리고 어린 아이다운 생각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적어도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인간으로서 16년을 살았다는 것은 꽤 긴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린 아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막 어른이 되기 직전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상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유리의 나이는 그 선 사이를 걷고 있다고 말하기에 적합한 나이였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유리는 자신의 안목이나 생각이 철없는 아이마냥 짧고 얕지는 않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뭐야, 다리엔. 이 건방진 편입생과 아는 사이야?”

 

 

 

 아아, 스스로를 어느 정도 어른이라 여기고 그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 옳을 거라 생각하던 그 생각이야 말로 얼마나 오만하고 근시안적인 생각이었단 말인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단번에 이해해버린 유리는 어린 아이처럼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쉬이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아 온 그녀의 눈물샘은 지금에 와서는 울고 싶다고 해서 울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신체 기관이 아니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참으며 유리가 말했다.

 

 

 

 “…그래, 아는 사이야. 이 편입생은 엘렌 카인첼. 특별동 기숙사의 학생이야. 그리고 엘렌, 이쪽은 게일드 폰 론드발, 론드발 백작가의 장남이야.”

 

 

 

 리오넬에게서 인간과 수인들의 문화의 다른 점을 들었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제국이 엘바니움과 교환학생이라는 제도로 30년 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인간과 엘프와 수인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종족이며 그들의 생각과 인식과 문화의 차이는 그리 간단히 좁혀지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 특별동 기숙사라고? 그 분의 가치도 모르는 너 같은 녀석이 어째서 특별동 기숙사에서 지내는 거지?”

 

 

 

 기가 센 게일드가 웬만한 또래 아이들은 가볍게 기죽일만한 매서운 시선을 날렸다.

 

 

 

 “그 녀석의 가치를 알아야 특별동의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게일드.”

 

 

 

 하지만 상대는 92살이나 먹은, 하물며 인간도 아닌 엘프였다. 유리는 게일드가 아무리 엘렌을 째려봐도 자신들의 5배나 더 산 그에겐 전혀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도리어 엘렌이 저를 노려보는 게일드를 귀여워하다 상황을 악화시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직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사탕껍질을 떠올려 보았을 때 유리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

 

 

 

 “그 분을 ‘그 녀석’ 이라고 부르지 마! 그리고 날 이름으로 부르지도 말라고!”

 

 

 “하지만 나는 네 이름과 성을 알고 있다. 아니면 ‘너’ 나 ‘당신’ 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

 

 

 

 엘렌은 유리의 충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유리의 탓이었다. 유리는 자신의 설명이 그가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게 하는데 턱없이 부족했음을 통감했고 자신이 협정의 관계자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이 자식, 어디서 왔기에 이런 멍청한 말을 하는 거야? 그보다 너! 목숨이 아까우면 방금 전의 헛소리를 취소하는 게 좋을 거야!”

 

 

 “헛소리? 나는 헛소리를 한 적이 없다.”

 

 

 

 유리는 엘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않아도 그가 대충 어떤 말을 해서 게일드를 분노하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엘과도 같은, 아니 하엘보다도 더한-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다.- 카릴 폰 리본첼의 열렬한 추종자를 눈앞에 마주하며 유리는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만 한 일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카릴 폰 리본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다는 말이 네가 그렇게 화를 낼만 한 말인 건가?”

 

 

 

 유리는 과장하지 않고 엘렌의 말에 게일드를 비롯해 모여 있던 대다수의 학생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어젯밤 에시단 황자에게 좀 더 강경에게 여장을 포기해 달라고 했었어야 한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아니면 리오넬과 엘렌에게 이 학원에서 절대 하면 안 될 말들의 리스트를 전해주던가…….

 

 

 

 “날 우둔하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우리 1학년의 빛나는 별! 리본첼 영애를 모욕하는 녀석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의 큰 목소리가 운동장 안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유리는 그의 말에 동조하며 흥분하는 학생들을 보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우연의 일치로 엘렌이 유리가 생각하는 걸 정확히 게일드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카릴을 모욕한 적이 없다만?”

 

 

 “그만둬! 같은 기숙사라고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친한 척 하는 것 같잖아!”

 

 

 

 유리는 어젯밤 은빛 여우를 잡기 위해 자신이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직접 우리를 제작했다고 열심히 어필한 게일드의 쌍둥이 동생 게일 폰 론드발을 떠올렸다. 형제 둘이서 카릴 폰 리본첼에게 빠져있다니……. 론드발 백작은 아무래도 자식 농사는 잘못 지은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벌써부터 그녀를 열렬히 기리는 학생들이 1학년 검술부 내에도 이렇게 많다니……. 이러다 언젠가 학원 내에 그녀를 위한 모임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유리는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앞에서 그녀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다니……. 나한테 시비를 걸 생각이 아니고서야 그런 거짓말을 내뱉을 리 없잖아!”

 

 

 “게, 아니 론드발. 네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지만 나는 거짓말을 내뱉진 않았다.”

 

 

 

 유리가 잠깐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엘렌과 게일드의 대화는-불행히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그 말이 엘렌의 입에서 내뱉어 졌다…….

 

 

 

 “나는 카릴이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

 

 

 “너희들이 녀석의 아름다움에 현혹된 걸 어리석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거기서부턴 너희들의 생각이니 참견하진 않겠다만 내게 너희들의 가치까진 강요할 수 없다.”

 

 

 

 시린 북쪽의 겨울바람도 지금 이곳의 공기보다는 따뜻할 것 같았다. 유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게일드와 엘렌을 바라보았다. 지금 엘렌은 -믿기지 않게도-하엘보다도 리본첼 영애에게 깊이 빠져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에게 온갖 귀한 선물과 구애의 말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리가 ‘징그럽다’ 고 표현한 스토커 짓을 마다하지 않는 집념 어린 리본첼 영애의 제 1추종자에게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엘렌의 말에 유리는 ‘그게 뭐 어때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리본첼 영애의 ‘리’ 자만 들려도 언제 어디서나 눈을 번뜩이는 게일드에겐 엘렌이 내뱉은 말의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그런 모욕적인 말을 내뱉다니…….”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게일드가 허리에 찬 훈련용 검을 빼들어 칼끝을 엘렌에게 겨눴다. 게일드가 턱짓으로 엘렌이 차고 있는 훈련용 검을 가리켰다.

 

 

 

 “검을 뽑아라, 엘렌 카인첼.”

 

 

 

 살기가 다분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게일드가 말했다.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망했다!’

 

 

 

 아무리 날이 서지 않은 훈련용 검이라지만 무게가 꽤 있는 검이기 때문에 머리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최소한 뇌진탕이 걸릴 것이다. 아니, 사실 문제는 뇌진탕 따위가 아니었다.

 

 

 

 “…좋다.”

 

 

 

 게일드에 말에 엘렌 역시 훈련용 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화난 이유는 역시 이해할 수 없지만 결투를 바란다면 받아들여 주마.”

 

 

 ‘더 망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유리의 입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결투라니! 아무리 미래 제국의 기사가 되길 꿈꾸는 이들이 모인 곳이 이 아스테리아 학원 검술부라지만 이런 점까지 기사와 같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 엘프들에게도 결투라는 제도가 있나?

 

 

 

 ‘…아니, 그 이전에 엘프들의 결투는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결투와 같은 건가?’

 

 

 

 이종족과 인간 사이에 결코 단기간 내 메울 수 없는 문화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실감한 유리로서는 게일드와 마주해 우아하게 검을 뽑는 엘렌을 보며 불안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 저건 큰일이군.”

 

 

 

 옆에 있는 유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는 리오넬의 말이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대체 뭐가 큰일인데?’

 

 

 

 당장이라도 리오넬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걸 참으며 유리는 진즉 저들을 말리지 않은 걸 후회했다. 관계자 없이 인간들과 한 달 동안 문제없이 수업을 들어온 리오넬이 큰일이라고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일이란 말인가?

 

 

 

 “내가 이긴다면, 방금 네가 한 말을 전부 취소하고 특별동 기숙사에서 나와라.”

 

 

 ‘뭐!’

 

 

 

 게일드가 엘렌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전까지의 상황도 결코 좋은 상황이라 볼 수 없었지만 게일드와 엘렌이 서로의 얼굴에 검을 겨눴을 때만해도 유리는 이 이상 더 나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아니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늘 자신의 생각대로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바로 어제 아스테리아 학원에 교환학생으로 온 이종족들이 비밀리에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강제적으로 그들의 원만한 학원생활을 도와줄 관계자가 된 유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좋다.”

 

 

 

 …이런 게 인생이라면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하나는 웬만한 또래 아이들보다 튼튼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유리는 엘렌의 말을 들은 순간 코르셋을 너무 조여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쓰러지는 여자들처럼 저도 모르게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네가 이긴다면 그렇게 하지.”

 

 

 

 계약서의 절반 이상이 비밀 엄수에 대한 이야기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협정의 관계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종족들의 학원생활이 '원만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유리는 첫 날부터 자신이 실패했음을, 아니 그냥 실패도 아닌 ‘대실패’ 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그래, 이게 좋겠군.”

 

 

 

 물론 유리가 자신의 실패에 머리 싸매고 끙끙거리는 와중에도 게일드와 엘렌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이기면 론드발, 너는 이 1년간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한다.”

 

 

 “……책?”

 

 

 

 엘렌의 말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공기가 굳었다.

 

 

 

 ‘책을 읽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엘렌이 내건 조건은 게일드가 내건 조건, 특별동 기숙사를 나와야 하는 것에 비해 너무 가벼운 것이라고, 유리는 아니 유리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생각했다. 다만 엘렌이 엘프라는 사실을 아는 유리가 ‘엘프들에게 있어 책을 읽어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비해 엘렌과 대치한 게일드는 인간의 시점에서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엘렌의 조건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 같았다.

 

 

 

 “…끝까지 나를 모독하는 군.”

 

 

 “나는 지금도 너를 모욕하지 않았다만?”

 

 

 

 물론 엘렌은 그런 게일드의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다시 급격하게 냉각되기 시작하였다. 유리가 채 끼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자세를 잡았고 눈 깜짝할 사이, 그 어떤 신호도 없이 서로를 향해 튀어나갔다. 이제 유리의 입에서 진짜 비명이 나올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그들 사이에 누군가 있었다. 이동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그 자리에서 솟아난 여자는 강렬한 붉은 머리에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창고에서 방어구를 옮길 때만해도 최대한 늦게 오시길 바랐던 검술 담당 선생님의 낯익은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유리는 분명 혀끝까지 올라온 비명을 참지 못하고 내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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