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중요해. 너보다 훨씬 그 여자가 더 중요해.”
“뭐라고?”
“네가 나에게 해줬던 일 되게 고마워. 만약에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하윤이를 못 만났을테니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뭘 어떻게 해줬어? 그래. 네가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거 그거는 당연히 고마워.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직도 버림받고 힘도 없는 마수일테니까. 하지만 그 뒤로 나에게 돌아온 거는? 네 집착? 너한테 노예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네 말 다 들어주는 힘없는 마수? 네가 준만큼 나도 너에게 많은 걸 해줬어. 네가 하라는 대로 했고 모든 걸 다 들어줬어. 이만하면 서로 그만 할 때 되지 않았냐.”
“너 그 말 취소해...”
“아니. 못해.”
“취소해!!!!! 방금 네가 했던 말 다 취소해. 얼른.”
“싫어. 못해. 내가 멍청했어. 너한테 잡혀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감정 숨기고 하윤이한테 했던 모든 행동 다 멍청했어. 어제 하윤이를 구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 멍청했어. 그러니깐 이젠 나는 하윤이 찾으러 갈 거야. 하윤이를 찾아서 내 진심 다 말해줄 거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우리 집으로 가서 다시 이야기 하자.”
“아니. 이제는 집에 들어가지 않아.”
“박우찬!!!!!!”
“소리 지르지마. 나는 이미 결심했어. 나는 하윤이를 찾을 거야. 그게 내가 할 일이야.”
“네가 왜? 도대체 왜!!!!! 왜 그 년인데 왜!!”
흥분한 듯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는 영인의 모습은 보기에 철저해 보였지만 우찬은 그 모습이 그저 가식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다... 네가 나한테 해준 거 전부 고마워. 그러니깐 지금 이 상태에서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다.”
“왜... 하필 그 여자인데...”
“뭐?”
좌절한 듯 우찬을 바라보는 영인의 눈빛은 아련하지만 또는 절망감에 휩싸여 보였다.
“야. 박우찬 이렇게 된 이상 하나 알려줄까? 너는 절대 그 여자랑 안 돼. 그거는 내가 장담하지. 너는 절대 그 여자랑 사랑 할 수 없어.”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만약 그 여자가 예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된다는 가정하에지만.”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말해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일단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야. 나 천사인 거 잊었어?”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싫어. 안 알려줘. 내가 왜 알려줘야 해? 어차피 너는 이미 나한테서 마음이 떠났는데 알려줄 이유가 없지 않냐?”
“하... 됐다. 그래.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깐. 우리 이제는 더 이상 마주치지 말자. 잘 있어. 나 간다.”
우찬은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영인의 곁을 떠나갔고 그런 우찬을 지켜보는 영인의 입에서는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박우찬. 너는 절대 그 여자를 사랑 못해. 네가 그 여자한테 했던 일을 기억하게 된다면 너는 분명 도망칠 게 뻔하니까.”
학교 뒤뜰을 빠져나와 숨을 고르고 있던 우찬은 저 멀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눈치 챘다.
“유하민...”
하윤과 친근하고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던 하민이 마음에 들지 않은 우찬은 그저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는데 그런 우찬을 하민이 잡았다.
“우찬 쌤! 하윤 쌤 어디 계신지 아세요?”
땀범벅이 된 하민의 모습은 마치 소중한 걸 잃어버린 듯 불안한 눈동자로 하윤을 찾았다.
“... 네가 왜 이 선생님을 찾아.”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하윤 쌤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사라지셨어요. 분명 무슨 일이 생기신 거예요. 그러니깐 아신다면 알려주세요.”
“만약 찾으면 네가 뭘 어떻게 할 건데?”
“만나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거예요.”
“쓸데없는 짓이야. 내가 찾을테니깐 너는 그냥 기다려.”
“싫어요.”
단호한 얼굴로 우찬을 쳐다보는 하민의 눈빛은 진심어린 눈빛이었다.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그냥 빠져있어.”
“쌤은 알고 계시죠?”
“뭐?”
“쌤은 알고 계시잖아요. 하윤 쌤 비밀.”
“너...”
“저는 몰라요. 무슨 비밀이 있는 거 같은데 뭔지 안 알려주셨어요. 근데 우찬 쌤은 알고 계시잖아요. 맞죠...?”
“돌아가. 할 이야기 없어.”
“쌤... 저 진짜 하윤 쌤 좋아하거든요? 근데 하윤 쌤은 저를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근데 왠지 쌤이라면...”
말문이 막혔는지 하민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하윤은 우찬을 자신과는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초라해지고 상처 받을까봐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쌤... 안 알려주셔도 되니깐... 그냥 저도 같이 찾으러 가면 안 될까요...? 진짜 하윤 쌤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해요... 걱정 된단 말이에요...”
“위험할 수도 있어. 그리고 너는 학생이잖아. 학교 다녀야 될 거 아니야.”
“괜찮아요. 어차피 학교 다니기도 싫어요. 애들이 이상한 소문으로 하윤 쌤을 조롱하는 것도 듣기 싫고 그리고 하윤 쌤한테 무슨 일 생겼을까봐 불안해서 꼭 찾으러 가고 싶어요.”
“고집 좀 부리지마.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위험해도 좋아요. 그냥 하윤 쌤만 만나면 돼요. 그리고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만약 만나게 된다면... 그때 포기 할게요.”
“포기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저 진짜 슬퍼서 바로 울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그 이상 질문을 하면 정말로 울어버릴 거 같은 표정으로 힘겹게 웃는 하민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다.
“그래. 더 이상 질문 하지 않을게. 대신 정말 위험해져도 나를 원망 하지마.”
“네!!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게요!!!”
허락이 떨어진 대답에 하민은 곧바로 얼굴을 피며 우찬에게 다가가 해맑은 얼굴로 애교를 피웠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우찬은 왜 하윤이 이 아이를 그렇게 이뻐하고 감싸줬는지 조금은 알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각 하윤은 어두운 환경에서 힘겹게 눈을 떴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 상태에서 눈만 굴려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검붉은 장소에서 손과 발이 묶여 있었고 방안에 있는 테이블에서 어떤 여자와 남자가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깨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하윤을 쳐다보며 다가왔다.
“일어나셨습니까. 하윤님.”
검붉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는 하윤에게 예의를 차리며 이야기를 건냈다.
“너희들... 마족이구나.”
“역시 하윤님이십니다. 바로 눈치 채셨군요. 한때 대단했던 천사답습니다.”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어제 내가 데리러 갔을 때는 아무것도 눈치 못 챘는데. 얼마나 하락한 건지 내 기운을 내뿜어도 눈치 못 채더라. 그 옆에 있던 마수도 멍청하고 말이야.”
비웃듯이 어제 교무실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하윤을 비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제인. 조용히 해.”
“흥. 알겠어.”
제인이라는 여인은 남자의 말이 무서운 듯 목을 가다듬고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약물을 가지고 하윤에게 내밀었다.
“마셔.”
“이게 뭔지 알고 나한테 마시라는 거지?”
“에잇. 귀찮게 따지는 거 나 안 좋아해. 그냥 마셔. 억지로 먹여버리기 전에.”
“하... 제인. 이쁘게 말할 수는 없어?”
“이 천사가 고분고분하면 나도 이쁘게 말하겠지!!”
“됐어. 너는 빠져있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모습이 제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하윤님 저 아이를 용서하세요.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야!!!! 누가 철이 없어!!!!”
밖에서 다 듣고 있었는지 제인은 철이 없다는 말에 문을 쾅 열며 남자에게 화를 냈다.
“조용히 하라고 했다. 더 이상 큰 소리 낸다면 화낼 거야.”
“알겠어!!! 빨리 그 천사나 처리해봐.”
서로 죽을 듯이 노려보는 모습은 마치 강한 짐승들의 싸움 같았다.
“하... 일단 하윤님 이거 먼저 마시세요. 그 뒤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미쳤어? 마족 따위가 건내는 뭔지도 모를 약물을 마시게?”
“풉... 하윤님이 그런 소리를 하시니까 좀 웃기네요.”
“웃겨? 내가?”
“네. 정말 웃깁니다.”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지?”
하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뒤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는 남자는 정말 웃겼는지 눈물을 보이며 웃었다.
“흥. 예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아무 의심 안하고 마셨던 게 누군데.”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하윤님 그냥 편한 마음으로 마시면 됩니다.”
“방금 저 여자가 했던 말. 무슨 뜻이지?”
“하... 알고 싶어?”
여자는 하윤에게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대며 턱을 쎄게 움켜잡으며 천천히 말을 했다.
“예전에 네가 이 약을 마셨었지. 아무런 의심 없이 말이야. 너는 어차피 네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천사잖아? 누가 다치던지 아무 신경 안 쓰던 네가 그런 소리하는 게 웃겨서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그런 기억 없어.”
“흥. 당연히 안 나겠지. 기억이 지웠으니까.”
“뭐?”
제인은 잡고 있던 하윤의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약이 뭔지 알아? 이 약을 마시면 스스로 소멸하게 되어 있어. 그때 당시에 너는 무책임하게 다른 존재들을 버리고 혼자 소멸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 약의 부작용으로 소멸은 안 되고 기억만 지워졌지. 뭐 그게 우리한테는 다행인지도 모르지. 이렇게 복수 할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제인 더 이상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남자는 계속 이야기하는 제인의 입을 막고는 웃으며 하윤에게 약물을 내밀었다.
“어서 마시세요. 이번에는 그때와 다릅니다. 하윤님 스스로 선택했던 일 저희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웃는 얼굴에 섬뜩한 모습이 보여 하윤은 어깨를 움츠리며 거부했다.
“웃기지마. 그딴 거 안 마셔.”
“왜죠? 예전에는 하윤님이 저희를 직접 찾아오셔서 달라고 했던 그 약인데요?”
“몰라!!! 그딴 거 몰라!!! 모른다고!!! 나는 그런 짓 한 적 없어!! 그러니깐 나 그냥 돌려 보내줘.”
“싫습니다만? 하윤님 이걸 마셔야지만 저희의 뜻을 이룰 수 있어서 말입니다.”
“결국 너희를 위해서 마시라는 소리잖아!”
“뭐 그것도 얼추 맞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먼저 원하셨던 건 하윤님 아니셨습니까?”
“기억 안나... 어서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줘...”
“그렇게는 안 됩니다.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먹이게 하는 수밖에. 제인 하윤님을 잡아.”
“알겠어.”
제인은 남자의 말에 따라 하윤을 억지로 잡은 다음 입을 벌리게 했고 남자는 이상한 약을 입으로 억지로 넣으려고 했다.
“정말 많이 약해지셨군요. 저희 둘도 상대하지 못하시다니.”
약햐진 하윤을 보며 비웃던 남자는 갑자기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문쪽을 노려봤다.
“이런... 방해물이 나타났나보네요.”
“귀찮아 죽겠네.”
두 마족은 경계를 하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쾅하며 큰소리로 문이 떨어져 나가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런 벌레 둘이서 하윤님을 해하려 하다니.”
문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하윤은 의외라는 듯이 이름을 불렀다.
“로엘?”
“하윤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문 밖에서 로엘과 다른 천사들이 대기하며 하윤에게 안부를 물었다.
“하윤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젠...”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다들... 여길 어떻게...”
“로엘님이 하윤님에게 이상한 움직임을 보셨답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을 쫒아와 보니 이런 상황이 벌어져 있더군요.”
“아...”
하윤은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 방금까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것에 두려움이 몰려와 손이 떨리고 목이 메어왔다.
“거기 마족 둘. 너희들이 감히 하윤님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구나.”
“풉.”
로엘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 남자 마족은 재밌는 일이 생긴 거 같아 즐거워졌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그 전에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미 늦어버렸네. 뭐 일단 우리가 먼저 물러나 줄테니 어디 우리를 찾아보시죠.”
그 말을 끝으로 마가 둘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사들은 그 모습에 이미 늦어 버린 상황을 얼빠진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엘님!! 이걸 어쩝니까!! 그 마족들이 사라졌습니다.”
“됐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하윤님이 무사하다는 것이니 일단 보류해두자.”
로엘은 하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윤을 천천히 감싸 안아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괜찮습니다. 자 이제 저희와 같이 가시죠.”
“어딜 가자는 거야?”
“어디긴요. 저희가 안전한 곳을 찾았으니 거기서 쉬시고 계시죠.”
“거기가 어딘데?”
“천상 근처입니다. 거기라면 안전 할 수 있어요.”
“거기가면 나 인간 세상으로 못가잖아.”
“무슨 소리하시는 겁니까.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니 안전한 곳으로 피해계시죠.”
하윤은 인간 세상이 위험해 가지 말라는 말에 문득 인간 세상에 있는 우찬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인간 세상으로 가지 못한다면 우찬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져 갔다.
“안돼. 나 가야돼. 그러니깐 나를 인간 세상으로 데려다줘.”
“...”
로엘은 무표정으로 하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빨리 나 인간 세상으로...”
“그 마수 때문입니까?”
“...”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로엘은 한숨을 쉬며 하윤의 귀에 속삭이며 말을 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 포기하시죠. 일단 하윤님의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로엘이 하윤의 뒷 목을 내리치며 기절시켜 안아 올렸다.
“젠 그 뒤는 너에게 맡기겠다.”
“네.”
‘하윤님 이번에는 절대 그 마수에게 당신을 뺏기지 않을 겁니다.’
로엘은 하윤을 데리고 빛을 내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