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후 용국의 서재.
천장에 난 창문으로 이제 막 힘을 뻗치기 시작한 빛이, 서재를 비추기 시작한다.
끝이 보이지 않게 높고 넓게 펼쳐진 책장 속에 각양각색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인간 세상의 서재와는 차원이 다른, 기묘한 분위기다.
신의 손이 천년 묵은 산삼을 먹어가며 사흘 밤낮을 고심해서 성형을 한 것처럼 조각 미남이 되어 있는 천마가 2층 높이 되는 책장에 훌쩍 뛰어 책장 언저리에 걸쳐 앉았다.
천천의 얼굴과 똑같았지만 짧은 머리 스타일과 코끝의 작은 점 하나가 원래의 천천이 풍기는 분위기와 전혀 달라보이게 했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천마는 그렇게 두 시간째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 한 권에서 눈을 못 뗐다.
읽고, 또 읽고......
몇 번째 다시 읽으면서도 마치 책을 태워버릴 것처럼 눈빛이 이글이글 타 올랐다.
(얼마나 중요한 책이길래?)
“왕자마마”
천마의 스승 대제학이 책장 위에 있는 천마를 향해 목이 터져라 하고 불렀지만, 천마는 못 들었는지 꼼짝도 안 했다.
몇 번을 불러도 소용이 없자 대제학은 아예 확성기를 가져와 입에 대고는,
“오늘 용오름.....”
천마가 용오름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날개가 달린 것처럼 바닥으로 가뿐히 내려오는데, 손에서 책이 미끄러지며 대제학 발 앞에 떨어졌다.
대제학의 눈치를 보는 천마.
재빨리 발 앞에 떨어진 책을 집어 드는 대제학.
“무슨 책인데 그리 집중을 하고 계셨습니까?”
“주십시오. 쓰앵님과 공부할 인간 세상에 대해 예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당황한 천마는 대제학의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대제학이 책을 뺏기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흥! 삐지기 전에 얼른 돌려주십시오.”
천마가 포기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팔짱을 꼈다.
“논자의 50가지 그림자라?”
대제학은 천마의 요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책 제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세상의 성인들 중 공자, 맹자, 노자, 순자, 장자, 한비자는 들어봤어도 논자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쓰앵님께서 알고 계신 그 성인들은 다 중국분들인데, 논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성인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제 제가 왕자마마께 배울 차례인가 봅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천마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제학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천마가 접어놓은 페이지를 펼쳐,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과 함께 귀 안을 파고드는 사랑해라는 말이 온 몸에 불을 지폈다.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덮...... 아이구머니나!”
대제학은 얼굴이 빨개지며 책을 바닥에 냅다 던져 버렸다.
“쓰앵님은 19금도 아닌 15금 밖에 안 되는 이런 걸 가지고 내숭은......”
천마가 책을 집어 들며 볼멘소리를 하자,
“대 용국의 왕자마마께서 어떻게...... 이런 불순한 책을 읽는데 시간을 허비할 수 있습니까?
대제학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웅크리고 앉아 투덜거렸다.
“불순한 책이라니요? 쓰앵님께서 인간의 사랑은 늘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천마는 대제학을 약 올리듯 천진난만한 표정과 음성으로 맞받아쳤다.
“네네, 오늘 수업 시간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울지 생각하며 따라오십시오.”
대제학은 벌떡 일어나 천마를 한 번 흘겨보고는 그 자리를 피해 나갔다.
“수업이라뇨? 아까 용오름 다리에 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천마가 쫓아가며 물었다.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그냥 오늘 용오름 다리가 열릴까? 라고 말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지 말고 용오름 다리에 한 번만 데려가 주십시오.”
천마가 대제학을 뒤따라가며 용오름 다리에 데려가 달라고 집요하게 매달리나, 대제학은 집요하게 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으며 천마를 약 올렸다.
이후 몇 권의 책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마주 앉은 대제학과 천마.
둘 사이의 기 싸움이 팽팽하다.
대제학, 책을 한 페이지씩 넘기며 천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 세상의 고대 제나라 경공이 공자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자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했습니다. 각자 서로의 자리에서 자신의 분수와 명분에 맞게 처신해야 세상이 바르게 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마는 자신감 넘치는 소리로 대답했다.
“인간 세상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의 아버지는 미래에 군주가 될 아들에게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강조했습니까?”
“지배자가 피지배자보다 더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했습니다. 지식이 아닌 지혜는 부하들의 자발적인 충성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롭다는 명성을 빨리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지혜를 얻는 길은 무엇이든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찾아가 정보를 얻는데 소홀히 하지 말며,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움으로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일 외에는 특별한 방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천마의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잘 하셨습니다.”
대제학이 만족스러운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천마와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던 대제학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이 때다 싶었다.
“쓰앵님, 용오름 다리~”
천마는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가며 갖은 애교를 다 부려 본다.
“안 됩니다.”
대제학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천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인간 세상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이런 몸 상태로 아무런 준비 없이 가셨다가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다른 일반 백성들도 갔다 오지 않습니까?”
“최근 인간 세상에 다녀온 백성들 사이에서 인간들에게 홀려 아무것도 못하는 ‘상사병’ 이라는 전염병이 돌아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 거 아침 조례 시간에 보고 받으셨잖습니까?”
대제학이 발끈했다.
“그 분과 약속한 게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려면 인간 세상으로 꼭 가야 합니다.”
천마가 소심해진 말투로 말했다.
“어의가 분명히 당부 하지 않았습니까? 2년 동안은 조심을 하셔야 한다구요.”
대제학의 걱정이 음성에 그대로 묻어났다.
“인간 세상과 저희와는 시간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기다리는 사람에게 2년은 너무 가혹한 시간 아닙니까?”
말빨이 먹히지 않자 천마의 언성이 높아졌다.
“왕자마마께서는 이 나라에서 미래의 후손들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폐하를 비롯해 백성들이 후손들을 기다리며 맘 졸이고 있는 시간에 비하면 그깟 인간과의 약속 좀 2년 뒤로 미루면 어떻습니까?”
대제학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그깟 인간과의 약속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랬습니다.”
“천천과 똑닮았다는 이유로 희생되어 제 몸이 된 분입니다.”
“누가 듣겠습니다.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대제학이 천마의 입을 막으며 누가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천마는 필사적으로 대제학의 손에서 입을 떼며 다시 말했다.
“그 분이었을 때 이 심장이 마지막으로 저에게 간곡히 부탁한 거라 말입니다. 우리도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 분이 얼마나 원통했을지 저라도 한 번쯤은 헤아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자마마께 약속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 없습니다. 단지 조금 미루라고 했을 뿐입니다. 지금 왕자마마께 중요한 건 그 분의 희생도 아니고, 그 분과의 약속도 아닌 이 나라란 말입니다.”
“스승님마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인지 몰랐습니다.”
천마는 더 이상 대제학과 언쟁을 벌여 봐야 별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자마마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신 동안에 백성절벽이 왔습니다. 왕자마마께서 왕자마마의 역할을 못하는 동안 생산가능백성의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말입니다. 그 말은 앞으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점점 피폐해질 거라 말입니다.”
“하지만......”
천마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대제학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의 왕자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길이 없었다.
“지금은 다른 그 어떤 거보다 왕자마마께서는 몸을 빨리 회복하셔서 백성들을 생산해 내는 일에 성심을 다 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제학은 엄한 말투로 당부했다.
“제 마음을 이해 못 해 주시겠다니 저 삐질 겁니다. 앞으로는 예습이고 복습 아무것도 안 해 올 겁니다.”
천마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책을 신경질적으로 덮고 나가 버렸다.
대제학은 그런 천마의 모습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 세상으로 가시려고 하실 텐데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꼬?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오면 우리 모두에게 피바람이 불어 닥칠 텐데......’
*
*
인간 세상 아프리카 남수단. 밤
윤슬은 숙소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적이 아닌 평화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 곳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대가로 잠시 허락된 휴식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삐거덕 대는 낡은 간이침대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비닐 창문으로 천막 앞에 길게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눈에 보였다.
빨아도 그대로 남아있는 흙물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핏물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건 그냥 얼룩이 아니라 윤슬과 그 동료들에게 남겨지는 게 뭔지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침대에 몸을 뉘여 보았지만 오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느 새 그녀의 몸은 간이침대 옆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상자 앞에 가 있었다.
불에 거슬린 모서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꽤 묵직한 나무 상자 하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 부분을 쓰다듬었다.
뜨거운 흙바람에 내전으로 인해 하루 종일 총소리와 폭발음이 들리는 축복받지 못한 이 땅에서,
아무런 꿈도 없이 굶주림과 질병에 지친 얼굴의 이들을 보면서,
매일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부여잡는 그녀를 유일하게 웃게 하는 것은,
가끔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이 상자 안의 물건들과 향기였다.
그녀는 틈틈이 그 상자의 물건들을 꺼내보며 누군가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모습을 짓곤 했다.
동료들도 그런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밖에 널린 옷에 남아 있는 흙과 피처럼, 주먹만한 그녀의 작은 심장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박혀 있을 그 남자.
열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 남자는 윤슬에게 있어 친구이자, 스승이자, 연인이자, 보호자였다.
꽃잠의 설렘과 여운으로 밤새도록 사랑을 속삭이며 행복함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 날 아침, 그는 한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6개월 동안 이리저리 수소문 해 봤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수장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를 납치해 간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이 요구 조건을 내걸기 위한 인질로 그를 납치해 간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이 중요 정보를 누설한 배신자들과 그들을 어떻게 조정해서든 불게 한 그를 처단하기 위해 납치해 간 것이다.
등등 흉흉한 소문들만 들릴 뿐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이곳으로 왔던 그녀는 그렇게 빈손으로 내일이면 돌아가야 했다.
6개월의 휴직 기간이 끝나가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어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애달픈 그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귓가에 들렸다.
“제가 곧 갈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분명 교수님 목소린데......
윤슬이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맨발로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리저리 뛰어다녀 보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구슬프게 울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내 눈앞에 나타나 줘. 제발.”
*
*
인간 세상 대한민국 동해바다. 깊은 밤.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더니 회오리치는 그 안에서 뭔가 튕겨져 나왔다.
“아야~”
해안가 모래사장에 나뒹굴며 천마가 머리를 문질렀다.
그런 천마 뒤로 다니엘이 소리도 없이 안정적이고 멋진 자세로 착지해 앉는다.
“여기는 대체 어디인 거야?”
천마가 옷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섰다.
“그 분이 지금 계실 나라입니다.”
천마가 다니엘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뒤돌아 봤다.
“네가 여기 어떻게? 나를 미행한 것이냐?”
“모든 게 제 잘못이잖습니까?”
다니엘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얼마나 똑닮았는지 어의도 이 몸이 천천인 줄 알고 있지 않느냐? 전지전능한 구슬 밖에는 구분 못하는 거였어.”
“하지만 그 분이 대군이 아니라고 했을 때, 제가 좀 더 신중히 알아 봤어야 했었습니다.”
“대군이 거짓말 하는 거라 생각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급해서 그랬던 거 안다.”
“......”
다니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천마는 그런 다니엘의 모습을 모른 척하며 잠시 돌아섰다.
“나 혼자 갔다 와도 되느니 너는 용국으로 돌아가거라. 괜히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너까지 혼나지 말고.”
천마가 거들먹대며 말했다.
“인간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아무 말씀 말고 제 뒤나 잘 따라 오십시오.”
다니엘이 눈물을 훔치고는 앞서 갔다.
천마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