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영국.
“축구 경기장으로 출발 할 시간입니다.”
인공지능 스피커가 시간에 맞춰 그의 일정을 알려 주었다.
철인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두꺼운 의학서들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 앞에서 단번에 일어섰다.
소파 위에 놓여 있던 후드 집업을 입으면서 선글라스와 휴대폰을 챙겼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 왔다.
책상 서랍에서 갈색 반지갑을 꺼냈다.
잠깐 지갑 가죽의 거칠거칠한 촉감을 느끼다 쓴 웃음을 짓고는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시내는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들이 몰고 나온 차로 북적북적 했다.
그는 차를 가지고 오지 않길 잘 했다며 스스로를 칭찬 했다.
지하철과 셔틀 버스를 이용하여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영국 지하철은 한국 지하철에 비해 좁고 덥고 지저분한데 소음도 심해 처음 타 본 한국인들은 몹시 불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철인은 뉴욕 지하철보다는 낫다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하철 안도 제법 북적였다,
그는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축구 이야기로 신나 보이는 중장년층의 남성들, 핸드폰 게임에 열중인 사람들, 팔짱을 끼고 조는 사람, 사랑 표현을 하는 연인들까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각기 향하는 곳도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지하철 안을 살피던 철인의 눈길은 중학생쯤? 아직 어려 보이는 학생 커플들에 머물렀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두 아이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예뻤다.
철인의 얼굴에도 따라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한 백인 남자가 한 동훈 선수의 유니폼을 입은 동양인 여자를 향해 얄궂은 미소를 짓더니 그녀 뒤에 바짝 붙어 서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으로 쓸어내리고 머리카락을 한 뭉치 잡아올려 샴푸 향기를 맡았다.
조금 뒤 그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그 남자를 흘겨보더니 오른쪽으로 자리를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그 남자도 주위의 눈치를 잠깐 살피고는 그녀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점점 구석진 자리로 그녀를 몰고 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남자가 수상해서 계속 예의주시 했다.
역시나.....
그녀가 참을만큼 참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그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녀의 입에서 한국말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 남자의 눈동자가 뺑 돌더니 얼굴에서 매력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듣진 못해도 자신을 비난하는 말인지는 아는 것 같았다.
“DVD나 파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이 쌍 X이!”
그 남자도 그녀의 뺨을 후려 쳤다.
“아!”
그녀가 뺨을 감싸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가 쓰고 있던 야구 모자가 벗겨져 철인의 발 앞에 나뒹굴었다.
철인은 모자 시접 안에 꽂혀 있는 사진을 보고 집어 들려는 순간,
사람들의 발에 체여 모자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째려보며 당차게 일어나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로,
“나는 IT 강국에서 와서 촌스럽게 DVD 그런 걸로 안 봐. 그리고 이 안에 너의 더러운 행적이 다 녹화되어 있으니까 경찰서에 가서 잘잘못을 한번 가려 볼까?”
이번에는 유창한 영어로 말하며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뭐? 경찰서?”
“그럼 내가 여기서 괜찮아요하고 그만둘 줄 알았나 보지!”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남자와 그 여자에게 쏠렸다.
그 잘 생긴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도드라지더니,
순식간에 그녀 뒤로 가서 그녀 목에 팔을 휘감고 목에 칼을 바짝 들이 댔다.
지하철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윤슬도 호신술을 틈틈이 익혔지만 이 남자의 힘을 당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칼이 목살을 헤집고 들어올 것 같았다.
“더 떠들어 봐. 내가 그 때부터 한 마디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녀의 귀에 대고 그 남자가 속삭였다.
“......”
그녀는 입술만 들썩일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목을 팔로 더 옭아매며 다들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녀를 죽일 거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저 여자가 그 사진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철인은 눈을 들어 돌아서 있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칼이 목을 향해 있으니 그녀는 몸이 굳었는지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 때서야 철인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이리저리 사람들의 행동을 살피며 소리쳤다.
“나 사람 좀 죽여 본 사람이야. 허튼 짓 하는 순간에 이 년도 죽고 당신들도 죽을 수 있으니까 다들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어.”
모두들 숨을 죽이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잠시 뒤 철인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지하철이 멈추면 또 어떤 상황이 연출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동양인 여자 한 명 구하자고 위험을 무릅쓸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철인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이 귓가에 계속 울렸다.
해외 파병지에서 군의관 생활과 오지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면서 뼈저리게 배운 건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과,
주어진 인생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며,
하고 싶은 일에 기회가 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제압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집중하려 노력했다.
저 여자를 구할 방법......
그래, 생각났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지갑을 꺼냈다.
눈을 치켜 떠 그 남자의 손의 위치와 칼의 각도를 계산한 뒤 그 남자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갔을 때 지갑을 세게 던졌다.
“아!”
지갑을 맞은 손에서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인은 칼을 다시 줍기 위해 그녀의 목에서 그 남자의 팔이 풀렸을 때,
그 남자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제압을 했다.
일부러 한 대 더 때렸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괜찮냐고 물어봤다.
온 몸을 떨고,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가 역에 정차하자 놓으라고 발버둥치는 그 남자를 일으켜 세워 경찰에게 인계를 했다.
그리고 지하철 안으로 얼른 뛰어 들어가 아까 그 모자를 찾았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꺄아~ 저 남자야! 저 남자!”
“완전 멋있다. 번호 한 번 따 볼까?”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며 사진을 찍고 전화번호를 물어 보는 등 관심을 보였다.
그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 사진이 자신의 사진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주위에 더 몰려들기 전에 얼른 지하철역을 빠져 나왔다.
*
*
날은 저물어 벌써 캄캄해졌다.
“저 변태 꼴통 시키만 아니었어도......”
윤슬은 경찰서 건물을 돌아보면서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재빨리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오늘 우리 아빠 사위는 잘 했나?”
그녀는 손톱을 입에 물고 만수넘 공식 홈페이지로 급히 들어갔다.
하지만 여긴 한국이 아니었다.
버퍼링이 계속 걸렸다.
“아~ 정말, 한국은 5G 시댄데, 여긴 뭐야?”
그녀는 핸드폰이 고장 난 건 아닌지 손바닥으로 핸드폰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조급함에 발까지 떨었다.
“뜬다...... 뜬다....... 떴다.”
『한 동훈 선수, 만수넘 새 구장 첫 공식 경기에서 첫 골 포함 해트트릭 기록!』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빠 사위가 해트트릭을 터트린 이 역사적인 날에 내가 거기 없었다니......”
만수넘 공식 홈페이지 1면을 장식한 한 동훈 선수의 사진이 떠 있는 휴대폰을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추행범 시끼 하나 때문에 경기장을 코앞에 두고 일이 꼬였으니 속상해 할만 했다.
“아니지, 좋은 날인데 이러고 있음 안 되지.”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오늘보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하루하루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17살에 의대에 입학해 전공의 시절부터 그녀의 수술 실력은 명의라고 불리는 선배들도 인정을 할 정도였다.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러브콜을 보내는 병원도 많았다.
하지만 윤슬이 다 거절하고 정형외과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이곳으로 온 이유는 딱 하나.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서 핫한 대세 미드필더 한 동훈 선수!
윤슬은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꿈도 대한민국 남자 축구 국대 주치의였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그녀에게 다른 의사들보다 눈에 띄는 스펙이 필요했다.
여자라는 성별이 남자 선수들을 케어할 때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마이너스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유럽 축구계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신의로 불리는 존 홉킨스 박사였다.
정형화 된 교과서 수술은 한국에서 충분히 마스터 했다.
이력서에 쓸 만한 그의 명성과 교과서 외 별책 부록 같은 그의 테크닉을 배우고 싶었다.
거기다 존 홉킨스 박사는 한 동훈 선수가 속해있는 만수넘 구단의 주치의를 겸하고 있었다.
그럴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만 한 동훈 선수를 병원에서 직접 볼 수도 있고, 치료를 해야 할 상황이면 그 치료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 우리 아빠 사위 볼 수 있는 날은 많아. 상심하지 말자.”
윤슬은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 병원 건물 내에 있는 까페를 찾았다.
줄을 서 있는 동안에 카페 안을 둘러 봤다.
까페 안은 어두운 편이었다.
대신 테이블마다 조명이 따로 배치되어 있었고, 초록색 갓을 쓴 조명은 날아오르는 초록색 풍등 같이 아름다웠다.
도서관 같은 분위기이지만 자유로워 보이는 카페에는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때 창 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남자.
아까 그 남자였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급박한 상황에서 잠깐 본 얼굴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윤슬은 뭐에 홀린 듯 그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 남자는 휴대폰을 받더니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테이블 위에 보던 책과 가방을 그대로 두고 가는 걸 보니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윤슬도 작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동안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커피를 다시 시켰다.
유리로 된 텀블러도 하나 샀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종이도 아닌 텀블러 유리에 글자를 새기 듯 정성들여 적느라 낑낑댔다.
『 저는 사약이 아닙니다.
감사2 기적2 소망2을 담은
황금비율의 보약 커피입니다.
오늘 님께서 살려주신
한국인 여.사입니다.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마음에 내내 걸렸었는데
여기서 다시 뵙게 됐네요.
살려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시험 공부 중이신 거 같은데
님의 지친 눈을 깨워 줄
이 보약 커피가
전 과목 에이 뿔따구를 받는
마법을 일으켜 줄 겁니다.
그리구 우연히라도.....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밥 한 끼 살 수 있는
시간을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저 지금 끼 부리는 거 절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혹시나......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
글을 다 적은 윤슬은 경직된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포트에 담긴 커피를 텀블러에 따랐다.
텀블러에 적힌 글자들이 채워지는 커피에 흡수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의도한 대로 되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첫 문단만 보이게 커피를 채운 윤슬은,
뚜껑을 닫아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의 테이블에 펼쳐진 의학서들 사이로 슬그머니 밀었다.
윤슬은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더 늦기 전에 기숙사로 복귀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
*
윤슬은 연수 첫 날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존 홉킨스 박사의 갑작스런 개인 사정으로 인해 지도 교수가 바뀌었다는......
“아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바뀐 지도 교수는 존 홉킨스 박사님이 아끼는 수제자로 그녀보다 3살이나 어린 14살 때 이 곳 의전원에 입학해 모든 과정을 최단 시간에 퍼팩트하게 수료하고, 24살 때 최연소 교수 자리에 앉은 현생에서는 없을 것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눈, 코, 입이 1:1:1로 반짝이는 판타스틱한 얼굴과 가운을 입어도 도드라진 넓은 어깨와 긴 다리를 비롯해 탄탄한 근육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인 몸매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가 그처럼 놀란 건 윤슬의 지도 교수가 어제 자신을 구해 준 그 남자.......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