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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왕자 새끼
작가 : 어사화
작품등록일 : 2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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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기억.
작성일 : 19-09-18     조회 : 293     추천 : 0     분량 : 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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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세상 영국, 캠브릿지 대학병원.

 

 해리성 기억 상실이라.......

 

 윤슬은 정신의학과 교수의 진료실에서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녀도 그럴 것이 휴직에서 복귀한 후 병원 사람들부터 괜찮냐는 말부터 들어야 했다.

 

 해외 의료 봉사를 다녀왔으니 그런 인사를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남자는 많으니 다른 남자를 만나라느니, 남자 때문에 안 됐다느니, 드디어 정신줄을 놓았다는 말까지.......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그렇게 수근 거려대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몇 년 사이의 기억이 뒤죽박죽 된 거 같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정신의학과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지도 교수였다고 했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군의관으로 아프리카 해외 파병을 가서 사라지기 전까지.

 

 그리고 그가 유독 아낀 애제자였던 그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냥 사제관계는 아니었단다.

 

 그녀가 그 소식을 들은 후 바로 휴직을 하고 그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를 찾아 수소문 했다는 거 자체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를 찾기는커녕 기억을 잃어버리고 온 꼴이 되었다.

 

 다들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윤슬을 위로했다.

 

 그 남자에 대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움에 애타는 마음도 없고, 가슴에 남은 추억도 없어 남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은데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게 이상하고 이상했다.

 

 그녀 안에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

 *

 

 험준한 골짜기와 협곡을 넘으니 동굴 앞에 있는 수많은 함정들과 맹수들과 싸워서 이겨야 했다.

 

 무수한 백성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곳이라 그런지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천하의 다니엘이라고 하더라도 긴장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칼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마른 침을 삼키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알 수 없는 소리와 형체 없는 무엇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바람이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멈춰 섰다.

 

 얼마나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에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만 존재할 뿐이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하는데, 네가 하면 천마가 많이 아플 거야.’

 

 천천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 시라도 빨리 치유의 꽃을 찾아 천마를 살려야 했다.

 

 다니엘은 다시 걸음을 뗐다.

 

 얼마나 앞으로 전진 했을까?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동굴의 끝이 보였다.

 

 그 곳은 이 때까지 지나온 길과는 달리 너무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신들의 영혼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형형색색의 신기한 빛들이 하늘을 끊임없이 수놓고 있었고, 땅에는 알 수 없는 꽃들과 치유꽃이 피어 있었다.

 

 다니엘은 치유꽃을 보자마자 꽃밭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때였다.

 

 뱀같이 움직이는 나무줄기들이 땅 속에서 솟아나더니 그의 몸을 휘감고 공중에 매달았다.

 

 그 밑으로 스카프로 얼굴을 잔뜩 가린 허리 굽은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너도 치유꽃을 찾아 여기까지 왔느냐?”

 

 고개를 숙인 체 물었다.

 

 “네.”

 

 다니엘은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그럴수록 나무줄기는 더 조여 왔다.

 

 “그 누구도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는데 넌 여기까지 온 거 보면 보통 녀석은 아닌 거 같구나. 그래, 만약 나보다 이 꽃이 더 필요하다면 내가 이 꽃을 너에게 주마.”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약속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시에는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 나라 왕자마마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왕자마마라고?”

 

 노파가 눈빛을 번득이며 다니엘을 째려봤다.

 

 “잘 아실 거잖습니까? 왕자마마에 대해서!”

 

 다니엘은 노파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 스스럼없이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가 지팡이를 땅을 한번 치자 다니엘을 휘감았던 나무줄기들이 땅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다니엘은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에 대해서 알고 온 것이냐?”

 

 “대제학께 들었습니다. 왕자마마를 낳으신 어머니라고.”

 

 다니엘이 옷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어머니는? 무슨! 낳기만 했지, 옆에서 보살펴 주지도 못했는데.”

 

 노파는 혼자 중얼대다 다니엘에게 급하게 물었다.

 

 “우리 천마에게 왜 치유꽃이 필요한 겁니까?”

 

 “천천 대군이 순수 혈통인 자기가 왕자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야욕을 드러내며 왕자마마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 세상으로 데려 갔어야 했는데 내가 국서에게 속아 이렇게 유폐되는 바람에......”

 

 “왕자마마께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철저히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의 기억은 모두 지워야 합니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빨리 꽃밭으로 걸어 들어가서 치유꽃을 뽑아 유리병에 넣었다.

 

 치유꽃에서 빛이 반짝반짝 거렸다.

 

 다니엘을 노파에게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우리 천마가 무사히 인간 세상으로 가게 잘 부탁드립니다.”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 세상으로 나갔다가 옥황상제께서 천마가 제 자식인 걸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왕자마마께서는 이미 다른 인간의 영혼을 품고 계시기 때문에 잘 모르실 겁니다.”

 

 “제가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발각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으로 가면 이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향낭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그것이 천마를 지켜 줄 수호신을 만나게 해 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노파는 다니엘의 손을 꼭 잡으며 애절한 눈빛으로 천마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다시 한 번 전했다.

 

 *

 *

 

 천천이 천마와 자리를 바꾸고 난 뒤 용국에서는 합방일 때마다 수천만의 건강한 후손들이 잉태되고 태어나 연일 축제 분위기였다.

 

 여왕과 국서는 천마와 천천이 바뀐 지도 모르고 건강한 새 생명들의 탄생 소식에 그저 안도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몇 십 년을 살아온 천천은 이 곳 생활에 적응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죄다 해산물에 생선뿐인 음식부터 시작하여 도통 소질이 없는 글공부까지.......

 

 가끔은 꽉 낀 바지처럼 답답한 이 곳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왕궁을 인간 세상처럼 바꾸어 나갔다.

 

 먼저 유명한 패션디자이너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잡아 와 자신만 입을 화려한 옷을 만들게 하고, 왕궁을 황금으로 휘황찬란하게 리모델링을 했다.

 

 그 다음에는 인간 세상에서 나는 육질 좋은 고기들과 각종 양념류와 향신료들을 들여와 진귀한 해산물들과 같이 차린 음식에 신선들이 마신다는 술까지 구해다가 마시며 매일 밤 큰 잔치를 벌였다.

 

 그러다 보니 대제학과 같이 아침에 하는 글공부 시간에는 늘 참석을 하지 못했다.

 

 왕궁의 재정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백성들의 삶은 더 궁핍해졌다.

 

 백성들의 원성도 원성이었지만 여왕과 신하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하지만 천천은 콧방귀를 뀌었다.

 

 오히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반하는 언행을 하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다.

 

 어느 늦은 밤, 술에 흠뻑 취한 천천이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피가 묻은 날 선 장도를 바닥에 질질 끌며 불 켜진 어느 방 문 앞에 섰다.

 

 그가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대제학과 다니엘이 놀라 일어났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대제학이 차분하게 물었다.

 

 하지만 천천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한 걸로 보아 이미 이성을 잃은 듯 했다.

 

 다니엘은 옆에 세워 둔 검을 잡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천천은 검을 들어 올려 아직도 굳지 않은 피를 보여주며 술병을 들이켰다.

 

 입 속으로 말려 들어가지 못한 술이 그의 턱을 타고 내렸다.

 

 “방금 이 칼에 누가 죽었는지 알아?”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천천이 말했다.

 

 “왕자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부디 자중하십시오.”

 

 대제학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코웃음을 지었다.

 

 “흥! 내가 왕자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말 같군.”

 

 “지금 나라 재정은 바닥이 나고,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왕자마마께서 이렇게 흥청망청 하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 건강한 후손들도 봤겠다, 이제 나를 쫓아내고 다시 천마를 왕자로 바꿔 놓고 싶겠지?”

 

 들고 있던 칼을 대제학의 눈앞에 겨누었다.

 

 다니엘도 칼을 빼 들고 대제학의 앞에 서서 천천의 칼끝에 맞섰다.

 

 “그래, 죽일 테면 죽여 봐! 천마를 다시 데려오려면 날 죽여야 할 테니까.”

 

 천천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대제학이 다니엘에게 칼을 내려놓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안 됩니다. 자칫하다가는 대제학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대제학은 다니엘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니엘은 천천을 한 번 째려보고는 칼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천마 마마는 어떻게 됐는지 왕자마마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달래 듯 차분한 말투로 대제학이 말했다.

 

 “허,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너희들이 인간 세상에 꽁꽁 숨겨 놓은 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왕자 마마께 시신까지 보여 드렸잖습니까?”

 

 다니엘이 나서서 말했다.

 

 “죽은 것처럼 꾸민 거겠지!”

 

 대제학과 다니엘이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봤다.

 

 천천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내가 어디 있는지 찾아 낼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제 너희 둘은 죽어줘야겠어.”

 

 단숨에 칼을 휘둘렀다.

 

 다니엘이 대처할 겨를도 없이 천천의 칼에 쓰러졌다.

 

 이어 대제학도 천천이 휘두른 칼에 다니엘 위에 쓰러졌다.

 

 바닥에는 두 사람의 피가 낭자했다.

 

 “그러게, 새 주인을 모셨으면 새 주인이 하는 대로 따라야지 왜 자꾸 딴생각을 해?”

 

 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바닥에 던졌다.

 

 “이제 한 놈만 없애고 나면 두발 쭉 뻗고 자겠구나!”

 

 소리 내어 웃으며 대제학의 방을 나갔다.

 

 천천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사라져 갈 때쯤, 어디선가 나타난 이들이 다니엘과 대제학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

 *

 

 치유꽃 덕분에 용족으로서의 기억을 모두 잃은 천마는 다니엘과 대제학이 어린 시절부터 천마의 몸이 되기 전까지의 철인의 삶을 족집게 세뇌한 덕분에 철인이 되어 살고 있었다.

 

 납치되었다 구사일생으로 몇 개월 만에 돌아온 군의관으로.

 

 그는 몇 달에 걸쳐 군 당국과 의료진의 조사와 심리치료를 같이 받아야 했다.

 

 사적인 부분에서는 해리성 기억 상실이란 진단을 받을 정도로 여러 가지 연결되지 않는 기억들도 있었지만, 공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한 수술 실력과 리더십으로 군 관계자들과 동료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다시 있었던 자리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납치되기 전 사용했던 개인 물품들은 어디로 갔는지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의료 도구 외에 눈에 보이는 거, 손에 잡히는 거, 발에 차이는 것조차 모든 게 다 낯설었다.

 

 다만 언제 폭격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부상을 입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면서, 누군가가 서글퍼지게 보고 싶어 눈물이 날 때가 있었다.

 

 누군지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일이 또 있었다.

 

 밤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꼭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로 뭔가를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하튼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도 그렇게 컴퓨터를 켜 놓고 멍하니 앉아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던 내가 기억 상실이라니.

 

 “실망하지 말자. 언젠가 돌아오겠지.”

 

 기억을 일부분 잃었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닌 건 아니니까.

 

 내 삶의 루틴은 그대로 쭉 이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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